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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43)화 (43/129)

확실한 건 아멜리아 역시 꽤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르네랑 꽤 잘 지낸다지.”

“네. 너무도 사랑스러운 분이세요.”

자연스러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로만을 제외하고는 레이넌과 저렇게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처음 봤다.

그러고 보니 무슨 일을 하는지 듣지 못했구나.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아멜리아의 호감을 얻어낼 줄 몰랐군. 제법이야.”

“네?”

아멜리아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느라 레이넌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자 레이넌은 조금 전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제법이라고.”

“제가요?”

“그래. 아멜리아가 이렇게 칭찬하는 일도 드물거든.”

“그래요?”

의아한 눈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봤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멜리아는 늘 너그럽고 따뜻하고 또한 유쾌한 사람이었다.

내 시선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렸는지 레이넌은 조금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얼마나 칭찬에 후한데요. 그렇죠, 르네?”

“네. 정말 아멜리아는 최고예요.”

“보세요.”

아멜리아는 턱을 들어 보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레이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나에게 말했다.

“저렇게 보여도 꽤 까다로운 성미인데 눈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그래도 무서운 여자니까 조심하도록 해.”

무서운 여자라니. 아멜리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아니에요. 르네가 저를 좋아하는 게 질투가 나서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질투라니. 하지만 레이넌은 그녀의 말을 정정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지.”

“벌써 가시게요?”

아멜리아의 물음에 레이넌은 걸음을 옮겼다.

“지금쯤 로만은 울고 있거나 누군가에게 화풀이 중일지도 모르겠군.”

웃음기 가득한 말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이러니저러니 로만을 잔뜩 놀려 놓고서는 결국 일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바쁜 사람은 보내고 우리끼리 재밌게 놀죠.”

“네.”

그 후로도 오래 이어진 아멜리아와의 대화 덕분에 여러모로 복잡했던 마음은 까맣게 잊혔다.

***

결국 숨어들었던 침입자는 찾지 못하고 찝찝한 소동으로 남았다.

찝찝하다는 건 오직 나나 몇몇 사용인들의 입장이었다. 레이넌이나 로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방을 옮기고서는 에드윈보다 레이넌을 만나는 일이 훨씬 잦았다.

레이넌은 틈만 나면 방을 드나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 머물다 가기도 하고 정원으로 나를 이끌기도 했다.

덕분에 그와 함께하지 않는 순간에는 나는 내내 방에서만 지냈다.

방을 벗어나는 순간 전보다 훨씬 더 피곤한 일이 일어나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옆방에서 지내는 아멜리아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체이스보다 오히려 그녀를 보고 멈칫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순식간에 밀려드는 시선과 사람들의 아부 섞인 말들에 정신이 없어 금세 다시 방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런 생활을 며칠 하다 보니 레이넌은 일부러라도 나를 자꾸 바깥으로 이끌었다. 아무래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르네!”

“에드윈 님!”

덕분에 에드윈이 이렇게 나를 찾아오는 일도 늘었다.

반갑게 손을 마주 잡고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웃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매일 보는데 꼭 몇 년은 못 본 사람들 같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죠, 저희가.”

“그런가.”

이 모습을 매일 바라보는 아멜리아와 체이스의 대화를 듣고서야 에드윈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제가 가야 하는데 매번 이렇게 에드윈 님을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응? 아니야. 르네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 엄청 두근거려!”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힘차게 이야기하는 에드윈을 지켜보던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어쩌면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실까!”

그렇게 끝나려던 상봉의 순간은 평소보다 더 길어졌다.

“이제 그만하시고 두 분 다 앉으세요.”

아멜리아의 부름이 들려오고서야 에드윈과 겨우 떨어졌다. 에드윈은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는 소파에 앉았다.

“아, 에드윈 님! 전해 드릴 소식이 있어요.”

그간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에드윈이 들으면 분명 좋아할 일이.

“응? 소식?”

“공작님이랑 휴가를 가기로 했는데요. 에드윈 님도 함께 가실 거예요. 어떠세요?”

“휴가? 어디로?”

에드윈의 질문에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어디라고 해도 알 리가 없었다.

“글쎄요. 그래도 로에리안저를 벗어나는 것만큼은 확실하니까요.”

“정말?”

“네! 에드윈 님이랑 함께 간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기대가 되는걸요.”

분명 방방 뛰며 엄청나게 기뻐할 줄 알았건만 에드윈은 뜻밖에도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에드윈 님?”

“응?”

“별로 가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그게 아니라……. 정말 나도 같이 가는 거야?”

기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요. 공작님께서 말씀하셨는걸요. 에드윈 님께도 꼭 알려 주라고요.”

“……정말?”

“네.”

레이넌이 말했다고 하니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는 듯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저는 에드윈 님이랑 함께 갈 생각을 하니까 엄청 설레요!”

“나도, 나도!”

잠시 감정을 참아 보려던 에드윈은 내 말에 끝내 참지 못하고 기쁜 마음을 터트렸다.

얼굴에 가득 들어찬 미소를 보니 내 얼굴에도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에드윈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뭘 준비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나는 물론 아멜리아와 체이스 역시 그런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에 빠져 있던 에드윈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내 곁에 붙어 앉더니 나만 들리게 속삭였다.

“나 사실…… 공작저를 나가는 게 처음이야.”

“정말요? 저도 그래요, 에드윈 님.”

“본관도 잘 모르는 곳이 많은걸.”

“본관이 워낙 넓긴 하죠.”

“그래서 나 너무 기대돼.”

