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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49)화 (49/129)

“넌 안 마셔?”

나는 내가 물을 마시는 걸 빤히 바라만 보고 있던 마빈에게 물었다.

“아, 마셔야지.”

그는 빙긋 웃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에겐 안 마시냐고 묻더니 정작 목이 말랐던 건 마빈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쉬지도 않고 벌컥벌컥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어쩌면 물의 양이 문제였을지도.

“목이 많이 말랐나 보네.”

나는 그에게 잔을 돌려주며 말했다. 마빈은 기분 좋은 듯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런가. 진짜 시원해서 그런가 봐.”

“고마워. 잘 마셨어.”

“아니. 물 정도 가지고 뭘. 그럼 쉬어.”

갑자기 바쁜 일이라도 생긴 건지 마빈은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다만 그가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방에 들어선 사람이 있었다.

“아…….”

방에 들어선 이와 마빈은 말없이 그대로 마주 봤다.

“아멜리아?”

내 부름이 들리고서야 꼼짝도 하지 않고 멈춰 있던 두 사람이 움직였다.

아멜리아는 다른 때처럼 미소를 짓고 있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마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꽤 긴장한 듯 느껴졌다.

아멜리아의 시선이 내게 닿자마자 도망가듯 방을 빠져나간 것만 봐도 그랬다.

이상한 건 마빈이 떠나고도 한참 동안 아멜리아는 닫힌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멜리아?”

“아, 르네. 오늘 승마는 어땠어요?”

다시 돌아보는 그녀는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 매일 새롭게 자극하시네요. 말리지 말아야지, 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면 전력을 다하고 있다니까요.”

“즐거워 보이니 다행이네요.”

“즐거워 보인다니요. 정말 매일 온몸이 찢어져 나가는 것 같은데요.”

“설마요. 이렇게 쌩쌩한 걸 보니 잘 가르치고 계신걸요.”

“……그래요.”

“그나저나 마빈은 무슨 일로 여기에 왔어요?”

“음……. 그러게요. 농담처럼 잘 보이려고 왔다던데……. 정말 왜 왔지?”

다시 돌이켜 보니 정말 이상했다. 뭔지 모르지만 갑자기 초조해했다가 안도했다가…….

그렇다고 뭐가 이상하냐고 하면 딱히 꼽을 만큼 명확한 건 또 없었다.

“음…….”

“르네.”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지켜보던 아멜리아는 씨익 웃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공작님을 두고 다른 남자와 단둘이…….”

“아, 아니에요. 그냥 물 한 잔만 마시고 갔어요.”

“물이요? 컵이 안 보이는데요?”

아멜리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마빈이 가져왔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나갈 때…….”

“네.”

“혹시…… 마셨어요?”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그때, 아멜리아는 얼굴을 굳혔다.

본 적 없는 긴장감 어린 그녀의 얼굴에 나도 덩달아 숨을 참고 눈만 깜빡였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아니, 아멜리아가…….”

먼저 정색한 건 아멜리아였으면서 전혀 그런 적 없다는 되묻는 그녀였다.

뭔가 반박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잠시만요. 제가 깜빡한 일이 있어서요. 금방 올 테니 씻고 있어요.”

“네.”

대답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녀는 등을 돌렸다. 걸음이 급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금 전의 아멜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온몸에 느껴지는 근육통에 고개를 저었다.

일단 씻자.

따뜻한 물에 얼른 몸을 담그고 싶어진 나는 욕실로 향했다.

금방 오겠다고 서둘러 나간 것과는 달리 그녀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운동도 했고, 씻기까지 한 덕에 조금씩 노곤함이 밀려들었다.

“조금만 누울까?”

분명 조금만 누워 있을 생각이었는데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촉감에 서서히 눈이 감겼다.

깊은 잠에 빠져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르네? 르네!”

멀리서 누군가의 부름이 들려왔다.

누가 나를 이렇게 부르지? 다급한? 아니, 애절한 목소리로.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누구였더라.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르다가 누군가의 부름으로 다시 흩어졌다.

꿈을 꾸는 걸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게다가 유난히 푹신푹신한 베개는 다른 날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으음…….”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에 베개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르네.”

이번엔 몸이 흔들렸다. 잠기운이 꽤 강하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탓에 눈을 뜨는 건 쉽지 않았다.

힘겹게 눈을 깜빡이자 흐릿한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맑아지고서도 잠시 멍하게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가깝게 내려다보고 있던 레이넌과 부딪힐 뻔했지만 그가 재빨리 물러난 덕분에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공작님?”

“어디 아픈가?”

내 목소리를 들은 그의 얼굴엔 미약한 안도감이 퍼졌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의 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네?”

어디 크게 아픈 사람을 걱정하기라도 하듯 조심스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아직 꿈속에서 헤매는 중인지 헷갈렸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묻어났다.

“제가 어디 아팠나요?”

내 말에 레이넌은 대답하지 않고 등 뒤에 베개를 대어 주며 기대게 했다.

정말 어디가 크게 아팠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절로 입 밖으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지?”

레이넌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아니…….”

“일단 주치의를 불러야겠군.”

“밖에 대기 중입니다.”

