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악독한 시어머니 역할을 해야 합니까?”
“굳이 바꿀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잘해 준다고 해도 바뀔 편견은 아닐 것 같은데.”
“에드윈 님을 핍박한다는 편견도 아직 지우지 못했는데…….”
비통하게 읊조리는 로만의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넌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남들 눈을 신경 쓰는 편이었나? 뭐라 떠들든 상관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 오히려 그런 편견을 즐기지 않았던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에드윈 님에 대해서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억울한 감이 있습니다.”
“음.”
“걷지도 못하던 아기 때부터 온 마음을 쏟아 모셔 왔는데요.”
“그래. 네가 에드윈을 잘 챙기긴 했지. 그럼 르네는?”
“네?”
“에드윈과 관련된 편견이 있는 게 싫은 건 알겠지만 르네에 관한 편견은 상관없지 않나. 르네야말로 네게 아무래도 좋은 존재 아니던가.”
“르네도 제가 처음부터 얼마나 챙겼는…….”
조금씩 차가워지는 레이넌의 얼굴을 알아챈 로만의 목소리가 중간에서 뚝 끊겼다.
“물론 에드윈 님께 쏟은 정성에 비하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정도이지요.”
“작고 보잘것없다…….”
얼른 제 말을 주워 담아 봤지만 그게 오히려 레이넌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그만큼 주변의 공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르네의 존재가 그렇다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한마디 덧붙이려던 로만은 끝내 입을 닫았다. 이럴 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박하는 대신 로만은 성의를 담아 환한 미소를 보였다.
레이넌이 뭔가 말하기 전까지는 버텨야 하는데 오늘따라 유독 피곤한 일이 많아서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입꼬리가 떨려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만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레이넌은 흔들림 없이 로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버티고 버티던 로만의 입가와 눈가가 한꺼번에 파르르 떨리자 그제야 레이넌은 미소를 거두었다.
‘차라리 저 표정이 낫지.’
무표정으로 돌아온 레이넌을 보고 로만은 안도했다.
“르네는?”
“지금쯤 새로운 방에 있겠죠. 준비는 미리 마쳐 놓은 덕에 갑자기 들어갔지만 불편한 점은 없을 겁니다.”
“슈나이더 덕분에 자연스럽게 옮길 수 있게 됐군.”
레이넌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로만은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부족한 점이 없는지 확인은 해 봐야지. 그럼 휴가 준비도 서두르도록.”
산뜻하게 집무실을 나서는 레이넌과 달리 로만은 어둡기 그지없는 얼굴로 집무실에 남겨졌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기분이 좋으신 거야.”
저 정도로 레이넌의 기분이 좋은 건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보통 레이넌의 기분이 좋으면 로만도 하루가 편했는데…….
“르네랑 관련된 일은 도대체 어떻게 튈지 알 수가 없군, 알 수가 없어.”
로만은 슬프게 중얼거리며 다시 레이넌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
“여기는……?”
레이넌이 지내는 곳의 옆방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들어와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에드윈의 침실보다 크고 화려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여기를 혼자 쓰라는 건 아니겠지?
“본디 공작 부인께서 쓰셔야 할 방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당분간 르네 님이 사용하실 겁니다.”
여기까지 나를 인도한 캐서린은 평소처럼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전에 없던 공손함이 담겨 있었다.
“저기…… 캐서린 님?”
“네. 말씀하십시오.”
“왜 저한테 존댓말을 하시는 건가요?”
“왜 이 방을 쓰시는 거냐고 질문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그것도 궁금하지만……. 존댓말이 훨씬 더 신경이 쓰여서요.”
“이렇게 넓은 공작저에 비어 있는 방이 하나도 없을까요?”
“아주 많겠죠.”
“그런데 공작님께서 이 방을 내어주셨다는 것 자체가 르네 님의 위치가 전과는 다르다는 의미겠지요.”
“그래도…….”
“제게 말을 높이는 것도 조만간 그만두셔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공작님의 말씀이 있고 난 다음이겠지만.”
분명히 예의 바른 존댓말을 듣고 있는데 어쩐지 혼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캐서린의 밑에서 지내 왔는데 순식간에 입장이 바뀐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정신없으셨을 테니 일단은 조금 쉬시지요.”
캐서린은 공손히 인사까지 하고서야 방을 떠났다.
“하아…….”
그녀가 자리를 떠난 것만으로도 훨씬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친 정신은 금세 회복이 되지는 않았다.
일단 조금 눕고 싶은 마음에 힘이 풀린 몸을 힘들게 옮겼지만 정작 침대를 앞두고는 한참을 망설였다.
저택의 분위기와 참으로 닮아 있는 방이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잘 어우러졌다.
로에리안저에서 지내면서 익숙해진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가 지내야 하는 방이라고 생각하니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낯설고 어색했다. 그간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느라 두려웠고, 정신이 없어서 이런 느낌은 르네가 된 이후로는 처음인 듯했다.
하긴, 여전히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다만 전과 달리 공황에 빠지지 않았던 건…….
“아니, 일단은 좀 쉬자.”
조금 전까지 망설였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침대에 몸을 묻었다. 몸이 녹을 정도로 편안한 감촉에 괜히 망설였다는 늦은 후회가 생겨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오래가지 않았다.
새삼 혼자 남겨진 시간이 생경하고 외롭게 느껴진 탓이었다.
