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그래도 되나요?”
“응? 응. 그래도 되는데…….”
기분 나빠 할까 봐 조심스러웠는데 에린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에린을 보며 나는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옷장에 있는 옷들은 다 줄 수 있어. 모두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것들이야.”
변명과도 같은 말을 들은 에린은 옷장 안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등을 확 돌렸다.
그녀의 기세에 눌린 나는 뒤로 살짝 물러났다. 하지만 에린은 그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내 손을 붙들었다.
“정말요?”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정말 괜찮아?”
정말 괜찮냐는 질문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먼저,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다고 하나 어쨌거나 내 걸 준다는 건데 괜찮냐는 뜻이었다.
다음은…… 정말 쓸데없이 휘황찬란하기만 한 이런 드레스들이 괜찮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에린이 내 질문을 어떤 뜻으로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무 좋죠!”
……이게?
“이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혹시 이번에도 내가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낸 건 아닌가 싶어 움찔했다.
다행히 목소리의 주인은 내가 아닌 세실이었다.
새삼 같은 마음에 반가운 눈으로 세실을 찾았다. 그녀는 에린의 뒤에 서서 어깨 너머로 드레스를 살펴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세실도 나를 돌아봤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세실도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저런 걸요?”
‘저런 걸’이라는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보기에도 창피한 저런 것들이 갖고 싶겠냐는 의미가 분명했다.
“……그렇지? 괜한 소리를 했네.”
내 말을 들은 세실은 안도한 얼굴로 다시 옷장을 들여다봤다. 물론 금세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그럼 저 정말 여기 있는 드레스 모두 가져도 되는 거예요?”
“응. 에린이 괜찮으면.”
“감사합니다.”
에린은 신이 나서 내 손을 꼭 붙들며 말했다.
진짜 에린은 저런 드레스가 좋은가?
에린의 취향은…… 그냥 화려한 것만 때려 넣으면 되는 건가. 조화로움은 상관없고?
“과한데, 아무리 봐도.”
“네?”
“응? 아니야. 그냥 혼잣말. 좋아하니까 다행이네.”
어차피 남의 취향인 것을. 내가 뭐라 왈가왈부할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 이따가 저녁때 챙겨 갈게요.”
“아니야. 괜찮으니까 지금 챙겨. 기왕이면 가져가서 정리도 하고 한번 살펴보기도 해. 저녁쯤에 돌아와도 되니까.”
“아무리 그래도…….”
“괜찮아. 곧 아멜리아도 올 거니까 편하게 다녀와.”
아멜리아가 온다는 건 다시 쇼핑이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쇼핑할 때는 에린이 옆에 없는 편이 나았다. 그녀가 있어 봤자 더 정신 사나울 뿐이었으니까.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에린은 살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감사히…….”
“그래. 세실도 괜찮으면 에린 좀 도와줘.”
“아멜리아 님이 계신다고 해도 저도 있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세실은 차분히 제 본분을 말했다. 나는 담담한 얼굴을 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조용히 속삭였다.
“다음은 장신구래.”
내 말에 세실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나를 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야 감사한 말씀이지만 괜찮으시겠어요? 혼자?”
“네가 골라 주는 것도 아닌데, 뭘. 너까지 굳이 시달릴 필요도 없잖아. 대신 조금 무겁긴 할 거야.”
“차라리 힘쓰는 게 낫죠. 감사합니다.”
세실은 무거운 드레스를 번쩍 들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떠났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아멜리아가 밝은 얼굴로 들어섰다.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할까요?”
“조금만 이따가. 마음의 준비 좀 할게.”
“알겠습니다. 차 한 잔을 다 마시면 그때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멜리아는 산뜻한 미소를 보이며 다시 방을 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도대체 이 쇼핑의 끝은 언제쯤 오는 건지 알고 싶었다.
아멜리아에게 물어봤지만 그녀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이제 거의 다 마련했으니 조금만 더 참으세요.”
이런 면에서 레이넌과 아멜리아는 참 잘 맞는 편이었다.
“설마 하면서도 매번 믿는 내가 제일 문제지.”
오늘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의 일정은 장신구 쇼핑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이었다.
***
나는 방을 채웠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르네 님?”
사람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아멜리아가 나를 불렀다.
“못 일어나. 오늘은 이걸로 일정 끝이잖아.”
눈을 감았지만 아직도 눈앞이 번쩍거렸다.
반짝이는 보석이 하나 있으면야 예쁘지만 여러 개 모여 있으니 오히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뭘 골랐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사실 그들이 가져온 물건은 하나같이 훌륭했기에 상관없는 문제기도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쉬고 싶은 정신과 몸이었다.
“잠시만 더 시간을 내주세요.”
“안 돼. 더 못 해. 살려 줘.”
아멜리아를 보면 약해질 것 같아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떼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내 말에 아멜리아는 웃었다.
“체력이 이렇게 약하셔서야……. 이제 체력 단련도 하셔야겠어요. 그쪽은 제가 전문이니 저만 믿으세요.”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정신적으로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을걸.”
