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윈보다 그대를 걱정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저를요?”
“그래. 당분간은 편안히 지내게끔 얘기해 뒀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여럿 일어날 거야.”
“그럴 수 없는 상황이요?”
“저택 내에서 도는 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란 말이야. 다들 천박하고 날카롭게 그대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고 하겠지.”
“무섭네요.”
내 말에 레이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고아한 말로 아주 고급스럽게 잘 포장은 할 거야.”
“그게 더 무서운데요.”
“어쨌거나 그대는 그대 하나만 잘 챙기도록 해. 그러다가 못 버틸지도 모르니.”
“네.”
저택 내에서 도는 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니.
상상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미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벌써 피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힘이 풀려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자 레이넌은 왜 그런지 알겠다는 듯 웃었다.
“지금 이 얘기까지 하면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지도 모르겠군.”
더 지치게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한숨을 쉬며 그 이야기는 내일로 미룰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어차피 들을 말이라면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이대로 돌아가서 자면 되니까.
“말씀해 주세요.”
“곧 건국제가 있는 건 알고 있겠지?”
“네.”
그런가. 세상사에 어둡다 보니 알 리가 없었지만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황궁에서 3일간 큰 파티가 내내 이어질 거야. 그중 첫날은 나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해.”
“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얼떨떨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내보였다.
“그대도 함께 가는 거야. 내 파트너로서.”
“네? 그래야 하는 거예요?”
“다른 때라면 모른 척 혼자 가겠지만 이번에는 안 돼.”
“왜요?”
“황제 폐하께 인사는 드려야지. 원래 형식적이긴 하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하는데 그냥 발표부터 하는 거니까.”
“발표부터 해도 괜찮은 거예요?”
“그러니까 소개라도 해야 넘어가 주시겠지.”
“그럼 허락부터……는 안 되겠죠?”
그러는 게 나았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묻는 도중에 답을 찾아 버렸다.
“그래. 어차피 허락을 구했어도 소개해 달라고 하실 테니까 결과는 같았을 거야.”
“그렇군요.”
“그래도 겁먹을 건 없어. 보통은 온화하시니까.”
“보통은?”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그래서 내일부터라도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지. 시간도 얼마 없고, 나중에 몰아서 하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편안히 지내라고…….”
“그래. 그대는 편안히 지내면 돼. 준비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할 테니까.”
예전이라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지금은 불신의 눈빛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레이넌이 태연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저런 말을 할 때마다 내게 벅찬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단적인 예로 휴가 가서 쉬라고 하던 사람이 승마를 그렇게 시키지 않았던가.
지난 일을 떠올리자 그의 말에 생겨난 불신은 점점 커졌다.
“그 눈은 뭐지?”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아련한 눈……입니다.”
말하는 도중 레이넌은 거리를 훌쩍 좁혀 왔다. 다리가 닿을 정도로 다가온 그는 등받이에 팔을 올렸다.
“아련한 눈이라…….”
그는 손을 들어 내 눈가를 쓸었다. 조심스럽게 닿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접촉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겐 이 밤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당돌한 눈으로 보이는데.”
“바, 밤을 함께…….”
“어차피 결혼할 사이니 상관없겠지. 그대가 원한다면…….”
“아, 안녕히 주무세요!”
레이넌이 손을 떼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인사를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뛰쳐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에 레이넌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바로 옆이 내 방이라 다행이었다. 빨개진 얼굴을 금세 숨길 수 있었으니까.
“르네 님?”
“르네 님…….”
방에 들어오자마자 넋이 나간 채로 멍하니 있었다.
잊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내 방은 내가 자유롭게 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갑자기 뛰어 들어온 나를 보고 에린과 세실이 어리둥절하게 나를 불렀다.
“아……. 아직 있었어? 늦었는데.”
“얼굴이 빨간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이제 얼른 돌아가 쉬어. 내일 봐.”
“아니, 잠자리를 봐 드려야…….”
“괜찮아, 괜찮아. 얼른 가서 쉬어.”
당황한 두 사람에겐 미안했지만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쉴 새 없이 말을 뱉어 내며 등을 떠밀자 두 사람은 얼떨떨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서야 겨우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하아…….”
일단 저녁 식사 이후에는 그냥 둘 다 돌아가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끌시끌한 상황이 될 테니 혼자 있는 시간이 더욱더 절실히 필요했다.
물론 언제 또 이렇게 도망쳐 들어올지도 몰랐고.
“하루가 길었다.”
정말 그랬다. 뭔가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여러 일이 일어난 덕에 하루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다행히 이제 그 하루를 마무리해도 되는 시간이었다.
***
약혼 발표를 하면 꽤 소란스러워질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유독 긴 하루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부터 시끄러운 하루가 시작됐다.
