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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47)화 (47/129)

나는 레이넌의 앞에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왜 그러지? 문제라도 있나?”

“휴가라면서요…….”

투정과도 같은 내 말에도 레이넌은 평정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휴가에도 할 일은 해야지.”

아멜리아가 승마복을 건네줄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아니, 짐을 챙길 때 빼먹어서는 안 된다고, 꼭 챙겨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할 때부터 불안했다.

“아멜리아는요?”

그렇다면 가르치는 것도 아멜리아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멜리아는 지금쯤 에드윈의 검술 수업 중이겠군.”

에드윈……. 같은 신세로구나.

하지만 에드윈은 나와 달리 신나서 아멜리아에게 배우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말은 탄다지?”

“……네.”

정말 하기 싫다.

“그렇게 싫은가.”

“……제가 소리를 내서 말했던가요?”

분명 속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생각에 잠긴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그렇지 않으리란 확신은 없었다.

“아니.”

레이넌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어질 내 궁금증을 알고 있다는 듯 묻기도 전에 답을 내어주었다.

“말보다 표정이 확실한 편이라서.”

“그 정도인가요?”

얼굴을 보고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래. 그럼 이렇게 하지.”

뭔가 승마를 하지 않을 방법이 있다는 희망을 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나는 기대를 잔뜩 품고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나를 이기면 그대로 끝내 주지. 이긴다면, 돌아갈 때까지 더는 승마를 하지 않아도 좋아.”

“와…….”

순간 속으로 욕이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꾹 참았다. 혹시 또 속내가 쉽게 읽히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일었던 탓이었다.

그런 노력에도 레이넌의 눈에는 모든 것이 훤히 들여다보인 모양이었다.

“초심자에게 맞춰서 적당히 할 테니까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

“정말요?”

“그래.”

말해 뭐 하냐는 듯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럼 해 볼까? 이 순간을 잘 넘기면 남은 휴가를 안락하게 보낼 수 있다.

레이넌이 제 입으로 꺼낸 말을 바꾼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라 순식간에 의욕에 불타올랐다.

***

하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때, 내 의욕은 초심자의 무식한 객기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엔 꽤 아슬아슬했군. 한 번만 더 하면 이번에야말로 그대가 이길 수 있겠어.”

“아니요.”

조금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몇 번을 하더라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초심자에게 맞춰서 적당히 한다는 게 적당히 져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적당히 쫓아올 만큼의 거리로 이겨 주겠다는 뜻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하더라도 그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나를 이길 것이 뻔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몇 번이나 부질없는 도전을 해서 겨우 얻어 낸 결론이었다.

엉덩이도 아프고, 다리도, 발도, 팔도, 손가락도, 허리도…….

아니, 이 정도면 그냥 온몸이 다 아팠다.

“아쉽군. 하지만 내일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레이넌은 전혀 아쉽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몸살이 올 거예요. 틀림없어요.”

그러니 내일은 아예 하지도 못할 거라는 말이었지만 그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할까? 첫날이기도 하니까.”

선심 쓰는 듯한 그의 말에 울컥할 기운도 없었다.

몸 어딘가에 남은 기운을 모으고 모아 겨우 쥐어짜 “고맙습니다.”라는 감사 인사 한마디를 겨우 건넸다.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몸이 내 마음과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힘이 풀려 휘청휘청 걷고 있으니 레이넌이 얼른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다른 때였다면 바로 거절했을 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맙기 그지없었다.

레이넌이 부축해 준 덕분에 방에 도착한다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 그가 아니었다면 저녁쯤 도착했을지도 몰랐다.

“아아, 온몸이 아파. 정말 내일은 못 일어날지도 몰라…….”

씻기는커녕 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었다. 먼지투성이인 채로 침대에 누울 수는 없어 마지막 양심으로 소파에 그대로 쓰러졌다.

잠이 들려는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군지 확인해야지, 생각하면서도 잠에 빠져들었다.

“르네? 이대로 자는 거예요? 얼른 일어나요. 씻기라도 해야죠.”

“아멜리아?”

눈을 깜빡이니 놀란 얼굴의 아멜리아가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잠에서 번뜩 깨어난 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붙들었다.

“계속 저를 가르쳐 주세요. 저를 버리면 안 돼요.”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웃으며 내 손을 토닥였다.

“여기 있는 동안만이에요. 돌아가면 다시 제가 르네를 가르칠 테니 그렇게 애절하게 매달리지 않아도 돼요.”

“……정말이죠? 나중에 다른 말 하면 안 돼요.”

“그럼요. 무엇보다 공작님은 엄청 바쁘셔서 시간을 내기 힘드실걸요?”

“하아. 다행이네요.”

아멜리아의 상냥한 가르침 대신 혹독한 레이넌의 가르침이 앞으로도 쭉 계속될까 걱정했는데, 근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잊고 있던 피곤과 근육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도 르네가 이렇게 저를 붙들고 부탁할 수 있을 정도면 공작님께서 엄청 많이 봐주신 모양인데요?”

“설마요. 여기까지 겨우겨우 왔다고요. 공작님이 부축해 주지 않았으면 여기 오는 길목에서 쓰러져 잠들었을 거예요, 정말.”

“공작님께서 부축을 해 주셨다고요? 어머, 어머! 공작님께서 르네를 정말 아끼시나 봐요.”

“이렇게 사람을 혹독하게 굴리셨는데요?”

