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르네 님을 모실 시녀들입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캐서린이 새로운 시녀들을 데리고 나를 찾았다.
캐서린의 뒤에 서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에린인 건 딱히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이야기가 된 상태였으니까.
다만 에린의 옆에 서 있는 낯익은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실?”
“어머, 다른 시녀도 르네와 아는 사이였어요?”
내 부름에 대답한 건 세실이 아니라 아멜리아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설명했다.
“네. 예전에 에드윈 님의 보모가 되기 전에 간간이 얼굴을 마주치는 정도……였을까요.”
우리는 친하다고도, 그렇다고 서먹하다고도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세실을 앞에 두고 그렇다고 말을 해도 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세실이 유일하게 레이넌에 관련해서 정확한 조언을 해 주었었다.
“지금이라도 최대한 공작님 눈에 안 띄게 조심해. 귀찮은 거 제일 싫어하시는 분이니까.”
게다가 레이넌 앞에 자꾸 나타나던 나를 두고 시녀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을 알려 주기까지 했다.
“이미 알고 계시니 소개는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혹시나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캐서린의 말이 끝나자 에린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공손히 말했다.
“앞으로 불편함 없이 잘 모시겠습니다.”
세실은 특별히 말을 덧붙이진 않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성격에 맞는 인사였다.
“응……. 잘 부탁해.”
익숙한 얼굴들이어서 오히려 불편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 그런 듯했다.
에린과 세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르네 님?”
“네?”
말을 흘리며 인사를 하고는 잠시 멍하니 있는 나를 부르는 캐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고 돌아봤더니 캐서린은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에 드렸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제게 존대하면 안 되는 때가 올 거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 그랬죠.”
“이제는 저에게도 말을 낮추셔야 합니다.”
“네. 아니, 응.”
“또한 에린을 예전에 그랬듯 친구처럼 대하셔서는 안 됩니다.”
“응.”
캐서린은 말을 높이고 나는 말을 낮추고 있었지만 뭔가 그녀에게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전과 다른 위치에 계시니 그만큼…….”
아, 역시 혼나는 게 맞나?
내 생각에 확신을 준 건 캐서린의 말을 끊은 아멜리아의 목소리였다.
“캐서린.”
무거운 힘이 실린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캐서린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네, 아멜리아 님.”
“그건 캐서린이 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공작님께서는 르네가 최대한 편안하게 지내길 바라고 계셔.”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분위기에 나는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멜리아가 한 말은 내가 해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해도 어쨌거나 그 전까진 레이넌의 약혼녀 자리에 있을 테니 그동안은 자리에 맞는 모습을 보이는 게 맞았다.
이제까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 새삼 따갑게 다가왔다. 그간 보지 못했던 내 부족함을 한 번에 확인한 느낌이 들었다.
캐서린이 방을 떠나고도 한동안은 서늘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보통 때였다면 살가운 말로 분위기를 띄웠을 에린도 아무 말 없이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 역시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뒤늦은 걱정에 침묵을 지켰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멜리아는 웃으며 나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르네. 공작님은 르네가 평소처럼 지내도 충분하다고 하셨는걸요.”
“괜찮을까요?”
“그럼요. 공작님께서 좋다고 하시는데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음…….”
“그러니까 르네는 괜히 걱정하지 말고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는 게 공작님을 위한 일이에요. 알았죠?”
“네. 고마워요, 아멜리아.”
“아, 하지만 이제부터 이런저런 수업을 받기는 할 거예요.”
“수업이요?”
“로에리안가의 역사와 가풍, 예의범절, 사교계 매너, 그리고 예술을 포함한 교양…….”
“아멜리아.”
“네?”
“‘즐겁고, 편안하게’라고 하지 않았나요?”
“네. 즐겁고 편안하게 교양을 쌓아 보죠.”
문득 아멜리아와 레이넌은 꽤 잘 맞는 파트너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기사들을 훈련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멜리아를 떠올리고 잠시 몸을 떨던 체이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 가장 급한 것부터 진행할게요. 그리고…….”
“일단 마음의 준비부터 하고 천천히 들을게요.”