어쩌면 전날보다 더 긴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 정도로.
어제의 저녁 식사 시간에 있었던 일이 사용인들 사이에 퍼진 듯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은 내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열렬했다.
보통이라면 소문이 몇 바퀴를 돌아야 내 귀에 들어오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공작님께 프러포즈 받으셨어요?”
언제나 소문에 한발 빨랐던 에린이 곁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서 들었어?”
“글쎄요. 지난 밤사이에 소문이 쫙 퍼졌는걸요.”
내가 잠에서 깬 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다들 알고 있다는 듯한 에린의 태도를 보니 정말 밤사이에 이미 이야기가 돌만큼 돈 모양이었다.
레이넌이 말했듯 어차피 입단속을 한다고 한들 이야기는 흘러나오기 마련이었지만 이건 너무 빠르지 않나.
당황해서 눈만 깜빡이고 있자 에린이 내 손을 덥석 붙들었다.
“어머, 이게 소문의 반지예요? 저도 좀 보여 주세요.”
“일단 아침부터 좀 먹으러 갈게.”
나는 손을 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이미 보고 있으면서 뒤늦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기에 굳이 더 손을 내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 네. 방으로 가지고 올까요?”
“아니야. 내가 가서 먹을게.”
에린은 내가 손을 빼내자 당황한 듯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나는 다이닝 룸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멈추고 에린을 바라봤다.
“르네 님? 왜 그러세요?”
상황이 바뀐 탓일까. 혹은 내가 예민한 걸까.
에린이 예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활발하고 살가운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칼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내내 들었다.
그게 뭐 때문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그냥 기분 탓인가, 하고 넘겼다. 이제 겨우 이틀째이기도 하고.
하지만 조금 전 일로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에린.”
“네, 르네 님.”
“불편하면 그만해도 괜찮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에린이 원하긴 했지만 일을 해 보면 또 다를 수 있잖아. 나는 에린이 이 상황을 굉장히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여서.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지 않아?”
“그만두라니…….”
또였다. 잠깐 사이에 에린의 눈에는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예전에 잠시 함께 일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에린은 아무리 짜증이 나는 상황이어도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아주 잠시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 내겐 조금 낯설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만두라니……. 이제 이틀째인데요.”
에린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내 손을 붙들며 매달렸다.
“아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에린이 편치 않아 보여서 하는 말이야.”
“그렇지만…….”
“먼저 얘기를 꺼냈으니까 그만두고 싶어도 말을 못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 어차피 에린이 불편하면 결국 서로 불편해지잖아.”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들어온 순간 에린은 바닥에 주저앉아 서러운 눈물을 쏟아 냈다.
“제가 잘할게요. 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얼마나 서글프게 우는지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또 나쁜 의도를 품지도 않았는데.
“아침부터 소란스럽군.”
방에 들어선 건 레이넌과 아멜리아였다.
중간에 들어온 그들에게는 난데없는 난리처럼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레이넌도, 아멜리아도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아, 그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을 때 레이넌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시녀를 바꾸는 게 좋겠군.”
레이넌은 차가운 눈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에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던 에린은 레이넌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멜리아.”
“네, 공작님.”
“르네가 최대한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하라고 말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에린을 불러 달라고 한 건 저였는데요.”
괜히 나 때문에 아멜리아가 혼나는 것 같아 얼른 레이넌의 팔을 붙들었다.
“그건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그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게 있다면 뭐든 치워야 해.”
레이넌의 말에 에린의 어깨가 살짝 떨려 왔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내치지만 말아 주세요.”
에린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녀까지 이렇게 나오니 내가 더 난감해졌다.
이 정도로 소란스러워질 일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됐지.
“아멜리아, 얼른 다른 시녀를 찾도록 해.”
“공작님!”
에린은 레이넌의 다리를 붙들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운 모습이었지만 레이넌은 미동도 없이 다리를 털어 그녀를 떼어 내었다.
“무엄하군.”
“저만큼 르네 님을 잘 아는 사람은 이 저택에 없을 겁니다. 르네 님의 까다로운 취향을 모두 맞추는 게 어렵긴 하지만 금방 잘 해낼 수 있어요.”
순식간에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된 나는 눈만 깜빡였다. 한편 레이넌은 에린의 말을 듣고 오히려 차갑게 웃었다.
“무엄한 데다가 건방지기까지 하군. 이 저택에서 르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말을 하다니.”
“아니, 물론 공작님도 르네 님에 대해 잘 아시겠지만 저는 오래도록 친구로 지내 오면서…….”
“쓸데없는 말이 많군.”
아니, 지금 주제에 오른 건 나인데 정작 두 사람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 있는 게 꽤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기…… 공작님? 에린?”
내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