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오늘은 정말 여러모로 피곤하네요.”
방문에 기대어 중얼거리자 나를 따라 나온 아멜리아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은 오랜만이네요.”
“누가요?”
“공작님과 에드윈 님이요. 특히 공작님이요.”
“그런가요?”
나오기 직전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았나.
“공작님도 에드윈 님만 할 땐 꽤 귀여웠는데요. 아이다운 면도 많았고. 지금의 에드윈 님처럼요.”
“에드윈 님 같은 모습의 공작님이라니, 상상이 잘 안 가네요.”
“그렇죠?”
아멜리아와 마주 보고 웃던 중에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얼굴을 굳힌 채 가만히 있자 아멜리아는 의아한 듯 나를 불렀다.
“르네?”
“저기, 아멜리아?”
“네?”
“아멜리아는 그맘때의 공작님을 알고 계세요?”
“그럼요.”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거예요?”
“음……. 공작님이 태어났을 무렵일까요?”
눈을 굴리며 시기를 짐작해 보던 아멜리아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멜리아의 나이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기껏해야 레이넌과 비슷한 또래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얼른 얼굴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실례를 범했구나, 생각한 순간 아멜리아는 미소를 보였다.
“괜찮아요. 처음엔 다들 그런 반응이니까요.”
“그, 그렇군요. 소꿉친구 느낌일까요?”
“그럴까요?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공작님의 승마도, 검술도 모두 제가 가르쳐 드렸으니까.”
천천히 벌어진 입은 쉽게 다물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이가 많을지도.
아니, 그러기엔 아멜리아가 여러모로 너무 젊어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로 충격에 빠진 나를 보고 아멜리아는 꽤 즐거운 듯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역시 르네는 재미있어요. 르네가 와서 참 다행이에요.”
“다행이라니요?”
“에드윈 님도 많이 밝아지셨고, 공작님도 전보단 많이 누그러들었으니까요. 늘 날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런가요.”
에드윈은 그렇다고 쳐도, 레이넌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넌의 변화를 느낄 정도로 긴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줄도 몰랐고.”
“네?”
나직하게 한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내 질문에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내게 물었다.
“아니에요. 둘 사이도 훨씬 좋아진 것 같죠?”
두 사람이 마주하는 모습을 처음 봤던 때를 떠올렸다. 어색한 공기는 물론 에드윈의 긴장은 지금도 내 손에 전해지는 것만 같았었다.
아직도 어색한 모습은 조금 남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에드윈이 레이넌을 전처럼 많이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다행이에요.”
괜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진심이 담긴 내 말에 아멜리아는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정말 다행이에요.”
내 말에 긍정하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서는 나와 같은 감정이 묻어났다.
***
로에리안 부자가 뜻을 함께한 만큼 내 의견은 조용히 묻혔다.
나만 빼고 모두가 바랐던 것처럼 결국은 드레스부터 다시 쇼핑이 시작되었다.
“호호호. 이것도 참 잘 어울리시네요. 이건 어떠실까요?”의 굴레에 다시 빠져들고야 말았다. 덕분에 며칠간 꿈에서도 하이 톤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차라리 빨리 떠나 버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쇼핑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저택을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다행히 시간은 잘 흘러갔고 휴가를 떠나는 날도 다가왔다.
그렇게 공격적으로 물건을 사들인 것에 비해서 떠나는 인원은 소규모였다.
먼저 나와 있던 레이넌에게로 다가가자 그는 나를 앞뒤로 살폈다. 그러고는 내 옆에 서 있던 아멜리아까지 살핀 다음에 물었다.
“다른 짐은 어디에 있지?”
“이게 전부인데요.”
“가방이 몇 개 빠진 것 같은데.”
“나흘 정도라고 들었는데 이 정도로도 충분하죠.”
원래는 더 간소하게 떠날 예정이었다.
내가 짐 챙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이것도, 저것도 챙겨야 한다며 가방에 넣은 덕에 이렇게나 불어났다.
나중에 보니 내가 넣은 것도 아니고, 아멜리아가 말하지 않은 짐도 꽤 있었던 건 무슨 연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멜리아, 정말 이게 전부인가?”
“네. 원래는 반도 안 됐었다고요. 다 너무 잘 어울려서 더 챙기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데.”
아멜리아는 무척이나 진심이었다. 저 진심이 가득한 눈이 유독 무섭게 느껴져 그녀가 넣는 물건들을 강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더 무서운 건 지금 레이넌과 아멜리아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조용히 다가온 체이스가 내 가방을 가져간 덕에 두 사람의 시선은 다시 흩어졌다.
“르네! 얼른 와! 여기 좀 봐 봐!”
다시 마주치려던 두 사람의 시선을 분산한 건 에드윈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마차에 올라탔는지 문을 열고는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에드윈을 향해서 걸어가는 내 걸음은 평소보다 빨랐다.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심상치 않은 시선 교환의 끝에 다시 돌아가 짐을 싸게 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하지만 에드윈의 성에 차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얼른얼른!”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던 에드윈은 결국 마차에서 내려 뛰어왔다. 순식간에 다가온 에드윈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평소보다 강한 힘은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잘 알려 주었다. 흐뭇한 미소로 그의 안내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짠!”
