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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46)화 (46/129)

생각보다 몸이 빨리 움직였다.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뒤늦게 너무 노골적으로 피한 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하지만 레이넌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레이넌은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옆모습을 이렇게 바라볼 일이 없어서 그런 걸까.

“바깥을 너무 오래 보는 건 좋지 않아요.”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하얀 천이 레이넌의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꼼꼼히 커튼을 만져 창문을 가린 뒤 웃으며 말했다.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요.”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지만 그녀의 말에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레이넌의 형 부부가 죽은 건 바로 마차 사고 때문이었다. 조금이나마 사정을 알고 나니 그 사고도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혹시 사고가 아니라…….”

“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생각을 뱉어 낸 모양이었다.

“아, 제가 뭐라고 했나요?”

“글쎄요. 입이 움직이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요.”

어리둥절한 아멜리아의 뒤로 에드윈의 모습이 보였다. 바깥 구경을 하느라 신이 났다는 건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멜리아는 곧 에드윈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드윈 님도요.”

“응.”

다행히 에드윈은 착하게 제 손으로 커튼을 쳤다. 바깥이 보이지 않아도 에드윈은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빨리 달리는 마차는 아무래도 흔들림이 있었고, 바깥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혹시 답답해하시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아멜리아도 에드윈의 첫 여행을 염려한 모양이었다.

“네. 다행이네요.”

안도한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 대화를 주고받고 불과 얼마 후, 다행이지 않은 건 나라는 걸 깨달았다.

“르네, 괜찮아요? 얼굴이 안 좋은데요.”

“괜찮……지 않네요.”

말로 괜찮다고 해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에 바로 말을 바꿨다.

내가 멀미가 심한 편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하긴, 여기서 멀미를 경험할 일이 없었으니까.

“르네, 정말 아파 보여.”

에드윈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내 얼굴은 몹쓸 꼴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단 좀 누워요.”

체면이나 에드윈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릴지도 몰랐다.

아멜리아의 말대로 누워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온몸으로 진동이 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자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그녀는 모포를 덮어 주며 말했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눈을 감았다. 정말 죽은 듯이 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눈을 감자마자 잠이 몰려들었다.

“르네, 르네. 도착했어요.”

나는 아멜리아의 부름에 힘겹게 눈을 떴다. 흔들리던 마차는 멈춰 있었고 바깥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가득했다.

에드윈은 도착하자마자 내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잘 자던데요. 혹시 그간 잠을 잘 못 잤어요?”

“그런 건 아닌데…….”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어 어색하게 얼굴을 긁었다.

“밤이 늦었지만 그래도 멋져요. 르네도 내려서 한번 봐요.”

아멜리아가 손을 끌어 그녀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와.”

“그렇죠?”

“네. 정말 그렇네요.”

숲속에 자리한 저택이었다. 달이 하늘 가운데 떠 있었고 은은한 달빛이 저택을 비추고 있었다.

고아한 외형의 저택은 달빛을 받아 신비로운 분위기를 뽐냈다.

로에리안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지닌 곳이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결코 들인 정성은 적지 않아 보였다.

“편안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지?”

어느샌가 레이넌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긴장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저택을 바라봤다.

아멜리아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공작님도 에드윈 님만 할 땐 꽤 귀여웠는데요. 아이다운 면도 많았고. 지금의 에드윈 님처럼요.”

에드윈이 그랬듯 그에게도 이번 외출이 신나는 일이었던가.

“르네?”

“아, 네. 정말 멋진 곳이네요.”

“가지. 방은 내가 안내할 테니.”

레이넌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공작의 안내를 받다니.

괜히 긴장되어 뻣뻣하게 팔다리를 움직여 그를 따라 갔다.

우리는 짐을 내리고 이런저런 정비를 하느라 바쁜 사람들을 지나쳐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곳이 익숙한 듯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단정하고도 편안한 느낌이 가득한 실내를 보며 여기서 지낼 날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딘가요?”

“황제 폐하의 별장?”

“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레이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멈춰 나를 돌아봤다.

“수도에서 가까워서 여기로 정했지.”

“하긴, 하루 만에 오긴 했네요.”

“게다가 폐하도 거의 쓰지 않으시니 알려지지도 않아 휴가를 보내기에 최적의 장소기도 하지.”

“그래도 이렇게 마음대로 들어와도 될까요?”

“마음껏 쓰라고 하셨으니까. 그 얘기 듣고 여기 오는 건 처음이긴 하군.”

그 말에 안심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서 걷던 그는 어느새 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 방이야. 무슨 일이 있으면 크게 소리치도록 하고. 바로 옆이 내 방이니까.”

“무슨 일이요? 누가 또 죽이려고 달려들 수도 있는 건가요?”

놀라 그의 팔을 붙들고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레이넌은 그런 나를 보고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매번 그대는 이렇게까지 생각이 극단적으로 튀는 거지?”

그럴 가능성이 있으니까 말한 게 아니었던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는데 레이넌은 정작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아닌가요?”

“본디 황제 폐하께서 쓰시던 별장이니만큼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게다가 우리 쪽 기사들도 놀고 있진 않을 테니까.”

“……그렇죠?”

