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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52)화 (52/129)

그의 질문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덤덤한 얼굴을 하는 건 오직 레이넌뿐이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한 건 나만이 아닌 듯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낸 이는 다름 아닌 아멜리아였다.

그녀의 곁에 있던 칼슨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넌에게 집중했다.

“간호는 어떻게 하는 건지 물었는데?”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니. 이번에도 역시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놀람, 경악, 의문 등 여러 가지 감정이 그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간의 경험을 살린 듯,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태연한 얼굴을 찾았다.

“직접 하시게요?”

“그래.”

아멜리아의 질문에 레이넌은 뭐가 문제냐는 듯 당당하게 대답했다.

“말했다시피 에드윈은 아멜리아와 체이스에게 맡기지.”

“네. 아쉬워하실 틈이 없이 잘 모시겠습니다.”

산뜻한 아멜리아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으려 손을 들었다.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나?”

내 행동에 반응한 건 레이넌이었다. 쳐다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는지 손을 들자마자 등을 돌려 나를 살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간호까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네. 오늘 하루 푹 쉬기만 해도 나아질 겁니다.”

다행히 칼슨은 나와 의견이 같았다. 그의 말에 힘을 얻은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하루나 쉴 정도도 아닌 것 같고요.”

“그렇군. 하지만 내일 새벽에 떠나려면 오늘 푹 쉬는 게 아무래도 낫겠지.”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듯한 레이넌의 말에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였다.

“그러니 누군가가 간호를 해 주면 확실히 낫겠지.”

“정말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죠, 칼슨 님?”

“정 그러시다면…… 열이 높아지는지 살펴봐 주시고, 미열이 있으니…….”

“칼슨 님?”

칼슨은 애절한 내 부름을 듣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간간이 내게 닿으려는 시선을 애써 레이넌에게 돌리는 듯 보였다.

아무래도 내 편은 이 방에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땀이 나면 몸을 닦아 주시고…….”

“몸을 닦아 주라……. 그리고?”

잠시 나를 돌아본 레이넌은 다시 칼슨을 재촉했다. 그때 칼슨의 시선이 일순 나에게 닿았다.

몸이라니! 도대체 나를 얼마나 불편하게 하려고!

눈에 가득 차오른 원망이 칼슨의 눈에도 보였던 걸까.

“몸이라기보다는 얼굴이나 손, 목덜미 정도만 닦아 줘도 됩니다. 혹시 열이 더 오른다 싶으면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는 게 좋습니다.”

“그렇군.”

땀을 닦아 주라는 말 자체를 취소할 수는 없었을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자 칼슨은 그런 나를 보고 작게 혀를 차고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그냥 푹 쉴 수 있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그러게요.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 보죠.”

아멜리아는 칼슨의 등을 떠밀었다. 칼슨은 그런 그녀의 손길에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럼 다른 걱정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두 분은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문을 닫기 전 아멜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레이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말로 그녀가 이 상황을 꽤 즐거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격이 꽤 나쁘다던 레이넌의 말이 갑자기 떠오른 건 그냥 예민해진 탓이겠지.

“일단 제대로 눕는 게 좋겠군.”

“공작님.”

“응?”

“저는 정말 괜찮아요.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테니 공작님도 좀 쉬시거나 다른 분들과 시간을 보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가 괜찮지 않아서 그래.”

“네?”

레이넌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봤다.

“어제 나 때문에 괜히 밖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지 않았나. 그대가 아픈 데는 내 책임도 있어.”

정말 미안한 듯 말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것에 대한 후회가 잔뜩 밀려왔다.

“뭔가 필요한 게 있나?”

“아니요.”

“그렇군.”

조금 뒤척이기라도 하면 레이넌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살폈다.

아예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는 것도 못 할 짓이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그는 귀신같이 내 기척을 알아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딘가 불편한가?”

참고 참다가 결국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보고 그는 다시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불편하다마다요.

레이넌은 조금 전까지 내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고 있었다.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꽤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었지만 그의 손이 떠나질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이렇게 닦을 일이 생겼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이거 이제 치워도 될까요?”

조금 전까지 내 이마에 올려져 있던 물수건을 들며 물었다.

“칼슨이 그렇게 해 주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답답하더라도 조금 참도록 해.”

“열이 오른다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고, 무엇보다 이정도면 오히려 안 좋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나 땀이 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공작님, 이건 땀이 아니라 물이잖아요.”

물을 적시고는 제대로 짜지 않은 탓에 물수건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얼굴에 자꾸 물이 흘러내릴 수밖에.

“이게 땀이 아니라고? 알 수가 없군.”

아니, 훈련할 때 땀도 안 흘리나. 알 수가 없다는 말은 내가 하고 싶었다.

“이것 좀 보세요.”

물수건을 살짝 비틀었을 뿐인데도 물이 쭈욱 흘러나왔다. 그는 내 손에서 물수건을 빼냈다.

그는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 어설프게 만졌다. 곧 결정을 내렸는지 물그릇에 그대로 넣어 버렸다.

