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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55)화 (55/129)

하루 동안 움직였다곤 하나 피로가 쌓이긴 한 모양이었다. 며칠은 몸이 나른해 뭔가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배려한 건지 한동안 레이넌은 내 방에 잠시 들러 이야기를 나누다 갈 뿐 승마도, 그 외 다른 일정도 잡지 않았다.

여독을 풀고 나서야 레이넌은 다시금 티타임을 가지자고 말했고, 그 자리에서 앞으로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곧 정식으로 약혼 발표를 할 예정이야.”

“약혼 발표요?”

내 물음에 옆에 있던 로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이 시기가 좋아. 공작님과 르네의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아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까지 됐으니까. 휴가 덕분에.”

휴가를 언급했을 때 로만의 눈이 잠시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곧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깊은 사이가 되어 돌아왔다고들 하니 오히려 약혼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말이 돌겠지요.”

“이상한 말이라니요?”

“로만의 쓸데없는 이야기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어.”

“쓸데없는 이야기라니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쨌건 크게 보여 줄 만한 약혼식이나 다른 행사는 없어도 되겠지.”

“네. 공작님께서 어지간히 급하다고 다들 수군대겠지요.”

“그렇게 보이면 좋겠군. 그래서 따로 뭔가 하지 않고 그냥 정식적으로 발표만 할 거야, 곧.”

레이넌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하지 않고 발표만 하면 나야 오히려 편해서 좋았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럼 발표를 하기 전에 에드윈 님께 먼저 설명을 따로 드리고 싶은데요.”

“그래. 에드윈과 이야기가 끝나고 알려 주면 그 이후에 공표하도록 하지.”

“네. 감사합니다.”

“그보다 전에 말한 시녀에 관해서는 생각해 봤나?”

“아…….”

휴가를 다녀와서 시녀를 정하겠다고 했었던가. 누구로 할지 생각해 두라고 말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지목할 입장이던가. 아는 사람이어도, 모르는 사람이어도 불편할 텐데.

“그럼 로만이 적당한 사람을 고르는 걸로…….”

“아!”

“누구 생각해 둔 사람이 있나.”

그때 갑자기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붙들고 울던 에린.

내 시녀로 불러 달라던 말이 황당하게 느껴졌는데 정작 짧은 시일 안에 현실이 되었다.

너무도 간절하게 부탁했던 에린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녀를 부르고 싶긴 했다. 하지만 동시에 반대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까지 친구였는데 한순간에 관계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괜히 불편한 사이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보다 에린이 더 불편할 것이 뻔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부탁했던 건 그만큼 힘든 건지, 혹은 불편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건지 나로서는 판단이 되지 않았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초췌한 에린의 얼굴을 떠올리자 마음이 약해졌다.

“에린이라는 시녀가 있는데, 그 친구로 했으면 좋겠어요.”

내 말에 레이넌과 로만이 서로를 마주 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끈질긴 시선이 오가는 모습이 꽤 의미심장해 보였다.

혹시 예의상 물어본 건데 눈치 없이 대답한 건가?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닿았다.

지금이라도 취소를 하고 에린한테 역시 내가 그럴 만한 입장이 아니라고 사과를 하는 게 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입을 열려고 할 때, 로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원래 친구 사이인 걸로 아는데, 서로 불편해지지 않을까?”

다행히 눈치 없이 이야기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음……. 저도 그 부분이 조금 걱정스럽긴 한데…….”

그래도 서럽게 울던 에린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 부탁을 무시하는 게 더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아니, 그 친구로 하지.”

로만과 달리 레이넌은 선뜻 허락했다. 어쨌거나 다행이었지만 로만은 여전히 걱정이 큰 듯했다.

“하지만 공작님.”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르네도 조금 더 편할지도 모르지. 혹시 문제가 생기면 그때 바꾸면 되지 않나.”

단호한 레이넌의 말에 로만은 입을 다물었다. 다만 여전히 뭔가 불만스러운 듯 찝찝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르네.”

“네.”

로만의 불만은 전혀 보이지 않는 듯 레이넌의 관심은 내게 향했다.

“아멜리아가 르네와 함께 보낸 휴가가 너무 즐거웠다고 하더군.”

“저도 그랬어요.”

휴가를 떠올리자 불과 얼마 전이지만 몽글몽글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었다. 그녀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 덕분에 더 많이 웃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자 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나를 보던 레이넌은 비슷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그래서 아멜리아가 한동안 그렇게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다고 하던데 그대는 어떤가?”

“아……. 저는 좋긴 한데, 아멜리아가 바쁘지 않나요?”

“본업도 그만뒀는데 뭐가 바쁠까. 오히려 아멜리아가 그대의 곁에 있으면 안전도 확실하게 지킬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하긴, 레이넌이 저렇게 아멜리아의 실력을 칭찬할 정도이니.

그녀가 함께 있으면 갑자기 누군가가 공격한다고 해도 안심할 수 있을 듯했다.