레이넌의 말에 아멜리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가 큰 병에라도 걸린 듯 심각한 두 사람의 모습에 대답하기가 창피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 일이 더 커질 것이 뻔했으니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에 두 사람은 행동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한 두 사람의 시선을 받자 절로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게…….”

“뭐지?”

“승마 때문에 생긴 근육통이…….”

“……뭐?”

얼떨떨한 레이넌의 물음이 돌아왔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황당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뿐인가?”

“네. 자기 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엄청 아프네요.”

태연한 내 목소리에 레이넌과 아멜리아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모두 내가 괜찮은 척하는 건지 아닌지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아멜리아는 마사지도 엄청 잘하네요! 진짜 아멜리아 아니었으면 제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했겠어요.”

일부러 활기차게 이야기하자 아멜리아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물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 조금 움직인 걸로 이렇게 아픈 걸 봐서 아마 제대로 걷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아마 이대로 두면 내일 더 아플 거예요.”

“이것보다 더 아프다고요?”

“네. 혹시 그거 말고 다른 데가 아프거나 몸이 좀 이상하다거나 한 건 없어요?”

“네. 근육통 말고는…….”

한 번 더 내 상태를 확인하는 듯한 그녀의 말에 몸을 움직여 보다 다시금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일 제대로 움직이려면 지금이라도 마사지를 받는 게 낫겠네요.”

“나는 나가 있지.”

어느새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레이넌은 미련 없이 방을 떠났다.

“다리부터 시작할게요.”

이제는 익숙한 아멜리아의 손이 닿자 나도 모르게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아멜리아의 마사지는 이미 굳기 시작한 몸에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도 지르고 발버둥도 쳤지만 아멜리아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다른 날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세게 내 몸 곳곳을 눌러 댔다.

“아멜리아, 잘못했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제가 다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눈물까지 머금고 매달려 봤지만 그녀는 웃을 뿐이었다.

“제가 조금 늦은 탓에 내일 르네가 아프면 안 되잖아요. 조금만 참아요. 지금 이렇게 안 하면 내일은 더 아플 거라니까요.”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요.”

“하여간 엄살은.”

나의 진심이 엄살로 둔갑하고야 말았다.

“이,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요.”

나는 아픔을 견디다 못해 이제 그만하자고 아멜리아에게 몇 번이고 매달렸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를 달랬다.

상냥한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손이 지나가는 곳엔 어김없이 통증이 느껴졌다.

그렇게 아멜리아는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여 마사지했다.

“자, 이제 끝이에요.”

마침내 기다리던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이미 지친 상태였다. 심지어 과연 이 정성 어린 마사지가 나를 나아지게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까지 품게 되었다.

그녀를 배웅하지도 못한 채 나는 끙끙대며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

르네의 방을 나온 아멜리아의 걸음이 향한 곳은 레이넌의 침실이었다.

“어떤 것 같나.”

본론부터 묻는 레이넌의 모습을 보며 아멜리아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뭐지, 그 웃음은.”

“보기 좋아서요.”

아멜리아의 말에 레이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서 르네는 어떤가.”

“괜찮은 것 같아요.”

“마빈이 준 걸 마셨다고 하지 않았나.”

“네. 분명 하나는 반쯤 비어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텅 빈 채였으니 둘 중 하나는 르네가 마셨을 텐데……. 과한 걱정일까요?”

“글쎄. 그보다 어째서 마빈이 르네에게 접근할 때까지 알아차리는 자도, 막는 자도 없었나.”

“죄송합니다. 빈틈없이 잘 지키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칼슨에게 진료받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마빈은?”

“잠깐 눈 뗀 사이에 나온 모양인데, 그 후로 방에 계속 박혀 있습니다.”

“그렇군. 이번에 동행한 사용인 중 마빈과 연결된 자가 있는지도 알아보도록 해. 아주 잠깐 생겨난 틈을 정확히 파고든 게 아무래도 꺼림칙하군.”

“알겠습니다.”

이야기는 끝났으니 그대로 나가야 할 아멜리아는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르네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보기 드물 정도로 솔직하고 마음도 참 예쁘죠.”

아멜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르네에 대한 칭찬을 술술 늘어놓자 레이넌은 의아한 눈을 했다.

“새삼.”

“안 좋아할 수가 없는 사람이잖아요, 르네는?”

아멜리아는 동의를 구하듯 물었지만 레이넌은 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아멜리아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짙어졌다.

“제가 르네를 더 좋아하게 된 건 그녀가 두 분께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에요.”

“두 분께라니?”

“당연히 공작님과 에드윈 님이죠.”

“에드윈은 그렇다고 쳐도, 나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이나?”

“아니라고 말씀 못 하실 텐데요.”

아멜리아의 확신에 찬 말에 레이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그랬는지 생각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레이넌을 방해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사람을 사소한 일로 놓치는 일이 없으시길 바라요.”

“사소한 일이라니?”

“지금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레이넌이 눈을 가늘게 뜨며 예민하게 반응하자 아멜리아는 두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설명에도 레이넌은 좀처럼 표정을 풀지 않았다.

“지금쯤 다들 알겠지만 르네는 눈치도 없고, 또 과할 정도로 걱정을 하거나 겁을 내기도 하죠. 가끔은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멀리 나가기도 하고요.”

“……그렇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게 사소한 일로 놓치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레이넌의 질문에 아멜리아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레이넌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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