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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44)화 (44/129)

로만과 마주친 이후 와 닿는 시선은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뭔가 단단히 밉보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긴 하네요.”

나는 침실로 돌아온 후 지친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 그건…….”

내 말에 아멜리아는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이제 친한 척 팔짱 끼고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줄어들지도 모르겠어요.”

진심으로 기쁜 마음을 담아 말했더니 아멜리아는 잠시 눈만 깜빡였다.

그러더니 곧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잘 웃고는 했지만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라 얼떨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아멜리아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바깥을 조금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겠네요.”

“와, 좀 살 만하겠는데요.”

마음을 담아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아멜리아는 그 말에 겨우 멈췄던 웃음을 다시 터트렸다.

곧 웃음을 멈춘 아멜리아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물었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죠?”

“아, 네.”

“오늘은 꼭 푹 자도록 해요. 내일부터 휴가 준비를 시작할 테니까.”

“따로 할 만한 게 있을까요? 그냥 간단하게 짐만 챙기면 될 것 같은데.”

단단히 각오를 다져야 할 것만 같은 아멜리아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지금 알려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죠. 간단하게 짐만 챙기면 되는 일이죠. 그래도 푹 자 두는 게 좋을 거예요.”

***

“휴가 준비라고 했잖아요?”

“네. 준비하는 거예요.”

“간단하게 짐만 챙기면 된다고도 했잖아요.”

“간단하게 짐을 챙기려면 먼저 짐이 있어야겠죠?”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에 지친 지 오래였다. 심지어 아직 끝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래서 이렇게나 많이 샀다고요?”

“그럼요.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나는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넓은 방을 가득 채운 드레스와 장신구로 눈이 어지러웠다.

“호호호, 하는 웃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돌아요. 잘 때도 들릴 것 같다고요.”

“아, 하긴. 꽃이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는 아무래도 휴가용이라기엔 과하긴 했죠?”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과한 건 그 드레스만이 아니었어요.”

“그랬나요? 그래도 다행히 예쁜 드레스들이 많았어요.”

아멜리아는 너그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고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내 귀를 아프게 했던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렸던 걸까.

아멜리아의 관심은 온통 나에게 어울리는 물건을 찾는 것뿐인 듯했다.

일단 이렇게나 많이 샀으니 그만할 법도 한데 여전히 아멜리아는 의욕이 넘쳤다. 제발 봐달라는 듯 지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그래도 아직 모자도 못 샀고, 구두도 없잖아요.”

“아침부터 지금까지 높은 톤의 목소리만 들어서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요.”

“하긴, 귀가 피곤한 톤이었죠.”

“그러니까 나머지는…….”

“공작님이 오셨네요.”

아멜리아는 끝내 내 간절한 부탁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잡한 방으로 들어서는 레이넌의 모습이 보였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아 보이는데?”

“네?”

“그럼요.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이 올 예정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놀란 나의 물음은 두 사람 중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시녀도 필요하겠군.”

“시녀…… 말이군요.”

누가 시녀로 오더라도 불편할 것 같았지만 딱히 말하진 않았다. 어차피 방까지 옮긴 마당에 시녀가 없는 편이 어색해 보일지도 몰랐으니까.

“혹시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해 두도록 해. 휴가 다녀와서 바로 정하지.”

“네, 그렇게 할게요. 그보다 이제 물건들은 그만 샀으면 하는데요.”

“왜?”

“이미 너무 많기도 하고요.”

“마음에 들지 않나?”

레이넌은 내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대답을 바로 내어놓았다.

사실은 그랬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뿐이라 오히려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하나만 하더라도 꽤 큰 돈이 들었을 텐데 차마 그렇다고 대답은 하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솔직히 말해도 돼. 그대의 마음에 들어야지. 전부 르네의 것이니.”

“음……. 솔직히 제 취향과는 많이 다르긴 하네요.”

내 대답에 레이넌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슬쩍 올렸다. 그러고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르네의 취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 그게…… 원래 옷장에 있던 옷들이 모두…….”

“아, 그 드레스들.”

아멜리아가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레이넌도 본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린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었고, 입을 생각도 없었지만 내 옷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드레스들이 떠올랐다.

“아니, 그건 제 것이 아니라서요.”

“응? 왜 그대의 것도 아닌데 옷장에 두었지? 누구 거길래?”

“아…….”

일단 급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그 이후에 할 말을 생각해 두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잠시, 잠시 맡아 두고 있는 것뿐이에요. 친구가 부탁해서.”

“그래? 그럼…….”

레이넌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턱을 쓸었다.

믿을까? 허술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럴싸했다고 생각했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그의 입을 지켜봤다.

“르네의 취향에 맞춰 모두 다 다시 사지.”

“네?”

아니, 믿어 주는 건 고맙지만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죠?

