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금방 중심을 잡았다.
“공작님?”
레이넌이 먼저 제 방의 발코니로 나와 있었던 걸까. 꽤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가까운 거리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넘어올 것처럼 한 발을 난간에 올린 채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서 있으면 위험하다니까.”
레이넌은 발을 내리고 헛기침을 몇 번 내뱉고는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잠이 안 오나?”
“아직 이른 시간이잖아요. 게다가 낮잠도 잤고.”
“그렇군.”
레이넌도 나처럼 난간에 팔을 기대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도 고개를 들었다.
꼭 바로 옆에서 함께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까만 하늘을 가득 채운 것처럼 반짝이는 별은 손만 뻗으면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하늘로 뻗었다. 허우적거렸지만 별이 잡힐 리 없었다.
그렇지만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별이 흘러나가는 것 같았다.
뭔가에 홀린 듯 계속 허공에 손을 내젓고 있으니 레이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또 뭐 하는 짓이지?”
“아, 그냥…….”
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말은 아무리 나라도 입 밖에 내뱉기엔 창피했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물론 지금 마음을 가득 채운 진심이기도 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래서 폐하도 좋아하셨지.”
“그런데 왜 잘 안 오시는 거예요?”
“글쎄. 내가 편하게 오라고 마음 써 주신 거겠지.”
그런데 왜 한 번도 오지 않았나요?
묻고 싶었던 질문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어쩐지 그건 내가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원해서 기분이 좋네요.”
“그렇군.”
“엄청 즐거웠어요. 감사해요. 저도 데리고 와 주셔서.”
“어차피 필요한 일이었어. 이제 약혼 발표를 한다고 해도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을 테니까.”
레이넌은 정작 나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그렇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즐거웠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래도요. 덕분에 즐겁게 지냈어요. 정말이에요.”
웃으며 말하자 레이넌의 고개가 슬쩍 이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채 나를 향하기도 전에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 꽤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밤 풍경을 배경으로 둔, 고운 그의 옆모습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봤다.
내가 갑자기 조용해졌기 때문일까. 시선을 돌린 레이넌과 눈이 마주쳤다.
“아.”
이번에 황급히 고개를 돌린 건 나였다. 훔쳐보다 들킨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레 찔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곧 떠난다니 아쉽네요. 조용하고 예쁘고 또 기분도 좋고, 행복했…….”
더 늘어놓다가는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다. 더 이상한 말이 나오기 전에 입을 닫았다.
마무리가 무척 어색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우리를 둘러싼 분위기 자체가 어색했으니 상관없을 터였다.
내 말에 레이넌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계속 조용한 것도 신경이 쓰여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난간에 한쪽 팔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쉽나?”
횡설수설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는 대강 중요한 부분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네.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그렇군. 일이 조금 더 정리되면 그때 또 오도록 하지.”
“정말요?”
“그래. 에드윈도 꽤 좋아했으니.”
레이넌이 얼마나 바쁜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대략은 알고 있었다. 로만이 한동안 곧 죽을 듯한 얼굴로 휘청거리며 저택을 돌아다녔던 것만 봐도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레이넌은 언제나 일에 파묻혀 있는 모습이 익숙하기도 했고.
그랬으니 다시 오겠다는 말이 얼마나 현실성 있는 약속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로 아쉬움은 줄어들고 대신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작님.”
“응.”
“다음에 올 때는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뭐지?”
“들어준다고 말씀하시면 여쭤볼래요.”
“들어주지.”
당돌한 내 말에 화를 내거나 고민을 하지도 않고 레이넌은 바로 대답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어진 깔끔한 그의 대답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뭐지?”
“그, 그러니까…… 다음에 올 땐 승마 수업 일정은 빼 주시면 안 될까요?”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레이넌은 잠시 이해를 못 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곧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힘들었나.”
“……네. 아니, 휴가라고 하시곤 수업이라니, 너무하셨어요.”
“그랬군. 좋아. 다음엔 승마 수업 일정을 빼도록 하지.”
“와! 감사합니다!”
다시 온다면 승마 수업은 없다. 이것만큼 기쁜 소식이 또 있을까.
신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탓일까. 레이넌은 어느새 웃음을 지우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따갑게 다가오는 시선에 괜히 멋쩍어진 나는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레이넌은 아직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하늘을 보고 있을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그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레이넌의 기척을 찾으려 감각을 세우다 보니 주변의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화음을 넣어 노래를 부르는 듯한 풀벌레 소리, 바람에 나무들이 사각거리며 흔들리는 소리…….
자연이 만들어 낸 소리가 아름다운 풍경을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어둠을 밝히는 별빛도, 귀에 와 닿는 자연의 소리도, 몸을 감싸는 시원한 공기도.
그리고 이 순간을 함께하는 사람조차 그랬다.
그때 레이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 쪽으로 걸어와 난간에 팔을 기댔다.
