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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48)화 (48/129)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그럴 틈은 없었다. 걷기 시작한 그를 따라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드는 아찔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레이넌의 팔에 걸려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잠시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대신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걸었다. 내 보폭에 맞춰 주는 것처럼.

확실히 레이넌의 말대로 뭔가를 붙잡는 편이 훨씬 마음이 놓이긴 했다. 덕분에 다리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엔 그의 팔에 매달려 있는 꼴이었지만.

“르네! 이것 봐! 물고기도 있어!”

에드윈은 여전히 모든 게 신기한지 주변을 둘러보다 못해 다리 아래까지 고개를 내려 바라보고 있었다.

위, 위험해요! 위험해!

내 말에 오히려 그가 중심을 잃을까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르네! 이리 와 봐!”

그는 나에게도 꼭 보여 주고 싶다는 듯 손짓했다.

“아니, 에드윈 님, 저는…….”

저기까지 가지도 못할뿐더러 그렇게 물고기를 볼 자신도 없는데요.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에드윈이 실망하지는 않을 테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렇게 신이 난 에드윈의 기분을 최대한 맞춰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겁이 많은 나에겐 꽤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에드윈 님, 타시죠.”

그 순간, 레이넌의 눈짓을 받았는지 이쪽을 한 번 본 체이스가 훌쩍 배 위에 올라타더니 에드윈에게 손을 내밀었다.

“와! 이거 탈 수 있어?”

배를 탄다는 말에 에드윈의 관심은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폴짝 뛰어 들어간 에드윈의 모습에 다시금 내 얼굴은 창백해졌다.

“에드윈 님!”

배가 흔들리는데도 에드윈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신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응?”

나도 모르게 그를 불렀고, 에드윈은 되레 내 목소리에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내 심장…….

“아니에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나를 보며 미소 지은 아멜리아는 먼저 배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에드윈의 옆에 앉아서 그를 차분히 자리에 앉혔다.

배가 흔들리는 것이 잦아들자 레이넌이 배에 올라타서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에 그의 손을 잡았다.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에드윈의 시선을 느끼고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레이넌이 단단히 붙들어 준 덕분에 안정적으로 배에 올라탔지만 어쩔 수 없이 흔들림이 느껴졌다.

몸이 살짝 흔들릴 뿐이었지만 두 손으로 레이넌을 꼭 붙들었다.

“이제 앉아도 되지 않을까요?”

잠시 그렇게 그를 붙들고 얼어 있자 아멜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이넌도 뭔가에 정신이 팔렸던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출발할까요?”

모두가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 체이스가 물었다. 레이넌이 고개를 끄덕이자 체이스는 줄을 풀고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우와! 움직인다! 르네, 이것 봐! 우리가 물 위에 있어!”

“그러게요.”

에드윈은 마냥 신나고 또 신기한 듯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나 역시 긴장이 풀려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레이넌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배는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주변 광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잔잔한 물결 위에서 흔들리는 기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에드윈이 어째서 그렇게나 신이 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을 정도였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멀리서 호수를 보다가 지금은 호수 한복판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으니까.

“정말 평화롭고 아름답네요.”

“정말 그러네요.”

다들 어느 순간 말이 없었던 것이 나와 비슷하게 풍경에 빠져서 그랬던 듯했다.

나직이 흘러나온 내 말에 아멜리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나무들이 물을 소중하게 안아 주고 있는 것 같아.”

“그러게요.”

귀여운 에드윈의 감상에 나와 아멜리아의 얼굴에는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감상은 귀엽기만 한 게 아니라 꽤 정확했다. 그런 덕분에 이런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으니까.

“다행이군. 마음에 들어서.”

레이넌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가를 스쳤다. 꽤 편안하고도 즐거운 듯한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레이넌도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조금 전 그의 목소리를 실어 날랐던 바람이 다시금 되돌아와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살랑거리며 흩날리는 레이넌의 머리칼을 보고 있으니 괜히 어딘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잔뜩 빠져 있었던 주변 풍경은 잊고 한참이나 그렇게 레이넌을 바라봤다.

그렇게나 편안하고 즐거운 듯한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또 그런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기도 했다.

드문 레이넌의 감정이 주변 풍경보다 더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순간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래도록 지금 이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았다.

***

그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휴가가 며칠은 더 이어졌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경치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과 차를 즐기기도 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레이넌은 매일 꾸준히 승마를 가르쳐 줬다.

가르쳐 줬다고 해야 하나. 필사적으로 말을 타게끔 만들어 줬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이만하지. 며칠 사이에 많이 늘었군.”

레이넌의 칭찬에 기뻐할 여력은 없었다. 오늘도 역시 그를 이기겠다는 부질없는 목표를 위해 온 힘을 다 쏟았으니까.

그는 매일 비슷한 듯 새로운 방법으로 나를 자극했다.

“나는 저기 뒤쪽에서 출발하지.”

