“저녁에요?”
“그래.”
“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가 웃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한숨이 들려왔다.
한숨의 출처는 로만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로만은 지금 레이넌이 하려는 걸 꽤 반대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유독 피곤해 보였던 이유를 찾은 나는 로만의 얼굴을 가득 채운 감정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포기였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마음은 남아 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한숨을 연거푸 내뱉었다.
“신경 쓰지 마, 로만은.”
“네. 그보다 저녁에 뭘 하실 건데요?”
“외출이나 잠깐 해 볼까 하는데.”
“외출이요?”
“모처럼 재밌는 구경을 할 수 있는 시기니까.”
“그렇군요. 그럼 에드윈도 함께 가나요?”
“아쉽지만 이번엔 에드윈은 함께 갈 수 없겠군.”
“그렇구나…….”
나도 모르게 서운한 티를 너무 낸 모양이었다.
“에드윈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저도 위험한 거 싫어요. 외출 안 하고 싶어졌는데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던 나는 소심하게 말했다.
“그럼 저는요?”
“아이와 성인이 같을 순 없지. 혹시 몰라서 조심하려는 거니까 겁먹을 것 없어.”
“그렇겠죠?”
여전히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고, 레이넌은 그런 내 마음을 이번에도 잘 읽은 듯했다.
“나도 있고, 아멜리아도 붙어 있을 테니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
“네.”
레이넌이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정도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생각하고 보면 그는 몇 번이고 위험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이야기했다.
하지만 매번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또한 그의 말대로 나에게는 어떤 위협도 없었다.
……없었던 게 맞겠지?
아주 잠깐 이제까지 나를 의아하게 했던 몇 가지 일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냥 잊었다.
어쨌든 나는 지금 이렇게 무사하니까. 괜히 깊이 생각해 봐서 좋을 건 없었다.
***
레이넌이 가볍게 말한 외출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여기는……?”
“건국제는 제국에서 가장 큰 축제지.”
“아, 건국제 기간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로군요.”
“그렇지.”
야시장이라도 선 듯 거리는 밝게 빛나고 있었고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들 하나같이 즐거운 얼굴이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겨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에드윈도 함께 왔으면 좋아했겠네요.”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에드윈은 위험해.”
그래서 아이와 성인의 차이에 관해 이야기했던 걸까.
에드윈이 함께하지 못한 건 아쉽긴 했지만 이 정도면 안전을 염려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윈도 커서 제 몸 하나 지킬 수 있을 때쯤 되면 구경쯤은 올 수 있겠지.”
“그렇겠죠?”
레이넌의 말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 주었다. 나는 조금 가벼워진 기분으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든 게 다 신기했다.
그간 여기서 봐 온 사람들은 모두 로에리안저의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 그리고 모든 것이 낯설게 다가왔다.
여러모로 로에리안저의 사람들과는 달랐고, 신선한 모습이었다. 의상도 그랬고, 머리 모양도, 말투도 그랬다.
“그런데 거리를 밝히는 불빛은 뭐예요?”
길가를 따라 나란히 서 있는 나무에는 은은한 불빛을 내뿜는 등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기름등이야.”
“기름등이요?”
“그래. 기름등에 불에 강한 뚜껑을 씌워 놓은 거지. 혹시나 바람이 불더라도 꺼지지 않게.”
“와. 너무 예뻐요.”
기름등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커다란 반딧불이들이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기 사람들은 뭘 파는 거예요?”
“글쎄.”
이번 질문에는 레이넌도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아멜리아가 대신 답해 주었다.
“여러 가지를 팔아요. 음식도, 의복도, 장신구도. 없는 게 없을걸요?”
“정말?”
“네. 모두 즐기는 축제 기간이라 다른 때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내놓는답니다. 이럴 때 다들 신나게 돈을 쓰려고 모으죠.”
“아멜리아도?”
“저는 물욕이 별로 없는 편이라서요. 딱히 건국제 기간이라고 뭘 사 본 적은 없네요.”
“물욕이 없는데 내 물건 살 때는 왜 그렇게 신이 나는 거야?”
“르네 님은 꾸미는 재미가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는 됐고. 이제 움직여 볼까.”
레이넌은 내 손을 끌어 자신의 팔에 끼웠다.
“대신 나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말도록 해.”
“네.”
정작 움직여 보자고 한 레이넌도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그도 여기에 나온 건 처음인 듯 보였다.
“이쪽부터 가죠.”
어느 쪽이 나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레이넌을 올려다보던 내가 먼저 그를 끌었다.
레이넌은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녔다.
“이건 뭐예요?”
“머리에 이렇게 꽂아 주는 장신구랍니다.”
예쁜 꽃이 흔들리는 장신구는 어디에 쓰는 건가 했더니 머리카락에 끼우는 핀 정도인 모양이었다.
“이거는요?”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인 리본입니다. 여자아이들은 머리에 묶고, 남자아이들은 목에 타이처럼 맨답니다.”
은은한 광을 품은 하늘색 리본에는 작은 다람쥐가 그려져 있었다.
“목에 타이처럼…….”
“살까요?”
에드윈의 눈을 떠올리게 하는 색감과 귀여운 동물을 보며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아멜리아가 물었다.
“사도 되나요?”
“그래.”
레이넌을 올려다보며 묻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한테 꽤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요?”
“그렇겠군.”
로만이 값을 치르고 물건을 건네받자 레이넌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저기에는 왜 사람들이 모여 있을까요? 뭔가 구경거리가 있나 봐요.”
“가 보지.”
“공작님.”
내 말에 레이넌이 바로 대답하자 로만이 아주 조용히 그를 불렀다.
