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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54)화 (54/129)

“아멜리아.”

한참 그림 그리는 데 집중하던 에드윈이 조용히 아멜리아를 불렀다.

드물게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에드윈을 바라봤다.

에드윈은 목소리만큼이나 진지한 얼굴로 아멜리아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르네는 괜찮은 거야?”

“하루 정도 푹 쉬면 낫는다고 했어요. 물론 공작님이 간호하신다니 저도 걱정이지만…….”

“그게 아니라.”

“네?”

“르네는 곧 아버지와 약혼하는 거지?”

르네의 상태를 걱정하는 줄 알았더니 에드윈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약혼이 뭔지 아세요?”

“결혼하자고 약속하는 게 약혼 아니야?”

“네, 맞아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죄송해요. 에드윈 님을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알아. 확인한 거라는 걸.”

“그럼 르네가 약혼할 거란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걸.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이야기가 많아.”

“그렇군요.”

하긴, 다들 에드윈 앞에서 말을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에드윈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로에리안저는 약혼 이야기로 꽤 시끌시끌했다.

“그런데 뭐가 걱정이세요?”

“아버지의 소중한 사람이 되면 르네가 위험해지는 게 아닐까 해서.”

에드윈의 말에 아멜리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가 똑똑하고 생각이 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짐작할 정도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결국 에드윈 자신 역시 위험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어떻게든 슈나이더가의 눈을 피하려고 오래도록 애써 왔다. 특히나 에드윈이 알기를 바라지 않아 여러모로 노력했다.

그래도 에드윈에게 잘 숨겨 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들이 부족했던 것인지, 혹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많이 위험한 거야?”

아멜리아가 선뜻 대답하지 못한 게 에드윈에게는 달리 느껴진 모양이었다.

걱정이 가득 내려앉은 얼굴로 그는 아멜리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아니에요.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르네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무엇보다 공작님께서 신경을 많이 쓰고 계세요. 저나 체이스를 곁에 두게끔 하신 걸 보면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정말 걱정하실 것 하나도 없어요. 아직은 그렇게 위험한 움직임도 없었고.”

“응.”

“에드윈 님.”

“응?”

“제가 잘 지켜 낼게요.”

아멜리아 역시 평소와 다르게 웃음기를 지우고 에드윈에게 말했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에드윈은 그제야 안심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부탁해. 르네를 꼭 지켜 줘.”

“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짐작하는 것보다 에드윈은 훨씬 더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 뒤에 잘도 숨겨 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레이넌의 얼굴이 떠올랐다.

레이넌이 걱정하지 않아도 에드윈은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에드윈은 레이넌을 능가하는 힘을 휘두르는 공작이 될 수도 있다.

레이넌은 알고 있을까.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던 과거라면 몰라도 조금 가까워진 지금이라면 그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여간 두 분 다 다른 얼굴을 하고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멜리아의 혼잣말이 뭘 뜻하는지 알아챘는지 에드윈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에게 당부했다.

“아버지와 르네에게는 비밀이야.”

그녀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비밀을 지키겠노라 에드윈과 약속했다.

***

마지막 날에 작은 소동이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휴가는 마지막까지 평화로웠다.

레이넌이 간호를 하겠다고 나선 게 작은 소동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그가 간호를 한 건 꽤 사소한 일에 속했다.

“아직 몸이 안 좋나?”

어쩐 일인지 돌아가는 길에는 레이넌도 마차에 올랐다.

내 옆자리에 앉아 줄곧 상태를 살피더니 점점 안색이 나빠지는 나를 발견하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에겐 내 대답이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장 마차를 멈추고 칼슨을 불러오지.”

레이넌이 체이스에게 신호를 보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길래 얼른 그의 팔을 붙들었다.

물론 갑자기 움직여서 내 속은 더 안 좋아졌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여기서 멈추면 하루 만에 절대 돌아가지 못할 것이 뻔했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공작님.”

“어째서 늘 괜찮다고만 말하는 거지? 지금 그대 얼굴이 어떤지 알고는 있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죠.”

대답은 아멜리아에게서 돌아왔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인지라 아멜리아나 에드윈은 조금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차부터 세우지.”

“그냥 최대한 일찍 도착하는 게 르네를 위한 일일지도 몰라요, 공작님.”

아멜리아는 담담하게 대답했고, 에드윈도 그녀를 거들었다.

“올 때도 저랬어요.”

“몰랐군. 그럼 그땐 어떻게 했지?”

“그냥 재웠어요. 잘 자더라고요.”

아멜리아의 말에 나는 새삼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자고 일어나니 도착해 있어서 참 다행이었죠.”

그 말을 들은 레이넌은 자리를 만들어 주며 말했다.

“자, 그럼 자도록 해.”

레이넌이 눕혀 주는 대로 몸을 맡겼지만 도저히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굴 위에서 감시하듯 빤히 바라보는데 어떻게 자요.

입을 달싹였지만,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은 결국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공작님, 그렇게 보시면 누구든 못 잘 것 같은데요.”

정말 다행이었다. 아멜리아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내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대신 해 주었다.

“그래? 어째서지?”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데 어떻게 잘 수 있겠어요. 그냥 다른 곳을 보시든가 잠시 관심을 거두어 주시는 게 르네한테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레이넌은 아멜리아의 조언을 선뜻 받아들였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공작님.”

