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발랄한 에드윈의 부름이 들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슬쩍 눈을 떠 보니 레이넌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잠깐 옅은 짜증이 묻어나더니 레이넌은 그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다시 눈을 감았을 때 레이넌의 이마가 내 이마에 닿았다.
“역시. 열은 내렸군.”
레이넌은 태연하게 말하고 뒤로 물러났다.
“저희는 조금 뒤에 다시…….”
아멜리아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뭔가 삐걱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난감한 얼굴을 한 아멜리아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이는 에드윈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들어와.”
레이넌의 말이 떨어지자 에드윈은 내게 다가왔다.
“르네, 이제 많이 나았나 봐! 아버지가 방금 열이 내렸다고 하셨잖아.”
“아……. 네. 푹 쉬고 나니까 이제 괜찮아요.”
“다행이다.”
“예절 교육을 받는데도…….”
레이넌의 나직한 목소리가 에드윈을 향했다. 제게 향한 것을 알아차린 에드윈은 움찔하더니 내 손을 붙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검술 수업만 받던 에드윈이 예절 수업까지 받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던가.
레이넌이 시선을 거두지 않자 에드윈은 슬금슬금 내 옆에 붙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꼭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오늘 뭐 하셨어요?”
내 물음에 레이넌의 시선이 겨우 에드윈에게서 거둬졌다. 그걸 확인한 에드윈은 한결 밝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호수에서 배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었어!”
즐거운 하루를 보냈는지 금세 들뜬 얼굴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오늘 한 일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온종일 호수에서 보낸 모양이었다. 아멜리아, 체이스와 함께 보낸 하루가 꽤 즐거웠던 듯 그는 쉴 새 없이 오늘 있었던 일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림도 그렸어!”
“호수에서요? 와, 그건 정말 재밌었겠는데요. 그림도 엄청 멋있을 거 같아요.”
“응, 응. 그리고 아멜리아는 그림도 엄청나게 잘 그리더라고.”
“그래요?”
“화가 같았어!”
아멜리아는 도대체 못 하는 게 있기는 할까, 하는 의문을 담아 그녀를 바라봤다.
아멜리아는 레이넌과 심각한 얼굴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멜리아한테 그림도 배웠어. 앞으로도 시간이 날 때 가르쳐 주겠대.”
“그러셨어요?”
레이넌과 아멜리아의 심각한 분위기에 덩달아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워지려고 했다.
하지만 곧 들려온 에드윈의 목소리에 의문과 걱정은 금세 흩어져 버렸다.
“다음엔 낚시도 해 보자. 물고기가 많아서 할 수 있을 거래!”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하는 에드윈을 보고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에드윈 님, 오늘 그리신 그림 보고 싶어요.”
“아……, 그거 방에 두고 왔는데…….”
“그럼 같이 갈까요?”
레이넌과 아멜리아는 그런 우리를 딱히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가려는 움직임을 느끼고는 잠시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말리려고 하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차라리 에드윈과 내가 자리를 비워 주는 편이 저들이 대화하는 것이 편할지도 몰랐다.
방을 나서자마자 앞을 지키고 있던 누군가가 에드윈과 내 뒤를 뒤따랐다.
이곳에서 자주 본 기사라 익숙한 얼굴이긴 했지만 조금은 낯선 상황이기도 했다.
하긴, 여기서 움직일 때는 대부분 레이넌이나 아멜리아와 함께 움직였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체이스는 안 보이네요?”
“응. 그게……. 갑자기 일이 있다고 중간에 갔어.”
“그래요?”
갑자기 일이 있다니. 에드윈의 눈에도 그렇게 일반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듯했다.
“그림을 그리기 싫어서 도망간 걸까.”
에드윈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그림 말고 다른 이유로 함께 지낸다고 할 걸 그랬어.”
“아니에요. 체이스가 부끄러워하긴 했지만 그림 그리기 자체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어요.”
“그래?”
“네. 늘 열심히 그렸잖아요.”
“하긴, 엄청 진지하게 그렸지.”
“그러니까요. 체이스의 말대로 급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겠지?”
에드윈은 금세 기분이 풀어져서 방긋 웃었다.
“아멜리아랑 있는 것도 재밌긴 했는데, 그래도 다 같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 같아.”
“아쉽네요.”
“괜찮아. 다음에 또 올 거라고 아버지가 그러셨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응. 오늘 르네가 아파서 슬퍼하니까 다음에 또, 올 거라고, 재밌게 놀고 오라고 하셨어.”
“그러셨구나.”
정말 두 사람 사이가 꽤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모르는 사이에 저런 대화까지 나눌 정도로.
무엇보다 레이넌이 에드윈을 달래 준 것 같이 느껴졌다.
조금씩 보통의 부자와 닮아 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런 덕분에 에드윈도 훨씬 자신감이 생겼고, 조금 더 밝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다음엔 꼭 르네랑도 같이 그림도 그리고, 물고기도 잡고 싶어.”
