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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50)화 (50/129)

“여전히 성격이 참 안 좋아.”

“어머, 공작님만 하려고요.”

조금도 지지 않는 아멜리아의 말에 레이넌은 잠시 고민했다.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모르겠다고 말한다 한들 저런 얼굴을 한 이상 순순히 답을 알려 주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답은 공작님께서 찾으셔야죠.”

역시나. 오히려 아멜리아의 흥미만 돋운 셈이 되고야 말았다.

아주 어렸을 때야 이래저래 그녀에게 휘둘리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그럴 일이 거의 없었다.

물론 휘둘렸다고는 하나 나쁜 기억은 없었다.

큰 깨달음을 얻기도 했고, 조금 전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감정이 사소한 감정이라는 걸 깨닫기도 했다.

오랜만에 레이넌에게서 예전의 모습을 보기라도 한 듯 신이 난 아멜리아를 보며 레이넌은 혀를 차며 말했다.

“가끔 네가 아주 착하고 상냥하다던 르네의 믿음을 깨어 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

진심으로 그럴까 고민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멜리아에게 르네를 맡겼을 때 잘 지내리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멜리아가 이렇게나 르네를 아낄 줄은 몰랐고, 르네는…….

무한한 신뢰와 깊은 애정을 담은 눈길을 아멜리아에게 보냈다. 아마 저런 눈이 자신을 향하니 아멜리아도 더 정이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아멜리아가 그런 거에 휘둘리는 성격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말한 대로 솔직히 감정을 표현하는 르네에게 그녀가 끌리지 않을 이유는 없었을 터였다.

“그거야말로 제가 말씀드린 사소한 일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멜리아는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듣는 레이넌은 투덜거리듯 불만을 토해 냈다.

“사소한 일이라니. 정말 골치 아픈 말이군.”

“뒤로 물러나기보다 앞으로 잘 다가서는 게 중요할 수도 있겠죠.”

아멜리아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인사를 남기고 방을 떠났다. 레이넌은 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성격이 참 나쁘다니까.”

허탈한 레이넌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에 잠시 맴돌다 사라졌다.

***

끙끙거리다 잠이 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금 나를 깨우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 상냥했다.

“르네, 지금 이렇게나 자면 밤에 못 자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힘들게 눈을 떴다. 그녀는 재우려는 건지, 깨우려는 건지 부드럽게 나를 토닥였다.

“조금 힘들어도 지금 일어나는 게 나아요.”

“네에…….”

비몽사몽 눈을 뜨자 아멜리아는 내게 물 잔을 건넸다. 시원한 물이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지자 조금씩 잠기운이 사라졌다.

“잠이 좀 깼으면 뭘 좀 해도 될까요?”

“뭘요?”

“잠시만요.”

아멜리아는 문을 열어 누군가를 들어오게 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나이를 짐작게 했다.

하지만 나이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어떤 젊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눈빛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보통 깐깐한 성격이 아닐 것 같은 외모는 그가 누군지 한 번에 알게 해 주었다. 로에리안저에서 그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터였다.

“아, 이분은…….”

“네. 로에리안저의 주치의, 칼슨이에요.”

아들인 오스틴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이제 레이넌의 진단을 제외하면 로에리안의 일을 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가 레이넌을 따라 이곳까지 함께 온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아니, 그대로 앉아 계시지요.”

어설프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칼슨은 얼른 나를 만류했다.

“간단히 진료를 볼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은데 갑자기 진료는 왜요?”

“음…….”

내 질문에 아멜리아와 칼슨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아까 레이넌도 걱정스럽게 나를 깨우질 않나, 갑자기 주치의까지 와서 진료를 본다고 하질 않나…….

“혹시 저, 어디 아픈 거예요?”

나도 모르는 큰 병을 앓고 있었던 걸까?

몸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묻자 아멜리아는 얼른 나를 다시 앉혔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얼굴 좀 풀어요. 지금 얼굴이 더 병색이 완연해 보이니까.”

아멜리아의 말에 손을 들어 내 볼을 쓸었다. 그렇다고 해도 손으로는 지금 내 얼굴이 어떤지 알 수는 없었다.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니……. 그 정도로 안 좋은 건가요?”

“아니, 얼마나 놀랐으면 지금 얼굴에 핏기가 다 사라졌어요.”

아멜리아의 웃음 섞인 말이 끝나자 칼슨이 그녀 대신 설명을 해 줬다.

“아무래도 환경이 바뀌었으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는 겁니다.”

“……이제 와서요?”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자 칼슨은 뜻밖에도 옅은 미소를 보였다. 웃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꽤 달라 보였다.

제법 인자해 보이는 모습에 긴장된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이제 곧 돌아갈 테니까요. 혹시 그동안 문제는 없었는지, 돌아가서는 또 괜찮을지 확인해 보는 거지요.”

“그래요, 르네. 잘 쉬고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아멜리아가 칼슨의 말을 거들었다. 영 틀린 말은 아니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저 큰 병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니에요. 정말 그냥 확인해 보는 것뿐이에요.”