“그래요.”
이마를 짚으며 말하자 아멜리아는 웃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1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최대한 미뤄 보면 안 되냐고 매달려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멜리아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 아니니 속으로 삼킬 수밖에.
아침부터 지친 나는 힘없이 소파에 앉았다.
“물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분위기가 풀리자 에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에린과 세실에게 물었다.
“둘 다 정말 괜찮겠어? 불편할 것 같은데.”
“저는 괜찮아요. 불러 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에린은 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에린이야 본인이 바랐던 일이니 그렇다고 쳐도 세실은 어떨까.
“괜찮습니다. 딱히 불편할 일도 아니고요.”
세실을 바라보자 그녀는 특별한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세실은 불편했다면 애초에 거절했을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이 그렇다면 다행이고.”
나만 조금 더 편해지면 될 모양이었다.
겨우 정리가 됐나 싶었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레이넌이 방으로 들어섰다.
“르네.”
“공작님.”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가자 레이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오늘부터 새 시녀가 온다고 해서 와 봤는데, 어떤가.”
“아, 아무래도 알던 사이라…….”
“에린입니다, 공작님.”
갑자기 내 옆에 착 붙은 에린이 머뭇거리던 내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공손하지만 의미심장한 눈길이 레이넌을 향했지만 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레이넌을 확인한 에린은 다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르네 님을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 레이넌의 시선이 에린에게 잠시 향했고,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하지만 레이넌의 시선은 머물지 않았다. 그대로 지나쳐 아멜리아를 바라봤다.
“부족한 것은 필요 없어, 아멜리아.”
“알겠습니다.”
레이넌의 차가운 말에 에린은 당황한 얼굴을 하고 뭔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손에 이끌려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렇군. 편할 수도, 불편할 수도 있겠군. 불편하면 언제든 말하고.”
에린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아주 잠깐 레이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곧 알 수 있었다. 내가 하다가 멈춘 말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네.”
그는 내 대답을 듣고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스킨십이었지만 아는 사람들 앞에서 그러니 조금은 부끄러웠다.
“하여간 이상한 부분에서 수줍음을 탄다니까.”
레이넌은 내가 왜 그러는지 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오늘 함께 저녁이나 할까?”
“저녁 식사를요?”
“그래. 에드윈도 함께.”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요.”
“그래? 궁금하지만 저녁까지 참아 보도록 하지. 그럼 아멜리아, 준비를 부탁해.”
“맡겨만 주세요. 자리와 어울리도록 완벽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자리와 어울리도록 완벽하게 준비하겠다니.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뭔가 의욕이 넘치는 얼굴로 레이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봐야지.”
레이넌은 손을 들어 내 볼을 감싸 그를 보게끔 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여러 행동에 꽤 익숙해졌지만 이것만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애정이 담긴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는 것.
분명 그가 제안한 계약의 일부일 뿐인데 꼭 정말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예쁘게 하고 오길 기대하지.”
레이넌은 곧 떠날 것처럼 말을 하고서도 내 볼을 쓰다듬을 뿐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살짝 그의 눈이 접히는 것이 보였다. 곧 레이넌의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볼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레이넌의 입술은 잠깐 머물렀다가 떠났지만 그의 체온은 꽤 오래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레이넌이 떠나고도 한동안 볼을 감싼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나를 깨운 건 아멜리아의 목소리였다.
“이럴 시간이 없군요. 빨리 움직이죠.”
“아멜리아, 아직 아침도 안 먹었어요. 공작님이 함께하자고 하신 건 저녁 식사였잖아요?”
“무슨 소리예요. 중요한 식사 자리잖아요.”
중요한 식사 자리라니. 레이넌과의 저녁 식사가.
아침부터 이렇게 준비를 시작해야하는 건가 당황한 나에게 아멜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 목욕 시중은 제가 들게요.”
“혼자 할 수 있는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평소와는 다르다고요. 일단 입욕제는 어떤 향으로 할지 골라볼까요?”
아멜리아는 의욕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반대로 내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그렇게 큰일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
나는 그대로 저녁 식사 준비만을 위해 바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끼니를 거르게 하지 않았다는 점일까.