“다행히 이불은 젖지 않았군.”

레이넌은 마른 손수건으로 내 손을 닦아 주며 말했다.

“그럼 물수건은 이제 안 하시는 거죠?”

“그래. 물을 제대로 짜야 하는 거였군. 기억해 둬야겠어.”

물그릇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레이넌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연 그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 또 있을까. 그렇다고 한들 내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레이넌이 자신의 실수를 되짚는 동안 다시 자리에 누웠던 나는 곧바로 몸을 세웠다.

내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레이넌이 반응했다. 얼른 다가와 나를 부축하고는 물었다.

“또 어디가 불편한가?”

“아니……. 이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어요.”

도움을 조심스럽게 거절하자 레이넌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익숙지 않아서 그래. 난 뭐든 빨리 배우는 편이니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굳이 간호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그의 말은 곧 익숙해질 테니 조금 기다려 달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쩐지 그가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넌이 오늘 중에 익숙해져서 능숙한 간호를 한다고 해도 아마 그때쯤이면 없던 병이 생길지도 몰랐다.

“네. 그렇지만 정말 크게 아픈 건 아니니까 적당히 하셔도 돼요.”

결국은 마음이 약해지고야 말았다.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에게 더는 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 적당히 하지.”

다행히 레이넌은 내 마음을 이해한 것 같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말에 잠시 웃음을 보이자 레이넌은 조금 전 내가 움직인 이유를 물었다.

“그래서 뭐가 불편하지?”

“아. 베개를 좀 바꾸려고요.”

베고 있던 베개를 치우고 옆의 것과 바꾸려고 하자 레이넌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더 폭신한 편이 좋은가? 단단한 편? 아니면 높이가 맞지 않는가? 말만 하면 당장 준비시키지.”

적당히 하신다면서요. 그러고 보니 승마를 할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가.

“오늘은 가볍게 하지.”

그 말에 기뻤던 건 잠시였다. 평소보다 더 험한 길을 빠르게 달리고서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보다 더 일찍 끝났군.”

가볍게 한 바퀴 더 돌아보겠느냐는 제안에 나는 기겁을 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가볍게’라는 단어의 뜻을 의심하게 됐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씁쓸한 웃음을 보이며 베고 있던 베개를 그에게 건넸다.

“그랬군.”

물수건의 물이 내 얼굴에만 흘러내린 건 아니었다. 축축하게 젖은 베개는 베고 있는 자체로도 찝찝했다.

베개를 이리저리 만져 보던 그는 내 뜻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사이 얼른 옆에 있던 베개를 베고 누웠다.

차라리 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럼 레이넌도 그동안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조금은 쉴 수 있겠지.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레이넌의 시선이 느껴졌다. 평소 머리만 대도 잠에 잘 드는 나였지만 다른 날보다 잠드는 데 시간이 걸린 건 그 시선 때문일지도 몰랐다.

혹시나 이러다 잠이 들지 못하면 어쩔까. 깨어 있는 채로 레이넌의 간호를 내내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여러 걱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행히 내가 걱정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샌가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늦은 오후였다. 나른하게 들어오는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푹 잠든 덕분일까. 몸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일어났는데도 레이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던 그였기에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레이넌은 침대 옆에 자리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잠든 모습은 불편해 보였지만 그를 깨울 수는 없었다.

꽤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 명당이로구나.

아래에서 봐도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문득 처음 만났을 무렵의 그가 떠올랐다. 그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무서움이 컸었다.

왜 그렇게 그가 무서웠을까. 말투나 분위기가 그렇긴 해도 사실은 꽤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그래서일까. 더는 예전처럼 무섭진 않았다. 다만 전과는 다른 긴장감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확실히 잘생겼어.

새삼 그의 외모에 다시 한번 감탄했을 때였다. 레이넌이 눈을 번쩍 떴다.

혹시나 또 속마음을 소리 내어 말했나?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레이넌은 눈을 뜬 나를 보고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곧 이마에 닿는 그의 손이 느껴졌다.

“이제 열은 내린 모양이군.”

“네. 푹 자고 났더니 몸이 한결 가볍네요.”

“다행이군.”

이마를 떠난 손은 내 얼굴을 맴돌았다. 자는 사이에 땀을 흘렸는지 얼굴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레이넌은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떼어 주고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목덜미를 스치는 손가락에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그런 나를 알고 있을 텐데도 진지한 얼굴로 목덜미에 붙은 머리칼까지 정리해 주고서야 손을 뗐다.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면서도 안도가 함께 일었다. 그런 마음이 담긴 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레이넌이 몸을 조금씩 더 앞으로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오려는 거지. 당황해서 그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러다 얼굴이 닿을 것만 같았다. 그의 눈에 차오르는 내 얼굴을 보고 끝내 눈을 감았다.

조금씩 그의 숨이 가까워지는 것으로 레이넌과의 거리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더는 남아 있는 공간이 없을 것 같다고 느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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