잠시 고민하던 나도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그대는 어떤 게 가장 기억에 남지?”
“음…….”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함께 먹은 아침도, 풀밭에서 가졌던 티타임도, 호수에서 보낸 시간도, 그 외에 소소하게 보냈던 모든 시간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너무 어려운데요. 공작님은 어떤 게 가장 기억에 남으세요?”
“배.”
그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답을 내어놓았다. 호수에서 즐겼던 뱃놀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때 레이넌의 표정은 더없이 편안하고도 즐거워 보였다.
“아, 정말 좋았죠. 호수에서 본 풍경도 엄청 예뻤죠?”
“그런 것도 있지만…….”
기억에 남는 건 아름다웠던 풍경이나 편안한 시간만은 아니었던 듯했다.
뭐가 그에게 있어 그렇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을까.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의 뒷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레이넌은 그런 나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뒷말을 이어 가지도 않았지만.
다만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낄 무렵 레이넌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손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기는 했지만 망설임은 없는 손길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에게 닿을 것 같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쩐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멈추었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잠시 눈을 깜빡이는 짧은 순간 레이넌의 손등이 내 볼에 닿았다.
뜨거운 손의 열기가 볼에 퍼져 나갔다. 볼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을 따뜻하게 데우기 시작했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레이넌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칼이 흘러내려 만든 그늘에 얼굴이 반쯤은 잠겼다.
레이넌의 눈이 어떤지 볼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가 그에게서 풍겨 나왔다.
세상에 내려앉은 어둠과 비슷할까, 혹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별과 비슷할까.
뭔가 어두운 것 같으면서도 따스한 느낌에 혼란스러웠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단히 닫힌 그의 입술이 조금씩 위로 향했다.
그때 불어든 바람에 레이넌의 은빛 머리칼이 흩날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별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가는 듯했다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그의 눈이 드러났다. 밤하늘보다 신비로운 그의 보랏빛 눈에 내가 비쳤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레이넌의 눈에 내가 담겨 있다니.
“아무래도 너무 오래 바깥에 있었던 모양이야. 얼굴이 차군.”
“아…….”
레이넌의 말에 문득 정신이 든 나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죄, 죄송합니다.”
“약혼자에게 할 소리는 아니군.”
“죄송합, 아니 그게…….”
“아쉽더라도 이만 들어가는 게 좋겠군.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그대도 푹 자도록 해.”
슬쩍 볼을 쓰다듬고는 레이넌의 손이 겨우 떨어졌다.
그제야 몸이 제대로 움직였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창을 닫고 커튼을 친 나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뭐지? 뭐야? 뭔가 홀린 것 같아…….”
도대체 뭐였지? 왜 움직일 수가 없었지? 아니, 왜 그렇게 홀린 것처럼 바라봤지?
“아니, 그보다 왜 손을 거기에…….”
겁도 없이 레이넌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다니.
손을 내려다보던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분명 비어 있는 손인데 아까 느꼈던 그의 머리칼의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 같아서.
손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나는 그대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분명 곱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이었는데 그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내 머리칼을 만지는데도 자꾸 레이넌이 떠올랐다.
“큰일 났다. 어떻게 얼굴을 보지…….”
나는 울먹이며 그대로 침대에 몸을 묻었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다음 날 휴가의 마지막 일정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찬 바람을 오래 맞아서인지 감기 기운에 시달린 탓이었다.
“미열 정도이니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루 이틀 잘 쉬면 나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루 만에 다시 불려온 칼슨은 레이넌에게 말했다.
“역시 어제 너무 오래 찬 바람을 쐰 모양이군.”
레이넌은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의 곁에 서 있던 아멜리아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들썩였다.
분명 놀리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꼭 장난을 치기 전의 것과 같았으니.
레이넌은 보지 않고서도 알았는지 아멜리아보다 먼저 말을 꺼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됐고, 오늘 아멜리아와 체이스가 에드윈과 놀아 줘야겠군.”
“에드윈 님이 르네 걱정에 안절부절못하시는데, 잠시 들렀다 가시라고 할까요?”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면 괜히 더 걱정할 수도 있어. 하루 푹 쉬면 낫는다고 하지 않았나. 에드윈에게도 그렇게 말하도록 해.”
“네. 저는 걱정 마시고 정말 재밌게 즐기셨으면 좋겠다고 전해 주세요.”
내 말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 레이넌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작님은요?”
“내가 오래 붙들어 둔 게 잘못이니 간호를 해야지.”
“간호요? 저를요?”
레이넌의 말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멜리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레이넌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싫은가?”
“아니, 싫다기보다는…….”
“그럼 됐어.”
불편할 게 뻔하잖아요.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왜인지 레이넌은 의욕에 차 있었으니까. 그런 그의 마음은 칼슨을 향해 물은 질문에 가득 묻어났다.
“그래서 간호는 어떻게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