아멜리아의 확답에 겨우 걱정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씩 원래의 속도를 찾기 시작했다.

칼슨은 이리저리 내 몸을 살피기도 하고 이따금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꽤 자연스러웠지만 어느 순간 질문이 조금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최근 며칠 사이에 평소와 다른 걸 마시거나 만지지 않았습니까?”

“음……. 아니요?”

“기억을 잘 떠올려 보시지요. 일상적이지만 다른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칼슨의 말을 듣고 곰곰이 되짚어 봤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애초에 내가 뭘 먹든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였다. 게다가 낯선 사람을 만난 적도 없었으니 평소와 다른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특별히 떠오르는 건 없어요.”

내 대답을 들은 아멜리아가 칼슨에게 뭔가 조용히 속삭였다. 칼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질문을 이어 갔다.

“혹시 어알 수 없는 통증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갑자기 숨 쉬기 곤란해진 적이 있다거나, 몸이 마비된 느낌이 든 적은요?”

“그런 적도 없어요.”

확실히 뭔가 있는 듯이 이어지는 질문에 다시 심장이 철렁했다.

“역시…….”

다시 묻어 두었던 질문을 꺼내려는데 칼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나 뭐 심각한 병이라도 걸린 건가요?

한 번 더 물어보려는데 아멜리아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나보다 더 초조한 얼굴로 칼슨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히 문제가 있진 않으십니다. 건강하시군요.”

그의 말에 나와 아멜리아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마음을 놓은 듯한 것도 잠시였다. 아멜리아는 뭔가를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이 꽤 심각해 보여서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

칼슨은 늘어놓았던 짐들을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돌아가서 또 뵙지요.”

“네,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칼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아멜리아는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멜리아?”

“아, 죄송해요. 고민 좀 하느라…….”

“고민이요?”

“내일이 마지막 날이잖아요.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해서요.”

“옷이요?”

“네. 내일은 에드윈 님이 하고 싶은 일들은 모두 하기로 했거든요. 르네도 각오를 단단히 해 두는 편이 좋을 거예요.”

에드윈의 체력과 의욕이라면 과한 조언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 그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모두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멜리아는 흐트러진 이불을 잘 여며 주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간혹 환경이 바뀌면 많이 아픈 사람도 있는데 르네는 안 그런가 봐요.”

“네. 그렇게 예민한 편은 아니라서요.”

“그럼 오늘은 푹 쉬어요. 내일은 엄청 바쁠 테니까요.”

“네.”

“그리고 저는 근처에 계속 있을 거예요. 혹시 몸이 아프거나 뭔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게 있으면 바로 불러요.”

“근처에 계속 있을 거라고요?”

“공작님 침실 앞을 지킬 테니까, 르네의 근처이기도 하죠?”

아멜리아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 그렇겠구나. 그래도…….”

“괜찮아요. 작은 거라도 괜찮으니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문만 열어요. 제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도 있을 테니까.”

“네.”

“그럼 쉬어요.”

아멜리아가 나간 후 거울부터 들여다봤다. 내가 정말 어디가 아픈 건지, 아니면 아파 보이기라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과할 정도로 당부를 하는 아멜리아도 그렇고, 칼슨까지 온 것도 그랬다.

“음……. 비슷한데?”

거울을 들여다봐도 평소와 다른 부분은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살이 좀 찐 것 같기도……. 아! 그래서인가?”

살이 찌면 건강에 문제가……. 아니, 내가 살찐 걸 전혀 알아채지 못하니까 상처받지 않게 알려 주려는 걸까?

“그럴 리가 없지.”

이 정도 살이 쪘다고 다들 알아보거나 호들갑을 떨 정도로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답은 찾지 못하고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방해받기는 했지만 두 번의 낮잠으로 더는 잠이 오지는 않았다.

여기 와서 계속 바쁘게 지낸 탓일까. 갑자기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의 시간이 힘들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왁자지껄하게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었다.

마음을 가득 채우는 소중한 시간을 보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도록 방을 가득 채운 정적이 조금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보낸 기억을 차곡차곡 잘 정리해 둘 수 있게 해 주었다.

언제든 다시 꺼내 볼 수 있을 정도로 차분히 정리된 다음엔 다시 침대 위에서 몸을 굴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란 이렇게나 달콤한 것이었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기만 했을 뿐인데도 시간은 잘 흘러갔다.

해가 넘어가는지 붉은빛이 방 안 깊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발코니로 통하는 창을 통해 바깥의 색깔이 변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씩 짙어지던 붉은빛은 이내 서서히 잦아들었다.

어둠이 밀려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코니라…….”

바깥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발코니로 나가서 볼 걸, 하는 아쉬움이 떠올랐다.

그래도 밤 풍경도 아름다울 터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발코니로 향했다.

문을 열자 조금은 서늘한 공기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와…….”

밤의 어둠이 내려앉은 별장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홀린 듯 난간까지 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난간에 기대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다 떨어지려면 어쩌려고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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