“네. 다음에 꼭 그렇게 해요. 그리고 더 재밌는 게 없을지 같이 또 생각해 봐요.”
“응!”
***
르네와 에드윈이 방을 나서자 레이넌과 아멜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사이좋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멜리아는 레이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금세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래서 지금 마빈이 앓고 있다고?”
“네. 체이스가 칼슨과 함께 가서 확인했습니다.”
“결국 독이었다는 거지.”
“네.”
“죽일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군. 하긴,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하는 게 슈나이더의 방식이니까.”
“그래도 언제 갑자기 공격이 달라질지 모릅니다.”
“그래. 그런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휴가까지 왔으니 돌아가서 바로 약혼 발표를 하는 게 좋겠군. 그보다 마빈이 저러고 있다는 건…….”
“확실하진 않지만 어떤 이유로 잔이 바뀐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이상하지 않나. 르네가 잘 먹는지 지켜봤을 텐데.”
“아무래도 여기서 독극물 사건이 일어나면 범인이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걸 고려하고 벌인 일이니 더 신중했겠지요.”
“결국 이렇게 밝혀졌지. 일단 르네가 괜찮은 건 다행이고.”
체이스와 함께 지내며 마빈의 묘하게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여러 번 포착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휴가도 데리고 왔고, 꾸준히 지켜보던 상태였다.
아주 잠깐 사이에 르네에게 접근한 것이 그들의 실수였지만 다행히 르네는 무사했다.
아니, 오히려 르네는 제게 위협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르네도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걸 보면…….”
“또 엉뚱한 생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해 버린 모양이지.”
“네. 아마…….”
“가끔 그런 면이 이상할 정도로 운이 좋게 작용한단 말이지.”
“다행이죠.”
“그래.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사람을 조심시키는 편이 좋겠지. 그건 내가 잘 일러두지.”
“알겠습니다.”
가끔 굉장히 작은 일로 호들갑을 떨거나 뜬금없는 생각으로 웃음을 불러일으켰던 르네의 모습을 떠올린 아멜리아의 얼굴엔 웃음기가 번졌다.
그건 레이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단단히 굳었던 얼굴이 조금은 편하게 풀어졌다.
물론 곧 진지한 얼굴을 되찾았지만.
“그래서 상태는?”
“고열과 통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합니다.”
“그렇군.”
“그런데 자꾸 마빈이 근처 마을로 가서 치료를 받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답니다.”
아멜리아의 말에 레이넌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독약을 먹었다고 말도 못 하고 답답하겠지.”
신랄하게 마빈을 비웃는 목소리를 들은 아멜리아 역시 그와 비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겠죠. 어떻게 할까요?”
“내 사용인인데 근처 마을에 버리고 갈 수 있나. 칼슨도 있으니 그럴 필요 없다고 해.”
“알겠습니다.”
마빈을 챙기는 듯한 말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따로 떨어트려 놓으면 슈나이더든 혹은 다른 누군가든 그를 움직이는 자와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마빈은 당분간 낫기 힘들겠군. 죽지는 않겠지만.”
“그렇겠네요.”
죽지 않을 선에서 낫는 것을 최대한 지연하라는 말이었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넌의 의견에 동의했다.
“돌아가서도 철저히 지켜보도록. 언젠가는 누군가와 접촉하겠지.”
“네.”
마빈도 일이 잘못되었으니 한동안 몸을 사리겠지만, 어쨌건 언젠가는 다시 움직일 터였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이제 그의 수상함을 의심하고 있는 이상 모든 시선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르네 주변도 잘 뒤져 봐. 마빈이 저렇게 됐으니 다른 누군가가 또 움직이겠지.”
“네.”
아멜리아는 성실한 얼굴로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감췄다.
레이넌은 평생을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살아왔다. 물론 어렸을 때야 형에게 시선을 돌린 탓에 조금은 자유로웠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역시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러니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스스로 죽음에 발을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그의 자리가 아멜리아는 종종 안타까웠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고, 그런 탓에 그의 삶은 언제나 건조하고도 차가웠다.
그나마 에드윈에게는 저와 같이 치열하고 잔인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어쩌면 에드윈 님이 공작님보다 더 적성에 맞을지도.’
단단하고 차가운 방패를 둘러싼 레이넌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와는 다른 스타일이었다.
밝은 웃음 뒤에 제 영민함과 가시를 숨길 줄 알았다.
아직은 어린아이라고 르네는 마냥 귀여워하고 있었지만 에드윈 역시 로에리안가의 일원이었다.
게다가 전 공작의 장자였다. 사고가 없었다면 레이넌이 아니라 에드윈에게 바로 공작 위가 이어졌을 터였다.
아마 에드윈은 무사히 레이넌의 뒤를 이을 터였다. 에드윈은 레이넌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겠지만 그래도 레이넌 못지않은 강력한 공작이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레이넌보다 에드윈이 더 능숙하게 해낼지도 몰랐다.
아멜리아는 호수에서 에드윈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