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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60)화 (60/129)

“제 일이니까 일단 제가 정리를 해 볼게요.”

내 말에 레이넌은 금세 에린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러고는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서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떻게 정리를 할 생각이지?”

“일단 먼저 설명해 드리자면 갑자기 관계가 바뀐 탓에 에린이 불편한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원하면 그만둬도 좋다는 이야기를 한 것뿐이에요.”

“그랬군. 고작 그 이야기에 저렇게 호들갑을 떤 거군.”

에린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끼어들 입장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아챘기 때문일 터였다.

“어쨌거나 이렇게 소란스러워질 만한 상황은 아니에요. 에린이 원한다면 계속 있어도 상관없긴 한데…….”

“한데?”

“제 눈엔 에린이 아직 많이 불편해보여서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에린을 바라봤다.

“아니에요. 정말 그렇지 않아요. 불러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데요.”

내 시선에 에린은 마치 발언권을 얻은 듯 말을 급하게 쏟아 냈다.

“일단 너도, 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이대로 서로 거북해지는 건 나도 싫으니까.”

“시간이 필요하다니…….”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야. 다만 나와 마주치는 일은 당분간 하지 않았으면 해.”

“그런…….”

“어차피 세실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자.”

“그래. 그렇게 하지.”

에린에게 말했지만 대답은 레이넌에게서 들려왔다.

“그대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될 일이야. 시녀에게 일일이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지.”

새삼 냉정한 목소리에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샌가 레이넌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는 걸 느낀 탓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 모습이 익숙해야 했는데 이젠 조금 낯설게 보일 정도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처음엔 무섭고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었는데…….

“르네?”

나에게 향하는 그의 눈빛과 말투에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물론 모르는 사람에겐 큰 차이가 없이 들릴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그 간극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것도 과연 보여 주기 위함일까.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일까. 눈앞이 어지러워 몸이 비틀거렸다.

다행히 가까이에 있던 레이넌이 나를 붙들어 넘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군.”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칼슨을 부르지.”

손을 내저었지만 레이넌은 나를 부축해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잠깐이면 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내 신경이 쓰일 테니 그냥 칼슨에게 진료를 받도록 해.”

그와 굳이 실랑이할 필요가 없었다.

“알겠어요.”

그 말에 레이넌은 안심한 얼굴로 내 손을 붙들었다.

레이넌은 꽤 바쁜 일정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칼슨의 진료가 끝날 때까지 내 곁을 지켰다.

정확하게는 아무 이상 없고 괜찮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무 무리하지 말도록 해.”

“그럴게요.”

레이넌은 오늘따라 유독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등 쉽게 방을 떠나지 못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로만이 찾아와서 그를 재촉하고서야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은 채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레이넌에게서 애정이 느껴졌다. 제법 서서히 보이기 시작해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진심처럼 보일 수 있을까.

지금의 레이넌이 보여 주는 모습은 가짜임이 분명한데 왜 자꾸 나는 자연스럽게 진심처럼 느끼는 걸까.

아니, 이걸 왜 고민하고 있지?

일 년이든 그 뒤가 되었든 그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나도 원하는 것을 얻을 터였다. 그리고 나면 끝일 사이인데…….

“끝이라…….”

“르네 님?”

나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내내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피는 아멜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칼슨을 다시 불러올까요?”

“아니에요. 오늘은 좀 잡생각이 많이 드네요.”

“시끌시끌해서 그런가 봐요. 그래도 오늘 푹 쉬어 두셔야 해요. 바로 내일부터 건국제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하셔야 하니까요.”

“네. 그런데 세실과 에린은요?”

“르네 님이 정신이 없으신 것 같아서 그냥 여기저기 심부름을 보내 놨어요.”

“그렇구나. 그보다 아멜리아?”

“네?”

“왜 저를 르네 님이라고……?”

말투는 전과 달라지지 않았지만 아멜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르네 님’이라는 호칭에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르네 님.”

“네.”

“이제 저에게도 말을 낮추셔야 해요.”

“그렇게 되나요?”

“어려우시면 에드윈 님을 기준으로 두세요.”

“에드윈……은 공작님을 빼곤 모두에게 반말하는데요?”

“그러니까요. 아주 쉽죠?”

“기준은 깔끔하네.”

습관처럼 높임말이 나오려고 했지만 아멜리아가 눈을 찡긋했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적당히 말이 끊어졌다.

“잘하셨어요.”

“그럼 이제 로만 님……도 로만 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겠네요?”

“네. 이제 마음껏 이름을 부르고 부려 먹으셔도 된다는 뜻이죠.”

“하하……. 그랬다간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무서운데. 어쩐지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기억할 것 같아서.”

“그런 성격이긴 한데 아마 갚아 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말을 높이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이상하게 말이 끝났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평소 그랬듯 그것만으로도 잘했다며 나를 응원했다.

“아직 어색하긴 하지만 아주 잘하고 계세요. 금방 적응하실 것 같은데요?”