넓은 방이 좁아 보일 정도로 이미 꽉 들어찬 짐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더 산다니. 무엇보다 그럼 이미 산 것들은 어쩐다는 뜻이지?

“그럼 저것들은…….”

“치우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레이넌은 망설임 없이 아멜리아에게 명했다. 아멜리아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바로 몸을 움직였고 나는 그녀를 붙들었다.

“아니, 그냥 이 정도도 충분한데요. 취향에 안 맞긴 하지만 예쁘니까 입어도 괜찮아요!”

“취향과 매우 다르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그런 걸 입게 할 수는 없지.”

“아니! 말씀드렸듯이 다 예쁘니까 입을 수 있어요! 저렇게 예쁜데 취향 정도는 잊을 수 있지 않을까요?”

미안함도, 당황스러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간절하게 그를 설득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전 내내 했던 그 짓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알 수 없는 말들이나 칭찬을 듣는 것도 기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래? 그래도 기왕이면 마음에 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선뜻 그러라고 할 줄 알았던 레이넌은 뜻밖에도 새로 모두 사자는 뜻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옆에 있던 아멜리아까지 한마디씩 거드는 바람에 그를 설득하느라 꽤 힘겨웠다.

“그래. 그대가 그렇다면…….”

“네. 충분합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대화는 다행히 레이넌이 생각을 접으며 끝나는 듯했다.

“그래도 역시 취향에 맞는 걸 조금이라도 사는 게 낫지 않나? 다행히 아직 많이 사지 않았으니.”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었던가.

레이넌은 못내 아쉬운 듯 방에 걸려 있는 드레스들을 둘러보고는 슬쩍 한 번 더 권했다.

“이미 많은 것 같은데요. 정말 괜찮아요.”

“그래?”

단호한 내 대답에 레이넌은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지만 더는 권하지 않았다.

겨우 끝이로구나 싶어 깊은 한숨을 내쉰 그 순간, 방에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르네!”

“에드윈 님!”

언제나처럼 활발하게 들어온 에드윈은 곧 레이넌을 발견하고는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도 와 계셨네요.”

“그래.”

“그런데 이게 전부 뭐예요? 와, 다 르네 거야? 엄청 잘 어울리겠다!”

에드윈은 드레스를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보고는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해요.”

“입은 것도 보고 싶은데……. 언제 볼 수 있나요?”

“글쎄. 저건 사고 보니 모두 르네의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고민이군.”

이야기는 끝났잖아요?

조금 전 그렇게 길었던 대화는 전혀 없었던 일인 양 레이넌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공작님, 그 이야기는…….”

“그건 큰일이네요.”

얼른 레이넌을 말려 보려고 했지만 내 말은 끝맺을 수 없었다. 레이넌과 비슷한 얼굴로 에드윈이 심각하게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역시.”

“네. 르네가 좋아할 만한 걸로 입으면 더 예쁠 것 같아요.”

“두 분 다 제 취향을 모르시잖아요.”

“그래도 르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 예쁠 것 같아!”

에드윈은 내 심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레이넌에게 그랬듯 설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레이넌을 바라보자 그의 눈이 슬쩍 반짝였다.

“기왕 사는 거 그 편이 나을 것 같지 않나.”

“그럼요!”

주먹까지 불끈 쥐고 대답하는 에드윈을 보고는 레이넌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내 내 취향은 어떤 것인가에서 시작해서 결국은 그들의 취향에 맞춘 드레스를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어느샌가 두 사람은 대화에 푹 빠져 나를 잊은 듯했다. 내가 방을 빠져나가도 모를 정도로.

***

르네가 방을 떠나자마자 한참 이어지던 레이넌과 에드윈의 대화는 갑자기 끊겼다.

에드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고, 레이넌은 그런 그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무거워지려던 침묵은 생각보다 금방 깨어졌다.

“잘했다.”

에드윈의 머리에 손을 가볍게 얹으며 레이넌이 말했다. 에드윈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있다가 작게 미소 지었다.

에드윈이 고개를 들었을 땐 레이넌은 어느새 방문 앞까지 움직인 채였다.

“아버지.”

문고리를 잡으려는 때 들려온 부름에 레이넌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에드윈은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레이넌에게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레이넌은 에드윈을 재촉하지 않았다.

짧은 망설임 끝에 에드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같이 휴가를 갈 수 있어서 기뻐요.”

조금은 수줍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에드윈은 끝내 고개를 숙였다.

그를 지켜보던 레이넌은 다시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레이넌의 기척에 에드윈의 얼굴엔 작은 실망감이 떠올랐다.

“나도 기쁘구나.”

평소처럼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전과는 달랐다.

잠시 얼떨떨하게 레이넌의 말을 곱씹어 보던 에드윈은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네!”

힘찬 에드윈의 대답에는 웃음이 담겨 있었다. 레이넌은 그런 에드윈의 대답을 듣고서야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을 닫은 레이넌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누구도 본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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