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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58)화 (58/129)

“고, 공작님?”

당황한 내 부름에도 레이넌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긋이 와 닿는 시선에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뭐지, 이거?

차라리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면 조금은 냉정히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이넌의 눈은 나를 보이지 않는 힘으로 묶어 둔 것만 같았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나와 결혼해 주겠나.”

레이넌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손을 들었다. 잠시 뒤 뭔가가 손가락을 감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시선을 내려 내 손을 바라봤다. 곧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뭔가 홀린 듯 나 역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내 약지에는 투명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멍하니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봤다.

촛불에 빛나는 크리스털과는 달리 반지의 보석은 그 자체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르네? 이렇게 애태우는 건 좋지 않아.”

레이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서야 나는 겨우 시선을 돌렸다.

애태운다니?

상상해본 적도 없는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굳었다.

눈앞의 그는 긴장되고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기대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는 내 입을 빤히 바라봤다.

그런 그를 보고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 네, 할게요!”

나도 모르게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힘찬 대답을 내뱉었다. 그런 내 말을 들은 레이넌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퍼졌다.

신기한 날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감정을 이렇게나 많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감정이 서서히 번져 가는 모습까지 보게 되다니.

물론 이 또한 그의 진심은 아닐 터였다.

시종과 시녀가 있는 자리이니 오늘 저녁과 이 프러포즈도 그의 계획 중 일부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세차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알 수 없는 감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레이넌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가 끼워 준 반지에 입을 맞췄다. 아주 우아한 그의 움직임은 꽤 경건한 의식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숨도 멈추고 그를 내려다봤다. 레이넌은 입술을 떼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행이야. 혹시 거절이라도 하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대는 모를 거야.”

“거절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레이넌은 들었는지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내 목소리에 묻은 옅은 실망감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반지를 낀 내 손을 한 번 꼭 잡았다 놓은 뒤에야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레이넌이 자리에 앉은 뒤로 한동안 모든 것이 멈춘 듯 다이닝 룸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이 상황에 놀란 건 나만이 아닌 듯했다.

레이넌이 슬쩍 손짓하자 그제야 다들 정신을 차린 듯 허둥지둥 움직였다.

후식이 나오기 시작되며 식사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다른 때 같았으면 후식을 보고 신나는 목소리로 감탄사를 던졌을 에드윈이 조용했다.

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에드윈이 이상해서 그를 바라봤다. 에드윈은 얼떨떨한 얼굴로 나와 레이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에드윈 님?”

“아……. 그게, 그럼…….”

어리긴 하지만 말은 똑 부러지게 하던 에드윈이 어쩐 일인지 횡설수설했다.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걱정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레이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확실하게 해야겠군.”

나와 에드윈은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레이넌의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에드윈.”

“네, 아버지.”

“조금 전에 봐서 알겠지만, 난 르네와 결혼할 거야. 물론 당장은 아니지만.”

“네!”

“하지만 결혼한다는 건 정해진 사실이니 앞으로 르네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대하도록 해.”

레이넌의 말에 눈이 크게 뜨였다. 물론 에드윈과의 호칭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확실히 정리해 줘서 고맙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라니.

뭔가 중간이 없이 확 건너뛴 느낌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확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옆에서 물을 따르던 시녀가 그대로 행동을 멈춘 걸 보니 영 엉뚱한 생각은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네! 아버지!”

신나서 힘차게 대답한 에드윈의 목소리에 다들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일순 멈추었던 움직임들이 유연하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당혹스러운 기색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에드윈만이 아니야. 모두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예를 갖춰 그녀를 대하도록.”

레이넌의 말이 들리자마자 이제껏 한마디도 없던 로만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잘 모시겠습니다.”

“네. 예를 다해 모시겠습니다.”

로만에 이어 아멜리아 역시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들의 대답이 있고서야 다이닝 룸에 있던 시종과 시녀도 고개를 숙였다.

결국 후식은 조용하고 긴장감이 흐르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먹어야 했다. 무슨 맛인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에드윈 역시 나와 마찬가지인 듯 후식을 열심히 떠먹기보다 작게 한 입을 먹고서는 나를, 또 한 입을 먹고서는 레이넌을 바라보기를 되풀이했다.

길었던 식사를 마무리하고 다이닝 룸을 나섰을 때였다. 뒤에서 에드윈의 작은 부름이 들려왔다.

“어머니?”

등을 돌리자 에드윈은 조금 전 레이넌이 그랬듯 긴장과 초조함을 담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얼른 대답을 해 주고 싶었다. 에드윈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부르는지 알 것 같아서.

하지만 이제껏 입에 붙어 있던 호칭을 바꾸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속으로 몇 번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부디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응, 에드윈.”