“고마워.”

“그리고 에린에게 거리를 두라고 말씀하신 것도 잘하셨어요.”

“그런가?”

에린이 불편해 보여서 나도 같이 불편해질까 봐 한 이야기에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다.

“네. 그리고 차라리 세실 같은 사람이 르네 님 옆에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요.”

“그건 왜?”

“세실은 사람이 무덤덤하잖아요. 그런 사람이 옆에 있어야 르네 님도 덜 휘둘리죠.”

“아, 그건 그렇네.”

확실히 아멜리아의 말이 맞았다. 아마 에린이 곁에 있으면 이런저런 소소한 소문까지 모두 들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에린의 성격상 뭐든 부풀리고 호들갑을 떨며 말할 테니…….

“확실히 세실이 있는 편이 훨씬 조용히 지낼 수 있겠네.”

“네. 어쨌든, 내일부터 준비 시작할 테니 푹 쉬셔야 해요.”

“두 번이나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멜리아가 같은 말을 반복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멜리아의 얼굴에서 낯익은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휴가 준비를 하던 때 본 얼굴이었다. 무척이나 신이 난 듯하던 그 얼굴.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들릴 리 없는 하이 톤의 웃음소리가 내 주변을 빙빙 도는 것 같았다.

“휴가 준비가 그 정도였는데 건국제, 게다가 황제 폐하까지 참석하는 파티를 위한 준비라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멜리아를 올려다보며 말을 꺼냈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지난번에 못 샀던 걸 모두 살 수 있겠어요.”

“쉬어야겠어. 아주 푹.”

레이넌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나 에린에 관한 일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당장 내일부터 닥칠 일을 대비해 쉬는 것이었다.

***

불길한 느낌은 언제나 그랬듯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아멜리아의 즐거운 미소를 본 그날 이후 정신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갑자기 생겨난 여러 수업은 그렇다고 쳐도 가장 나를 지치게 하는 건 역시나 쇼핑이었다.

어째서 물건은 사도 사도 끝없는 걸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멜리아는 여전히 부족한 게 많다며 매일같이 여러 사람을 불러들였다.

“괜찮으세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소파에 그대로 누워 버린 내게 세실은 물을 건넸다.

그녀의 얼굴도 나와 비슷했다. 질리고 질려 버린 얼굴을 한 세실은 나를 조금 안쓰럽게 바라봤다.

“고마워.”

나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세실이 건넨 물을 들이켰다.

세실과 다르게 에린은 내내 눈을 반짝이며 나보다 더 쇼핑을 즐기는 것 같았다.

직접 고르지 못해 안타까워하면서도 설레는 기색을 제대로 숨기지 못했었다.

“왜 그러세요? 저라면 너무 즐거울 것 같은데요.”

지금도 그랬다.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들뜬 마음이 그대로 묻어났다.

에린의 말에 나와 세실은 눈을 마주쳤다.

세실은 조금 전보다 더 질린 얼굴을 해 보였다. 내 표정 역시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제가 르네 님을 대신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에린은 우리 두 사람의 눈빛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게. 에린이 날 대신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에린의 말을 듣는 그 순간 진심으로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에린을 바라봤다. 에린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눈에 담긴 감정을 알아차린 듯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곧 에린의 눈에 강렬한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러움과 시기. 그 모든 게 섞인 결과는 미움이었다.

눈치 없다는 평을 듣는 나조차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나 쇼핑을 하고 싶었나.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꽤 좋은 생각이 아닐까 했지만 금세 마음이 바뀌었다. 선뜻 물어보기엔 조심스러운 질문이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고민스러워 한참을 에린만 응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시선을 받은 에린은 조금 전 강렬하게 내보이던 감정을 지우고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혹시 말이야.”

“네.”

“음……. 아니야. 아무것도 아냐.”

“왜 그러세요?”

“잘못 생각한 것 같아. 잊어버려.”

“궁금하잖아요. 저 그런 거 못 참는 성격인 거 잘 아시면서. 알려 주세요. 네?”

하긴, 에린은 한번 궁금한 게 생기면 끝까지 답을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물론 꽤 집요한 면도 있었다. 이대로 말을 안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녀는 아마 무슨 말인지 알 때까지 물어볼 것이 분명했다.

“대신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 그냥 아주 잠깐 생각한 것뿐이니까.”

“제가 왜 기분이 나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얼른 말씀해 주세요.”

“그럼 따라와 볼래?”

나는 침대 구석에 놓인 옷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 안을 본 에린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작은 옷장에는 예전의 르네가 모아 둔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혹시 이거 가질 생각이 있는지……. 물어볼까 했지. 잊어버려. 그냥 해 본 생각이야.”

내 말을 들은 에린은 아무 말 없이 눈만 가늘게 떠서 나를 바라봤다. 진심인지 확인하려는 눈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시 나와 옷장 안을 번갈아 보던 에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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