늘 일하느라 바빴고, 에드윈을 만나고서는 매일 재잘대는 그가 곁에 있었고, 또 여러모로 정신없는 하루들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을 갑작스럽게 맞닥뜨리니 오히려 이상하게 다가왔다.
에드윈에게 가 볼까. 지금쯤이면 종이접기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체이스의 종이접기 실력은 기대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나름대로 상상을 뛰어넘는 결과물이 있을지도 모르니 구경을 가 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느릿하게 침대에 누웠던 것과는 달리 일어나는 몸놀림은 재빨랐다.
방을 나서고 바삐 걸음을 옮기려는데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
뒤에서 목소리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반가운 감정을 담아 뒤로 돌았다.
“아멜리아?”
“방을 옮겼다더니 역시 여기인가 보네요.”
아멜리아는 방금 내가 나온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그렇게 됐네요.”
“그런데 지금 어디 가요?”
“에드윈 님께 가 볼까 해서요.”
“그래요? 마침 맛있는 쿠키가 있어서 같이 먹을까 해서 왔는데…….”
아멜리아는 조금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저랑요?”
“네. 심심할 것 같아서 같이 좀 이야기도 나누면 좋겠다 싶기도 했고요.”
심심한 건 맞는데 아멜리아가 어떻게 알았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자 아멜리아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대답을 내어주었다.
“오늘은 다들 엄청 바쁘고 정신없잖아요. 이런 날 일 안 하는 사람은 굉장히 심심한 법이랍니다.”
“맞는 말이네요. 그런데 아멜리아는 공작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내 질문에 아멜리아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곧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묻는 거예요, 그걸?”
“그러게요.”
사실 아멜리아가 하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마구간지기나 승마 선생님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걸 듣고 있다 보니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게다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시녀들이 입는 것과는 달랐다. 얼핏 봐도 제법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승마복 입은 모습만 봤는데 이 차림도 굉장히 잘 어울리시네요. 엄청 예뻐요.”
진심 섞인 내 칭찬을 들은 아멜리아는 기쁘다는 듯 웃었다.
“고마워요. 그럼 저랑 놀아 주실래요?”
“저야 좋죠.”
그렇게 에드윈에게 가려던 발걸음은 조금 전 빠져나왔던 방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아멜리아는 자연스럽게 쿠키를 꺼내 들고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와, 방이 정말 좋네요.”
“그러게요.”
시무룩한 내 대답을 들은 아멜리아는 뭐가 재밌는지 소리를 내어 웃고는 말했다.
“이렇게 좋은 방을 쓰는 건 르네인데 왜 그렇게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해요?”
“다른 사람의 일같이 느껴지네요.”
“하긴 갑자기 이 정도로 화려한 방을 내어주고 쓰라고 해도 당황스럽긴 하겠죠.”
“네. 그래요. 아마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요.”
언제나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아멜리아를 앞에 두고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내 마음속에 찝찝하게 남아 있는 부분을 콕 집어서 말해 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아멜리아에게 투정을 부리듯 한탄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는 아멜리아의 눈은 어쩐지 내가 에드윈을 보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한 것을 당연한 듯이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래요.”
“그게 더 불안하지 않나요?”
“르네야 욕심보다는 편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그럴지도요.”
아멜리아의 말에 순간 뜨끔했다. 그런 내 속이 보였던지 아멜리아는 말을 덧붙였다.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에요. 각자 추구하는 바는 다르니까요.”
“네.”
“그래도 르네.”
“네.”
“그렇게 자꾸 도망가려고만 하는 것도 좋지 않은 습관이에요.”
“네?”
알 듯 말 듯 한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까지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기가 막히게 알고 설명을 해 주던 그녀는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복잡해지려던 머릿속을 멈춘 건 노크 소리였다.
“네.”
작은 대답이었지만 목소리가 들렸던지 바로 문이 열렸다.
“공작님.”
“좀 둘러봤나?”
“네.”
“아멜리아도 와 있었군.”
“네. 심심한 사람들끼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답니다.”
레이넌은 방을 한 번 둘러본 뒤 내 옆자리에 앉았다. 마치 제 방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부족한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도록 해.”
“네.”
부족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차고 넘칠 정도였으니.
“조만간 휴가를 갈까 해.”
“휴가요?”
“그래. 간단히 간다고 해도 준비할 건 꽤 많으니 당장은 안 되겠지만.”
“휴가……. 얼마 전에 그런 일도 있었는데 괜찮을까요?”
“그건 그대와의 소문이 진짜인지 찔러 본 거니 괜찮아. 그러니까 더욱이 휴가를 가야지. 제대로 소문을 확인시켜 줄 좋은 기회겠군.”
공작저를 벗어나 어딘가로 간다니. 그것도 당당하게 나갈 수 있다니.
조금씩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계속 저택 내에서만 지내는 건 꽤 답답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레이넌의 말은 내 설렘을 최대치로 키웠다.
“에드윈도 함께 갈 테니 그대가 일러두도록 해.”
“에드윈 님도 함께 가나요?”
최고로 반가운 소식이 아닌가. 나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척 기뻐할 에드윈의 모습을 떠올리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레이넌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역시 그도 에드윈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기분이 좋은 걸까.
“그렇게 좋으세요?”
아멜리아의 질문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나와 레이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