“보통은 다시 훈련하러 가자고 하면 없던 힘이 생겨나거든요. 일부러 부축 같은 건 안 하시는 분이죠.”

다시 시작하자고 했으면 그 자리에서 드러누웠을 나는 아멜리아의 기준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왠진 모르겠지만 신이 났는지 조금씩 목소리를 높여 갔다.

아멜리아는 이 약혼의 진실을 알고 있지 않나. 여기까지 함께 온 걸 보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체이스도 결국엔 내용을 알고 있었으니 이렇게 가까이 있는 아멜리아가 모르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는 레이넌과 내가 관련된 이야기는 꼭 모르는 사람같이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어보기도 그렇고, 물어본다고 해도 놀리는 말이 나올 것 같아 그대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일단 씻고 와요. 마사지해 줄게요. 그럼 한결 나을 거예요.”

“아예 움직이지 않는 편이 한결 나을 것 같은데요.”

“그런 말 하지 말고요.”

아멜리아는 손을 끌어 나를 일으키더니 얼른 씻고 오라며 등까지 떠밀었다.

분명 휴가인데 첫날 오전부터 이렇게 지쳐도 되는 걸까.

아멜리아의 재촉에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끌고 힘겹게 욕실로 향했다.

***

아멜리아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던 대로 그녀의 마사지는 몸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던 통증이 옅어진 건 그날 오후였다. 그리고 휴가다운 일정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가까운 곳에 호수가 있다고, 가 보자는 말을 레이넌이 했을 땐 솔직히 귀찮았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고 싶었지만 에드윈이 너무 기대하는 바람에 따라나섰다.

“우와!”

호수를 눈앞에 둔 에드윈과 나는 동시에 같은 감탄사를 뱉어 냈다.

“오길 잘했지?”

귀찮아하던 내 속마음도 모두 읽어 낸 듯 레이넌은 뿌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정말 오길 잘했네요.”

숲속에 자리한 작은 호수는 나무들이 지켜 주는 것처럼 보였다.

잔잔하게 내려앉은 햇빛은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과 만나 보석 가루라도 뿌려 놓은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너무 예쁘네요, 정말.”

“가까이 가 보지.”

그의 손이 가리킨 곳에는 호수로 향하는 나무다리가 있었다.

에드윈은 신이 나서 먼저 뛰었고 나는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출발할 때는 레이넌과 비슷한 속도였지만 조금씩 걸음은 느려지기 시작했다.

“왜 그러지?”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무 사이에 생긴 미세한 틈으로 호수가 보였다. 튼튼하게 지어진 건 알겠지만 아래로 물이 보이니 문득 옆에 울타리가 없다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언제라도 빠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깡충깡충 뛰는 에드윈의 손을 꼭 붙들고 천천히 걷고 싶지만 이미 그는 끝까지 가 있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가?”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

“네.”

앞만 보고 걷자. 아래만 안 보면 괜찮아.

하지만 앞을 보더라도 울타리가 없는 광경이 너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수영은 할 줄 모르는데. 혹시 발이라도 헛디뎌서 빠지면 누군가가 구해 주겠지?

뭐든 잘하는 아멜리아도 있고, 레이넌도…….

아니, 레이넌은 사람을 시키지 굳이 뛰어들지는 않으려나.

그때였다. 누군가가 내 팔을 붙들었다.

“으악!”

놀란 나머지 주변이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함께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모였다.

“으악, 이라니. 꺄악, 아니고?”

뒤에서 따라오던 아멜리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에드윈과 함께 있던 체이스도 그 말에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어딘가 아픈 건……?”

내 팔을 붙든 건 레이넌이었다. 그는 웃음을 참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진지하게 나를 살피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같이 웃는 게 마음이 편할지도 몰랐다.

엄청 큰 소리를 낸 것도, 그 소리가 꽤 괴상했다는 것도 창피한데 이렇게 진지하게 걱정을 하다니.

“갑자기 잡으니까 놀라서…….”

우물쭈물 대답하는 나를 다시 찬찬히 살핀 그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무서운가?”

이번엔 차마 아니라고, 괜찮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럼 배는 못 타겠군.”

“배요?”

레이넌은 대답 대신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대여섯 명은 족히 탈 수 있는 배가 다리의 끝에 묶여 있었다. 흔들리는 모습이 조금은 무서울 것 같지만 그래도 꽤 튼튼해 보이는데.

“그럼 에드윈만 타고 우리는 다시 돌아가지.”

레이넌이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움직이는 대신 가만히 서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조용히 나를 기다려 주었다.

무서운데, 그래도 타 보고 싶긴 하고.

갈팡질팡하다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에드윈을 보고 결정을 내렸다.

“아니요. 탈 수 있을 거 같아요.”

“저기까지 가지도 못할 것 같은데?”

레이넌은 설핏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의 말이 영 틀린 건 아니어서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저기까지만 가면 배는 탈 수 있어요. 아래가 뚫려 있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요.”

“기준을 모르겠군. 정말 괜찮겠나?”

레이넌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나를 살피며 물었다.

“네. 한번 타 보고 싶어요.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잖아요.”

“좋아. 그럼 가 보지.”

“네.”

떨어지지 않는 발을 다시금 천천히 떼려는데 레이넌이 제 팔을 내게 내밀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행동인지 몰라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레이넌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곧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내 손을 잡아끌어 제 팔에 끼웠다.

“뭔가 잡고 걷는 편이 더 낫겠지.”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내게 향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표정이 묘하게 쑥스러워 보였던 건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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