어떻게든 자 보려고 노력하던 나는 결국 레이넌을 부르고야 말았다. 내 부름이 들리자마자 그는 상체를 숙이며 내게 물었다.

“그래. 뭔가 필요한 게 있나?”

“그렇게 곁눈질로 계속 보시는 것도 굉장히…….”

“굉장히?”

불편하다고 해도 되나.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는 말이 나으려나.

적절한 단어를 찾기가 어려웠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으니 이번에도 아멜리아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 주었다.

“불편하겠지요.”

“내가 곁눈질로 봤다고?”

레이넌은 전혀 알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그냥 앉아 있을게요. 잠이 안 와서.”

“누워 있는 게 낫지 않겠나.”

레이넌은 나를 부축해 주며 물었다. 하지만 자지도 못하는데 몸 전체로 진동을 느끼니 더 힘들었다.

“아니요. 누워 있는 게 더 힘든 것 같아서요.”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앉아 있을 힘도 없어 마차에 기댔지만 덜컹거림이 바로 전달되었다.

그때 레이넌의 손이 다가와 내 머리를 감쌌다. 그러더니 레이넌의 쪽으로 기울였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하고서 레이넌의 손이 떨어졌다.

“차라리 내게 기대는 게 나을 거야. 아마 마차가 흔들리는 걸 조금 덜 느낄 테지.”

“……감사합니다.”

확실히 기댈 곳은 필요했고, 그의 말대로 레이넌의 어깨는 다른 어떤 곳보다 흔들림이 덜했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그의 팔과 내 팔이 스쳤다. 서로를 꼭 붙들고 있는 것 같기도, 아쉽게 지나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팔이 맞닿고는 떨어지지 않았다.

레이넌이 팔에 슬쩍 힘을 줘서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건 최대한 움직임을 줄여 주기 위함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내 속을 조금 더 어지럽혔다. 조금의 틈 없이 붙은 팔이 꼭 손을 잡은 것처럼, 꼭 끌어안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팔 하나로 이렇게 체온을 나눌 수 있다는 건 짐작해 본 적도 없었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슬쩍 몸을 떼어 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레이넌을 자극한 듯했다.

그는 아예 팔을 둘러 제 품에 나를 가뒀다.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으니 조금 전보다 흔들림은 적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마음은 더 울렁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멀미는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몇 번의 고비를 더 맞이했다.

하지만 단단하고도 넓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으니 조금씩 잠이 오기 시작했다. 졸다 깨다 하다 보니 어느새 로에리안저에 도착했다.

갈 때만큼 푹 자지 못한 데다가 오래 멀미에 시달린 탓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속은 좋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려 땅을 밟으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아무래도 괜찮아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일단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빨리 걸을 힘도 없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레이넌이 다가와 내 허리를 감았다.

“기대. 천천히 갈 테니. 혼자 걷는 것보다 낫겠지.”

“아, 감사합니다.”

“아니면 안아서 데려다주는 게 낫겠나. 그게 빠르긴 할 텐데.”

“아……. 감사한 말씀이지만 그것도 흔들리니까…….”

“아, 오히려 안 좋을 수도 있겠군.”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가 더 걱정이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럼 천천히 걷도록 하지.”

레이넌은 평소보다 좁은 보폭으로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며 걷느라 시간은 걸렸지만 생각보다 편하게 방까지 도착했다.

“일단 칼슨, 아니 칼슨은 쉬는 게 낫겠지. 나이도 있으니까. 오스틴부터 불러 르네를 보게 하지.”

레이넌은 그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로만을 보자마자 그렇게 지시했다.

다른 때였다면 뭔가 불만스러운 말을 건넸을 로만이었다. 하지만 그도 내 몰골이 꽤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어떤 반박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그냥 저 좀 혼자 쉬게 해 주세요.”

“그래도 약이라도 좀 먹는 게 낫지 않겠나.”

“도착한 걸로도 충분해요. 그냥 혼자서 쉬고 싶어요. 말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가라앉지 않아서요.”

“그런가.”

“네. 그냥 쉬면 나을 거예요. 그냥 이대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혹시 내일 아침에도 안 좋으면 그땐 진료를 받을게요.”

그 말에 레이넌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오늘은 쉬고 내일 상태를 봐서 다시 결정하지.”

“네. 감사합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진료를 받겠다는 말을 해서인지 레이넌은 다행히도 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은 지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대답하고서는 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야 겨우 혼자 남게 된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정말 다행히도 마차에서는 오지 않았던 잠이 침대에 눕자마자 쏟아지기 시작했다.

***

다음 날이 되자 멀미는 모두 사라졌고 몸 상태는 좋아졌지만, 칼슨의 진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특별히 이상은 없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니 최대한 음식에 신경 쓰라는 말을 했다.

덕분에 한동안 내게는 건강식으로만 식사가 제공되었고, 시간이 맞는 한은 레이넌과 함께 먹어야 했다.

얼마나 먹는지, 잘 먹는지, 제때 먹는지 확인을 해야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것, 아침 식사만이라도 에드윈과 함께 먹고 싶다고 말했더니 레이넌은 선뜻 허락했다.

그것만으로 큰 수확이라고 안심한 것은 잠시였다.

휴가를 다녀오고 조금 더 달라진 레이넌의 태도 때문에 저택의 사용인들은 이상한 오해를 하고 말았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오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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