“그대가 출발하고 천천히 열을 세고 출발하지.”

그 외에도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나도 모르게 솔깃해서 달려들길 여러 번이었다.

뒤늦게서야 왜 결국 이기지도 못할 거 이렇게 죽도록 고생해서 근육통만 남기는 건지 모르겠다며 나를 탓하곤 했다.

하지만 늘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였고, 그나마 아멜리아의 마사지 덕에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앓아눕는 게…….”

“지금 뭐라고 했지?”

“아니요, 아닙니다.”

“고생했어. 그럼 오후에 보지.”

“네.”

그래도 고작 며칠이지만 조금 단련은 된 듯 이제는 레이넌의 부축 없이 혼자 방까지 올 정도는 되었다.

아아, 아멜리아. 얼른 와 주세요.

얼른 다시 아멜리아에게서 승마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졌다.

“응?”

오늘은 방문 앞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마주쳤다.

“어, 르네, 오랜만이야.”

“응. 너도 같이 왔어?”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마빈이었다.

출발할 때도 그렇고 여기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 그가 함께 왔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 에드윈 님이 오셨는데 당연히 나도 왔지.”

“응. 그건 그러네.”

“요즘 승마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응. 그렇지, 뭐. 근데 여긴 무슨 일이야?”

“아, 에드윈 님도 오늘 조금 늦으시는 거 같고 해서 인사나 할까 해서.”

“인사?”

“미래의 공작 부인께 잘 보여야지.”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조금 인상을 썼다. 한동안 저런 눈빛이나 말에서 벗어나 모처럼 편안했는데.

농담이라고 해도 조금은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인사는 무슨…….”

“공작님께서 여기까지 같이 오고, 직접 승마도 가르쳐 주시는 걸 보면 잘 보여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아하하……. 그런가. 그래. 그럼 나는 피곤해서 이만.”

한동안 편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해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마빈은 나를 다급하게 붙들었다.

“시원한 것 좀 마시면서 숨 좀 돌려. 목마르지?”

마빈의 손에 들려 있는 쟁반에 놓인 유리잔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말대로 시원한 기운을 풍기는 물이 담긴 컵을 보자 잊고 있던 갈증이 밀려들었다.

“고마워. 일단 들어가자.”

일부러 마실 것까지 챙겨 온 마빈을 그냥 돌려보내기도 그래서 그를 방으로 들였다.

얼른 마시고 보내 버리는 것이 더 편할지도.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빈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더니 유리잔 하나를 내게 건넸다.

“자, 마셔.”

“고마워.”

레몬을 띄운 물이었다. 유리잔을 입에 댔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 다시 입을 뗐다.

“근데 왜 널 한 번도 못 봤지?”

내 말에 아주 짧은 순간 마빈은 뭔가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실망이라고 해야 하나, 허탈함, 아니 어쩌면 초조함일지도 몰랐다.

“체이스가 있으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체이스는 에드윈의 곁을 좀처럼 떠나지 않았으니 굳이 마빈까지 늘 붙어 지낼 필요가 없긴 했다.

잠시 내려놨던 컵을 드는 순간 마빈의 눈이 슬쩍 내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왜?”

“응? 뭐가?”

“아니. 빤히 보길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내가 마빈을 응시하며 묻자 그는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마빈에게 다가가자 어쩐지 그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방 진짜 넓고 좋다. 공작저에서 지내는 방도 이 정도야?”

“음……. 글쎄.”

내가 다가갈수록 그는 시선을 피하며 다급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것 같았다.

나를 피해 결국 그는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우와, 여기서 보는 바깥, 굉장히 멋있네.”

“음…….”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다른 컵을 바라봤다. 내 컵에 있는 것에 비해 레몬이 작았다. 그리고 물도 마빈의 것이 적었다.

그래서인가? 큰 레몬을 좋아하나. 이걸 줘 놓고 큰 게 좋았는데, 하고 후회 중이었나.

다시 바꾸자고 말은 못 하고?

두 개의 컵을 번갈아 보다 마빈을 바라봤다. 그는 나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다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그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들고 있는 물을 탐내는 모양이었다.

굳이 이 컵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마빈이 시선을 돌린 사이 컵을 바꾸어 들었다.

“발코니로 나가서 보면 더 멋있겠네.”

“그러게.”

그의 곁에서 대답하자 마빈은 움찔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아, 한 번도 안 나가 봤어?”

“응. 그럴 생각을 못 해 봤네.”

마빈의 말대로였다. 방에서 보는 광경 역시 훌륭했다.

단정하게 꾸며진 정원은 물론 그 속을 누비는 사람들도 모두 여유로워 보였다.

다들 긴장하고는 있다지만 그래도 이런 풍경 속에서 지내다 보니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진 모양이었다.

나는 바깥을 바라보며 천천히 물을 마셨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엄청 시원하네.”

“그렇지?”

물을 반쯤 비우고 기분 좋게 건넨 말에 마빈은 화색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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