한참을 둘이서 조용히 귓속말을 주고받자 아멜리아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비밀 이야기를 둘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저도 좀 알려 주세요.”

“음……. 안 돼. 비밀이야.”

“아!”

아멜리아와 에드윈의 농담 섞인 대화를 듣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에드윈 님, 우리 오늘 본관 탐험을 해 볼까요?”

“본관 탐험?”

“네. 저도 생각하고 보니 본관에 안 가 본 곳이 많네요.”

“아앗, 르네!”

내 말에 에드윈은 다급하게 내 입을 막았다. 아멜리아는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고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중얼거렸다.

“아아, 그런 이야기를 나누셨구나.”

“비밀이었는데…….”

평소 나와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에드윈은 아멜리아가 알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실망이 큰 듯했다.

풀 죽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에드윈을 향해 미소와 함께 사과를 건넸다.

“아, 죄송해요. 그렇지만 에드윈 님이랑 본관 탐험을 하면 너무 재밌겠다는 생각에 그만…….”

잠시 어깨를 늘어트렸던 에드윈은 곧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근데 정말 재미있을 거 같아요.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아멜리아의 신이 난 목소리가 에드윈의 흥을 돋운 모양이었다. 비밀이 알려졌다고 실망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응. 우리 다 같이 가자. 체이스도 같이 가.”

에드윈이 움직이니 체이스도 당연히 따라갈 터였다. 그렇지만 에드윈은 아주 상냥하게 체이스까지 초대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가시죠.”

행동력이 빠른 아멜리아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그녀를 따라 방을 나서려는데 스커트를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저기 르네…….”

“네, 에드윈 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에드윈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게 힘을 실어 줄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간 쌓아 온 시간이 있으니까.

나는 에드윈이 정리해서 이야기를 할 때까지 차분히 그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손잡고 걸어도 돼?”

에드윈은 겨우 입을 열었나 싶더니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전에는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혹시 거절당하지 않을지 겁을 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쑥스러운 듯 보였다.

“그럼요.”

“정말?”

환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걸고 에드윈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에드윈은 잠시 내 손을 내려다보더니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나 역시 에드윈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우와! 여기에서 음식을 만드는구나. 엄청 넓다!”

“에드윈 님, 여기는 위험한 물건이 많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주방에서 일하던 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에드윈의 모습에 당황했다.

잠깐 둘러만 보고 갈 거라는 아멜리아의 말에 다들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자꾸 이쪽을 힐끔거렸다.

“르네 손을 잡고 있으니 괜찮아.”

“……네.”

에드윈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건넸던 사용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이렇게 주방 안쪽까지 들어와 본 건 처음이네요. 엄청 넓고 굉장히…….”

“신기한 게 많아.”

적절한 말을 찾는데 에드윈이 대신 찾아 줬다.

“정말 그러네요.”

“그럼 다음은 어디로 가 볼까?”

“본관에 연회장도 있는데, 한번 가 보실래요?”

“연회장?”

“연회장이요?”

아멜리아의 제안에 나와 에드윈이 동시에 되물었다.

“네. 뭐, 한동안 사용한 적은 없지만. 그러니 우리라도 한번 가 보죠.”

“응, 좋아. 르네는?”

“저도 좋아요.”

아멜리아의 제안으로 여러 곳을 다녔지만 그 장소들은 모두 어쩐 일인지 한참 떨어진 곳이라 구경보다 걷는 시간이 길었다.

“이제 다리가 아파.”

에드윈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많이 걷긴 했죠. 나머지는 다음에 다시 구경할까요?”

“응. 그게 좋겠어.”

그렇게 몇 군데 둘러보지 못하고 다시 각자의 침실로 향하던 길이었다. 손에 서류를 잔뜩 들고 바삐 걷던 로만과 마주쳤다.

“로만!”

에드윈은 로만을 발견하자 손을 힘껏 흔들며 그를 불렀다. 로만은 잠시 못 본 척 가던 길을 갈까 고민하는 듯했지만 곧 이쪽으로 걸어왔다.

에드윈이 내 손을 놓고 그에게 뛰어갈 듯이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아니, 물론 에드윈이 있으니 로만이라면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겠지만.

“에드윈 님.”

“우리 오늘 본관 탐험을 했어!”

“네. 그러신 것 같네요.”

“응? 로만도 알고 있었어?”

“네. 이미 소문이 쫙 퍼졌으니까요.”

“소문?”

에드윈의 질문에 로만은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내게 다가와서 조용히 말했다.

“도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벌써 내 귀에까지 들어온 거야?”

“뭐가 들어왔는데요?”

“벌써 공작 부인이라도 된 것처럼 저택을 시찰 중이시라던데?”

“네?”

뜬금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시찰이라니.

“로만 님.”

그때 바로 내 뒤에 서 있던 아멜리아가 조금은 낮은 목소리로 로만을 불렀다.

“아니, 이 정도 말도 못 해? 걱정돼서 그런 건데…….”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로만은 변명하듯 말했다.

“오늘따라 유독 노려보는 것 같더라니, 그래서였나 보네요.”

나는 다른 날보다 더욱더 따갑게 다가오던 눈빛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냥 깨달음을 말했을 뿐인데 아멜리아는 내 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신경 쓸 것 없어요.”

“아, 네. 그럼요.”

아멜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소와 같은 내 모습에 안도한 듯 손을 떼고는 로만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희는 바빠서 이만 먼저 갑니다.”

“이쪽이 더 바쁘다고.”

투덜거리는 로만의 목소리는 조금씩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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