레이넌은 괜한 소리는 그만하자는 듯 문을 열어 주었다.

“피곤할 테니 푹 쉬도록 해.”

“네. 안녕히 주무세요.”

문을 닫기 전 건넨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저 인사였을 뿐인데 레이넌은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닫히려던 문을 다시 한 손으로 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레이넌의 한 발이 방 안에 놓였다.

레이넌이 상체를 천천히 기울이자 그만큼 얼굴이 가까워졌다.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서서히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어느 때보다 기쁘다는 듯 근사하게 걸린 레이넌의 미소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내 귓가까지 고개를 내린 레이넌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보다 숨결이 먼저 귓가에 닿았다가 다시 멀어졌다.

레이넌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들여놓았던 발을 바깥으로 뺐다.

곧 문이 닫혔고, 그의 얼굴이 사라지고서야 레이넌이 속삭였던 말이 뒤늦게 들려오는 듯했다.

“잘 자.”

아니, 무슨 잘 자라는 인사를 이렇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손으로 부채질을 해 열기를 식혀 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달, 달빛 때문이야.”

그래. 그럴 만했다. 예로부터 달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했으니…….

“아니, 뭐라는 거야.”

왜 이렇게 당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방에 남겨진 건 나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힘들어…….”

오는 내내 푹 잤음에도 순식간에 피곤이 몰려들었다. 침대까지의 거리가 로에리안저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만큼 멀게 느껴질 정도였다.

힘겨운 걸음을 옮겨 겨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잠에 다시 빠져드는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

“르네! 르네! 일어나!”

잔뜩 신이 난 에드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부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몸도 조금씩 흔들렸다.

“에드윈 님, 여성의 방에 이렇게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건 큰 실례라고요. 게다가 이렇게 이른 아침에.”

에드윈의 뒤쪽에서 아멜리아가 조곤조곤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거야?”

“그럼요. 여성은 아침부터 준비할 것이 많답니다.”

“나갈까?”

에드윈이 몸을 흔든 덕분에 잠에서 깨서 나는 침대에 앉아 있는 채였다. 그런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화에 빠져 있는 두 사람을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앗, 르네!”

무시한 게 아니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에드윈은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얼른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미안해! 정말 몰랐어!”

“아니에요. 에드윈 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정말?”

“그럼요. 어제는 푹 주무셨나요?”

“응.”

“정말요?”

“음……. 사실은 아니. 너무 두근두근해서 잠이 안 왔어.”

푹 잤다고 하는 에드윈의 얼굴에서 약간의 피곤함과 어제와 같은 설렘이 묻어나서 다시 물었더니 그는 솔직히 말했다.

“그런데 르네는 어제 그렇게 자고 어떻게 또 잘 잤어?”

“하하. 그러게요.”

“어제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먹을 걸 챙겨 왔는데 너무 곤히 자길래 안 깨웠어요. 에드윈 님도 함께 오셨었거든요.”

아멜리아의 말에 에드윈은 칭찬을 바라는 듯 어깨를 잔뜩 위로 올렸다.

“아, 고마워요.”

“그러니까 아침 식사하러 가자!”

칭찬을 바랐던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에드윈은 이렇게 이른 시간인데도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아니,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써서 입은 듯했다. 그렇게나 좋을까.

작게 웃으며 그의 옷을 칭찬하려는데 아멜리아가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 두 분과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공작님께서요?”

그래서 에드윈이 저렇게 신이 난 걸까. 에드윈을 바라보자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가죠, 에드윈 님.”

에드윈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던 나는 재빨리 침대를 박차고 일어섰다.

“르네, 지금 그 차림으로 갈 생각은 아니죠?”

그럴 생각이었다. 에드윈의 옷이 멋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정작 내 옷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아차, 하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듯 아멜리아는 웃으며 에드윈의 손을 잡았다.

“나가서 기다릴까요, 에드윈 님?”

“응.”

“얼른 준비할게요!”

허둥지둥 움직인 탓인지 오히려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려 버렸다. 부지런히 다이닝 룸으로 가니 레이넌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넌은 휴가라는 말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는 편안한 차림으로 나와 에드윈을 맞았다. 오히려 가장 격식을 갖춘 건 에드윈이었다.

에드윈은 다이닝 룸에 가까워질수록 말수가 줄더니 끝내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꼭 잡은 손에 느껴지는 힘이 그의 긴장의 크기와 같이 느껴졌다.

맞잡은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놓아 그를 응원했지만 느끼지도 못하는 듯했다.

다행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식사는 이어졌다.

간간이 자연스러운 대화가 오가는 모습은 그간 꾸준히 가져 왔던 티타임에서 보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드윈도 같은 분위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엔 긴장은 모두 잊고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만나지.”

식사를 끝내고 레이넌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에드윈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맛있게 드셨어요?”

“응. 이제까지 먹은 것 중에서 제일 맛있었어.”

“다행이네요.”

에드윈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나…… 아버지랑 같이 식사한 거 오늘이 처음이야.”

“정말 가장 맛있는 식사였겠어요.”

“응.”

곧 에드윈은 체이스와 함께 신나서 제 방으로 떠났다.

“르네도 이제 준비하러 갈까요?”

“무슨 준비요?”

아멜리아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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