“우와!”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터져 나온 감탄사였다. 왜 그렇게 에드윈이 신이 났는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애가 탔는지 이해가 됐다.
“엄청 멋있지?”
“네, 정말 그러네요.”
심플한 외관에 비해 내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저택의 축소판 같았다.
화려하지만 동시에 편안해 보이는 분위기에 절로 에드윈의 감정에 동화되었다.
“어서 와서 앉아 봐! 엄청 푹신푹신해!”
에드윈은 제가 준비한 것인 양 뿌듯한 얼굴로 손짓했다.
나는 에드윈의 옆자리에 앉았다. 호들갑이라고 생각했지만 에드윈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렇지?”
“정말 편하네요.”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아.”
널찍한 소파처럼 보일 정도의 좌석이었기에 에드윈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먼저 마차에 올랐던 에드윈은 신이 나서 내부 이곳저곳을 자랑했고 그와 함께 구경하고 있으니 아멜리아가 마차에 올라탔다.
“벌써 이렇게 즐거워하시는 걸 보니 유쾌한 여행이 될 것 같네요.”
“그러게요. 그런데 아멜리아.”
“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오늘은 복장이 다른 날과 다르네요?”
“아, 이거요? 잘 어울리죠?”
“네. 굉장히 잘 어울리긴 하는데, 꼭 기사 같아요.”
기사 같다고 했지만 누가 봐도 기사 복장이었다. 복식에 어두운 나조차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내 경우는 복장이 아니라 허리에 찬 검 때문에 알아본 것이긴 했다.
“어? 르네는 몰랐어?”
의아한 내 물음에 오히려 에드윈이 놀란 듯 되물었다.
“뭘요?”
“아멜리아는 기사잖아.”
“네?”
그러고 보니 아멜리아가 뭘 하는 사람이냐 묻긴 했지만 듣지는 못했던가.
아니, 그래도 기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직업이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그때는 그냥 웃고 넘어갔던 것 같은데요.”
“그랬구나. 기사였는데, 은퇴한 지 좀 됐어요. 나이가 나이니만큼.”
“……나이.”
이 역시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을 듯했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잘 갖춰 봤어요.”
“멋지세요.”
“고마워요.”
그래서 승마를 잘했던 걸까. 승마를 그렇게 잘하면 검은 얼마나 잘 쓸까.
문득 궁금증이 일었지만, 다시 묻어 두었다. 그녀의 검술을 보는 일이 있다는 건 어쨌거나 위험이 닥쳤다는 뜻일 테니까.
“출발합니다!”
바깥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체이스는 같이 안 가나요?”
조금 전 그의 모습을 봤던 터라 당연히 함께 가는 줄 알았는데, 그는 마차에 타지 않았다.
“체이스는 마차를 몰고 있어.”
“마차를요?”
“응.”
체이스의 원래 직업은 마부였던 걸까. 아멜리아라면 모를까 체이스가 뜬금없이 마차를 몬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르네…… 그러면 이것도 몰라?”
“네.”
뭔지 모르지만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묻지도 않고 긍정의 대답을 하는 나를 보고 아멜리아는 웃었고 에드윈은 조금 당황했다.
“아직 안 물어 봤는데?”
“아니, 에드윈 님이 뭘 말씀하셔도 저는 모르는 이야기일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아무튼, 체이스도 원래는 기사였어.”
“체이스도요? 정원사보단 잘 어울리긴 하네요.”
나도 모르게 말을 꺼내고선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직업에 더 잘 어울리느냐가 아니었다. 이런 때에도 쓸데없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다니.
“아, 그게 아니고…… 기사요?”
“원래 내 밑에 있었죠.”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윈의 말에 동조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섬세해서 단체 생활 같은 게 잘 안 맞았나 봐요. 재능은 있었는데 아까울 따름이에요.”
아멜리아는 인재를 놓쳤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저 정도면 정말 꽤 능력이 있는 기사였을 터였다.
“아, 저는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네요.”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에드윈이 얼른 내 팔을 붙들었다.
“체이스가 그만두고 다들 기사 이야기는 안 해서 그래.”
“그럼 체이스가 쳐다보면 사람들이 움찔거렸던 것도 그래서였을까요?”
내 질문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어떤 직업을 가졌든 비슷했을 거야. 꽤 험악한 인상이니까.”
“그래도 체이스는 좋은 사람인걸.”
“그럼요. 그건 저도, 르네도 알고 있어요.”
아멜리아의 말에 에드윈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예상치 못한 정보를 한꺼번에 얻은 탓에 머리가 멍했다. 두 사람 모두 기사였다니.
체이스가 한동안 나와 함께 다녔던 건 그런 이력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아멜리아가 말했듯 그의 인상이 가장 큰 몫을 차지했을 거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체이스가 보일 리 없었지만 시선이 문득 창밖으로 향했다.
새삼 그가 다시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부석에 앉아 있는 그를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움직이는 배경 속에서 마차와 같은 속도를 유지하고 있는 레이넌이었다.
말 위에서도 곧은 자세를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은 우아해 보였다. 승마를 저렇게 우아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레이넌 덕분에 승마는 우아한 운동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같이 말을 타긴 했지만 그가 말을 타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 사람 앞에 내가 탔다고?’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보고 있기라도 한 듯 때맞춰 고개를 돌린 레이넌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