“괜찮대도. 내가 옆에 있잖아.”
레이넌의 말에 로만은 금방 뒤로 물러났다.
사람들이 모인 곳은 노상 술집인 듯 보였다. 바깥에 테이블을 두고 음식과 술을 즐기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가운데를 비워 놓고 둥글게 테이블 세팅이 되어 있었는데, 거긴 무대였던 모양이었다.
악기 연주가 한창이었고, 흥겹게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작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꽤 팀워크가 좋아 보였다.
“연습을 많이 했나 봐요. 어쩌면 저렇게 동작이 다들 딱딱 맞죠?”
내 말에 레이넌을 포함해서 다들 나를 빤히 바라봤다.
“왜요?”
“저건 제국의 전통 춤이잖아.”
“아, 그래요? 무용수들인 줄 알았어요.”
아마 술 마시던 사람들이 흥겨워 무대로 올라가서 즉흥적으로 춤을 춘 듯했다.
“아니, 르네 님. 아무리 세상사에 무심해도 전통 춤까지 모르는 건…….”
“아……. 춤추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어설픈 내 변명에 아멜리아와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댄스 수업 첫날에 마담 로렌느가 아예 춤이라곤 춰 보지 않은 사람 같다고 했었죠.”
첫날부터 그런 평을 받았다. 뭐,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춤을 출 일이 뭐가 있다고.
흥겨운 음악과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박수가 어우러져 한층 더 조화로운 음악이 되었다.
“다들 굉장히 즐거워 보이네요.”
“그렇군.”
레이넌도 이 모습이 꽤 재미있는지 한참을 나와 함께 그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술집을 빠져나가려던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내 옆을 지나갔다.
애초에 내 주변에는 아멜리아와 로만을 비롯해 기사들이 가득해서 부딪힐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보이자마자 레이넌은 나를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여기는 그만 구경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군.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있으니.”
“네. 충분히 즐겼어요.”
“그럼 이제 저쪽으로 가 볼까요?”
우리는 아멜리아가 손짓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물건들이 가득했다.
거기서 에드윈이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 싶은 작은 노트를 사고, 또 아이들이 잘 가지고 논다는 장난감도 샀다.
나를 위해서는 고운 색감이 매력적인 그림책을 사기도 했고, 또 예스러운 매력이 있는 팔찌도 하나 샀다.
이런 쇼핑은 꽤 즐거운데.
“그런데 어째서 에드윈 것만 그렇게 사는 거지?”
“네?”
로만을 불러 내가 산 물건들을 살펴보던 레이넌이 나를 보며 물었다. 단단히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제 것도 샀는데요.”
“에드윈의 물건이 가장 많지 않나.”
“아무래도 에드윈은 못 왔으니까…….”
내 말에도 레이넌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그때 아멜리아가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공작님 것은 하나도 안 사셨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하지만 일부러 그랬다기보다는…….
“하지만 공작님은 이미 굉장히 좋은 물건들이 많으시니까요. 여기서 산 물건을 쓰실 것 같진…….”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도 이런 곳에서 산 물건을 즐겨 쓰곤 하는데.”
“아, 정말요? 몰랐어요. 그럼 이제 공작님 것을 사러 가 볼까요?”
내 말을 들은 레이넌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오른쪽으로 한 발,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한 발 옮기던 레이넌은 나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좋겠나?”
“오른쪽부터 가 볼까요?”
내 대답을 들은 레이넌은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꽤 많이 둘러봤지만 레이넌에게 어울릴 만한 물건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든 참 고급스럽게 소화하는 남자라 여기서 그에게 어울리는 물건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건 뭐예요?”
“깃펜입니다.”
“오래된 것 같네요.”
“네. 아주 오래전에 유명한 장인이 만든 물건인데, 관리가 매우 잘되었답니다.”
“음……. 좋아 보이는데, 왜 아직 여기 있을까요?”
“이런 데서 팔기엔 너무 비싼 물건이라서 그렇죠.”
“아…….”
검은색 깃털과 펜대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지만 그게 오히려 펜의 중후함을 한층 높여 주었다.
“이걸로 할게요.”
내 말에 상인은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이걸 사신다고요?”
“네. 혹시 안 파시는 물건인가요?”
“그럴 리가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 너무 비싼 물건이라……. 감사합니다!”
팔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쁜 듯 상인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건 감사한 아가씨에게 선물로 드리는 잉크와 깃펜을 닦을 천입니다.”
“감사합니다.”
서비스까지 두둑하게 챙겨 주는 인심에 절로 신이 나서 물건을 받아 들었다.
레이넌은 상체를 기울여 내가 산 물건을 눈으로 훑었다.
“내 눈앞에서 내 선물을 사는 모습은 또 처음이군.”
“내용물은 보셨지만 포장은 아직이잖아요?”
“그래. 포장을 기대하도록 하지.”
레이넌은 내 말에 농담처럼 대꾸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다음 가게로 넘어갔다.
한참을 구경만 하던 내 발이 향한 곳은 손수건 가게였다.
여러 무늬가 새겨진 손수건 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무늬는 없지만 레이넌의 눈을 떠올리게 하는 보라색 손수건과 또 에드윈의 머리칼을 떠올리게 하는 주황색 손수건이었다.
제법 고르게 염색이 된 손수건은 촉감도 꽤 좋았다.
“이것 두 개 주세요.”
내 돈도 아닌데 너무 많이 썼나.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내가 그간 받은 월급으로도 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크게 불편한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꽤 많이 산 것도 사실이었고, 구경도 많이 해서 다리가 아프기도 했다.
음식을 못 먹어 본 게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었던 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다.
“어머, 이런 곳에서 뵙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