미소를 지으며 부름에 대답하자 에드윈의 얼굴에는 조금씩 벅찬 감정이 솟아올랐다.

“안녕히 주무세요!”

“에드윈도 잘자.”

에드윈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에드윈의 얼굴이 좋아서 한참을 말없이 그를 보기만 했다.

에드윈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웃음을 지우지 않고, 아니 오히려 더 큰 웃음을 입가에 걸고 나를 바라봤다.

레이넌은 그런 우리를 재촉하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에드윈과 내 인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유난히 오래 걸린 인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마음속에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두근거림, 아주 짧은 순간 스쳐 간 실망감, 그리고 에드윈을 봤을 때 느꼈던 따뜻함과 애틋함까지.

일일이 이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감정들이 모여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런 생각에 빠져 정작 레이넌과는 인사를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넌은 내 팔을 붙들고는 제 침실 문을 열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하고 가지.”

“네.”

이미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닌가 싶어 의문이 들었지만 곧 그를 따라 들어갔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레이넌의 침실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소박이라는 말이 맞을지는 모르겠다.

넓은 방은 고급스러운 가구와 장식품으로 단정히 꾸며져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물건이 많지 않아 그렇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어쩐지 그와 잘 어울려서 작게 웃었다.

“당황했을 텐데 생각보다 대응을 잘했군.”

“아, 굉장히 당황했죠. 미리 알려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게 더 어색했을 텐데?”

그의 말에 뭔가 반박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대로 닫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당황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을 거란 그의 말에 나도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네요.”

체념이 섞인 내 말을 들은 그는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내게도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내일 약혼 발표를 할 거야. 아무리 입단속을 한다고 해도 오늘 일도 어떤 식으로든 퍼지겠지.”

“그렇겠죠.”

“보여 주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마 당분간은 훨씬 편해질 거야.”

“그래요?”

나도 모르게 반색하며 되묻자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아예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이 아니야.”

“네…….”

여전히 마주칠 때마다 그와 다정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건 변함없을 거란 말이었다.

“아침에 물어보고 싶었다는 건 뭐였지?”

“아,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여쭤보려고 했는데 해결이 됐네요?”

“그렇군.”

“그리고 한 가지 더 있긴 한데…….”

“뭐지?”

“혹시 저와 관련된 소문이 도는 건 아시나요?”

“그대에 관한 소문이 한둘이 아니라……. 정확히 어떤 소문을 말하는 거지?”

“아, 그러니까……. 그, 제가 이, 임신을…….”

“아. 그대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

어렵게 말을 꺼낸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 레이넌은 덤덤하고 명확하게 소문을 정리했다.

“네. 아무리 그래도 임신이 아닌데 그거까지는…….”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면 금방 잠잠해질 이야기야. 덕분에 이 정도만 하고 약혼 발표를 하더라도 말이 나오지 않을 테니 잘된 일이지.”

나는 그가 말한 ‘이 정도’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오늘 저녁 식사 시간에 있었던 그의 프러포즈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렇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정작 그의 입으로 직접 확인을 하니 뭔가 맥이 빠졌다.

작은 실망감이 조금 더 크기를 키우려는 것이 느껴져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에드윈 님이…….”

“에드윈.”

레이넌은 바로 내가 부른 호칭을 정정했다. 둘만 있을 땐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의 엄격한 눈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에드윈이 걱정이에요. 정말 결혼할 거라고 믿을 텐데 나중에 상처받을 게 뻔하잖아요.”

레이넌은 내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 걱정이 담겨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이상한 건 그 걱정이 향하는 대상이었다.

그는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대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하지만 차라리 조금 언질이라도 주는 게……. 아니, 그게 오히려 더 상처가 될까요?”

가족이 되는 거냐고 좋아하던 모습이, 조심스럽게 어머니라고 부르던 에드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어쩌면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에드윈에 대한 미안함일지도 몰랐다.

“에드윈은 똑똑한 아이야. 그대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래도 아이인걸요.”

“잘 설명하면 이해할 거야. 그리고 이해해야겠지. 이 자리에 오르려면.”

냉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에드윈에 대한 레이넌의 신뢰가 느껴지는 말이기도 했다.

맞는 말이지만 울적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런 나를 잠시 지켜보던 레이넌은 내 손을 잡았다.

세게 붙들지는 않았지만 따뜻하게 감싸 주는 손은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에드윈은 그대가 생각한 것보다 강해. 그러니 에드윈을 믿어 주도록 해.”

“네.”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사랑을 주고 아껴 주면 그걸로 에드윈은 충분할 거야.”

그의 말에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니, 그의 말보다 나를 바라보는 레이넌의 얼굴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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