“그건 그렇네요. 그래도 다행히 댄스 수업은 엄청 빠르게 마스터하셔서 다행이에요.”
“아, 그거.”
“매우 소질 있으시다고 칭찬이 끊이질 않던데요.”
“사람이 뭐든 하나쯤은 잘하는 게 있잖아.”
그랬다. 나도 몰랐던 춤의 재능을 이 나이에, 여기에서 찾았다.
물론 처음에야 음악도, 스텝도 모든 게 어색하긴 했지만 나도 놀랄 정도로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덕분에 파티 직전까지 이어져야 할 수업이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끝냈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아니었다면 이렇게 지친 상태로 댄스 수업까지 해내야 했을 테니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나한테도 잘하는 게 있다니. 게다가 이럴 때 찾아서 말이야.”
“르네 님이야 장점도, 능력도 빠지는 게 없는걸요.”
일부러 아멜리아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던 것도 잊고 고개를 빼꼼 들어 그녀를 올려다봤다.
“또 의심하신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안 하는 성격이라니까요.”
아멜리아는 늘 예쁘고 좋은 말만 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이 늘 고마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의심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런 내 눈을 보고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저는 르네 님이 고생을 덜 하시니 기쁘지만 공작님께서는 조금 실망하신 모양이에요.”
아멜리아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실망이라니? 내가 댄스 수업을 마스터했는데 왜?”
“글쎄요.”
“나 잘한 거 아냐? 뭐 잘못한 거야?”
“설마요. 르네 님이야 잘하셨죠.”
“그런데 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혹시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놀란 나와 달리 아멜리아는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그만 놀리고. 나 진짜 뭐 잘못한 거야?”
“아니에요. 승마처럼 진행이 더디면 직접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모양이에요.”
“다행이다. 그거야말로 정말 다행이네.”
진심으로 새어 나온 내 말이 아멜리아는 꽤 재밌는 듯했다.
“정말로. 발이라도 밟으면…….”
생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했다. 물론 화를 내진 않겠지만 그렇게 마음이 불편한 상황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꽤 아쉬우신 것 같아요.”
“직접 가르쳐 주지 못해서?”
“그렇죠.”
잠깐 그 상황을 상상했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댄스가 승마보다 체력적으로 힘들진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레이넌이라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너무 그렇게 질색하지 말아요. 공작님은 르네 님을…… 음, 뭐랄까.”
“독려하고 싶은 거지.”
기척도 없이 나타난 레이넌이 아멜리아 대신 대답을 내어주었다. 깜짝 놀란 나와는 달리 아멜리아는 담담하게 몸을 돌려 인사를 했다.
레이넌은 성큼성큼 다가왔고, 그의 뒤에는 단단히 지친 얼굴의 로만도 함께였다.
“르네 님, 오랜만입니다.”
“으응……. 로만.”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놓는 건 제법 익숙해졌지만 로만에게는 아직까지 쉽지 않았다.
정작 로만은 나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조차 그에게는 업무 중 하나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로만의 저런 표정은 나 때문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유독 저렇게 티가 날 정도면 뭔가 레이넌이 힘든 일을 시킨 걸까.
그간 지켜본 바로는 레이넌이나 로만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할 정도로 해내는 일이 많았다.
“무슨 생각 중이지?”
멍하니 있는 사이 레이넌은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일어날 틈을 놓친 내 옆에 앉은 그를 보고 뒤늦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레이넌은 내 손을 잡았다.
“일일이 일어날 필요 없어.”
“감사합니다. 그보다 독려라니요?”
“여러모로 피곤할 그대를 위한 내 성의 정도겠군. 편안하게 쉬라고 말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지.”
“아니요. 이것도 저와 공작님의 거래이니까요.”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을 했다. 그 순간 내 손을 붙든 레이넌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공작님?”
여전히 레이넌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달랐다. 손이 그랬듯 얼굴에도 힘이 풀린 것처럼 보였다.
“약속이죠, 공작님과 저의.”
거래라는 말이 너무 정이 없었나. 지레 찔렸던 나는 단어를 바꿔 봤다.
그래도 레이넌은 뭔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그대로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낯선 그의 모습에 놀라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곧 레이넌은 허탈한 미소를 흘려보내더니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렇지. 우리의 약속 때문에 고생하는 그대를 독려할 기회를 놓쳐서 얼마나 실망했는지.”
“실망이요? 공작님께서요?”
“그럼.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꽤 열심히 고민했거든.”
“그러시구나.”
레이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돌아와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크게 보이는 차이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레이넌은 농담만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았지. 그대를 독려할.”
“독려까지 안 하셔도…….”
“그럴 수 있나. 게다가 댄스 수업을 생각보다 짧게 끝냈으니 상이라고 해도 되겠지.”
“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말씀만이라니. 그럴 수야 있나.”
레이넌은 내 뒤로 손을 올렸다. 소파의 등받이에 팔을 걸고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오늘 밤에 시간 좀 내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