어떤 드레스를 입으면 좋을지에 관해 세 사람은 한참을 토론했다. 그러고서는 드레스와 맞는 헤어, 액세서리는 어떤 것일지에 관한 토론이 끝없이 이어졌다.
“역시. 열심히 고민한 보람이 있네요.”
거울 속의 나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곱게 땋은 머리카락에 꽂힌 작은 장식들이 반짝 빛났다. 과하지 않은 화장은 얼굴의 장점을 돋보이게 해 줬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화려한 드레스가 밸런스를 잘 맞춰 주었다.
얼떨떨하게 거울을 보고 있으니 나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표정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아멜리아는 그저 흐뭇하게 웃고 있었고, 세실의 얼굴에선 뿌듯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에린은 어쩐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마자 에린은 눈을 잔뜩 접으며 미소를 보였다.
“정말 너무 잘 어울리세요.”
“정말요.”
에린의 말에 아멜리아는 박수까지 치며 공감했다.
“에린도, 세실도 손이 빠른 데다 감각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앞으로 단장해야 할 자리가 종종 있을 텐데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그런 자리에 많이 가 보시지 않으셨을 텐데요. 최대한 잘 꾸며 드려야겠네요.”
“그러게.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익숙해져야겠네.”
에린의 말에 별 뜻 없이 대꾸했을 뿐인데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뭔가 화가 난 듯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들었다.
왜지. 익숙해져야겠다는 말이 그녀에겐 화가 날 만한 말인가.
“하긴, 곧 공작 부인이 되실 테니까요. 익숙해지셔야죠.”
에린은 내 말에 긍정하는 듯했지만 이를 꽉 물고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에린?”
알 수 없는 그녀의 감정에 나 역시 표정을 지우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잠시 눈을 마주친 채 있던 그녀가 먼저 시선을 피하더니 목걸이를 가지고 왔다.
“이건 내가 할게.”
에린이 움직이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아멜리아는 목걸이를 받아 들며 말했다.
“다행히 시간은 맞을 것 같네요. 이제 가실까요?”
아멜리아는 목걸이를 걸어 주고는 나를 일으켰다.
“두 사람은 따라오지 않아도 돼. 내가 함께 가니까.”
방을 함께 나서려던 에린과 세실은 아멜리아의 말에 그대로 멈췄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겨우 둘만 남고서야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준비해야 하는 거예요? 저녁 식사인데요?”
“그럼요.”
“아멜리아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죠. 그나저나 에린은 이 상황이 많이 불편한가 봐요.”
“어차피 그녀는 어떤 상황이든 불편할 거예요. 르네가 공작님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니.”
“그런가요?”
아멜리아의 말에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에린이 굳이 그럴 이유는 없지 않나 싶었다.
물론 잘못 알고 있기는 했지만 레이넌과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정보도 줬었고…….
“도착했어요. 들어가실까요?”
“아, 네.”
상념에 잠겨 있던 나를 깨운 아멜리아가 문을 열었다. 나는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다이닝 룸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주 작은 파티장으로 꾸며 놓은 듯했다. 반짝이는 크리스털 장식이 곳곳을 밝히는 촛불과 만나니 오묘한 색깔을 드러냈다.
나를 보고 앉아 있던 레이넌과 에드윈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의 모습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복을 차려입은 두 사람은 새삼 멀끔하고도 귀티가 흘러넘쳤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천천히 걸어가 레이넌이 빼 준 의자에 앉자 두 사람도 그때야 제 자리에 앉았다.
아멜리아가 아침부터 잘 꾸며야 한다고 했던 게 이 때문이었던 듯했다.
로만과 아멜리아는 뒤에 서 있었고, 식사 시중을 드는 시종과 하녀는 평소에 비해 적은 수였다.
너무 진지한 분위기라 얼떨떨했던 건 잠시였다. 다행히 식사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진행이 되었다.
간간이 대화나 농담이 오갔고, 웃음소리도 중간중간 흘러나왔다.
그렇게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기다릴 때였다.
레이넌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와 몸을 낮춰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