무엇보다 아멜리아와 함께하는 시간은 늘 편안했으니 더욱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멜리아가 괜찮다면 저야 당연히 좋죠.”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네.”

“에드윈에게 갈 거라면 로만이 데려다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도록 해.”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로만은 오는 길에 아멜리아를 데리고 오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레이넌의 집무실을 나서 에드윈의 침실로 향하는 길에 로만은 은근히 내게 물었다.

“정말 그 에린이라는 친구로 괜찮겠어?”

“음……. 공작님 말씀대로 뭔가 문제가 있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 봐도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렇다면…….”

로만이 이렇게나 세심하게 나를 걱정했던가.

사실 아멜리아면 몰라도 로만이 친구였던 에린이 시녀가 되면 불편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며 나를 걱정해 줄지는 몰랐다.

“로만 님.”

“응?”

“고맙습니다.”

내 인사에 로만은 뒤로 살짝 물러나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뭐가?”

“아니, 그런 부분까지 걱정해 주셔서요. 저는 로만 님이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아, 아녜요. 감사해요, 신경 써 주셔서.”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쓰는 무심하고도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말까지 무심코 흘러나올 뻔했다.

“……그래.”

로만은 내가 뭘 말하려는지 짐작한 듯한 얼굴을 하고서도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떨하다기보다는 뭔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착했네. 올 때는 체이스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거나 아멜리아를 기다렸다가 움직여. 혼자 움직이지 말고.”

“네.”

로만은 당부를 잊지 않고 남긴 후 온 길을 되돌아갔다.

“에드윈 님.”

“르네!”

“오늘 일정은 다 끝내셨어요?”

“응. 요즘 수업이 조금 줄어서 심심해.”

수업이 줄면 좋은 게 아닌가. 하지만 에드윈은 정말 서운한 듯 이야기했다.

“휴가를 다녀온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다시 곧 늘어나지 않을까요?”

“그럴까? 그러면 좋겠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체이스가 에드윈과 나를 소파로 안내했다.

나는 에드윈의 옆에 앉아서 그의 손을 잡았다.

에드윈은 그런 나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봤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은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에드윈 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사실…….”

말을 꺼내긴 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여전히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윈이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바뀌는 관계에 혼란스럽지는 않을까, 혹시 제 입장에 변화가 생길까 봐 불안하지는 않을까.

여러 걱정에 오래도록 고민을 해 왔다.

그간 꾸준히 에드윈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생각했지만 좋은 답은 찾지 못했다.

“르네?”

“아, 그게 사실……. 공작님과 제가 지금보다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될 것 같아요.”

말문을 열었지만 그리 영양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아주 많이 에둘러 말해 버린 것 같았다.

조금 더 확실히 이야기하려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을 때, 에드윈이 태연하게 되물었다.

“응? 혹시 결혼 말하는 거야?”

오래 걱정한 것에 비해 에드윈의 반응은 꽤 산뜻했다.

“결혼이요?”

“다들 르네와 아버지가 곧 결혼할 거라던데.”

“아직 결혼까지는 아니고, 결혼하자는 약속 정도를 하려고 해요.”

“그게 약혼이지?”

“네…….”

얼떨떨한 얼굴로 나는 에드윈의 말에 대답하기에도 바빴다.

“그럼 결혼을 하는 거잖아!”

“……그렇게 되겠죠?”

“그럼 르네가 내 어머니가 되는 거야?”

“저기, 에드윈 님.”

“응?”

“일단 지금까지 확실하게 정해진 건 공작님과 제가 약혼을 한다는 것까지인데요. 아마 곧 발표할 것 같아요.”

“응, 응.”

결혼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약혼이라는 건 당연히 결혼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에드윈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에드윈에게 결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 없었기에 확실히 정해진 부분만 짚어 줬다.

에드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설렘으로 가득 찼다.

내 난감함을 전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약혼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듯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긴 한데…….

이렇게 큰 오해를 하게 두어도 괜찮을까.

혹시 나중에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겨났다.

모든 사정을 아는 체이스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어차피 다 아는 사이에 내 난감함을 조금 덜어 주면 좋을 텐데.

체이스는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킨 그때, 에드윈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르네와 내가 가족이 되는 거야? 헤어질 일도 없는 거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너무 좋아!”

에드윈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내 품에 덥석 안겨 들었다.

“르네랑 가족이 되면 너무 행복할 거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뻐하는 에드윈의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꽤 복잡 미묘했다.

이렇게 좋아하니 나 역시 기뻤지만 미안한 마음이 그만큼 커졌다.

그래서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에드윈을 함께 꼭 껴안아 주었다.

한참 그렇게 안겨 있던 에드윈이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물었다.

“그런데 르네…….”

“네?”

“르네 배에 아기가 있어?”

“네?”

아기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에드윈을 내려다보며 나는 황당함에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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