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41)화 (41/129)

그때 눈에 들어온 캐서린의 얼굴에서는 복잡한 심경이 보였다.

그게 그리 좋은 쪽은 아닌 게 느껴져 그녀에게서도 결국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레이넌이 바랐던 대로 일은 잘 진행된 모양이었다.

잠깐이지만 저 불여우가 어떻게 레이넌을 꼬드겼길래 일이 이렇게 되고 있나, 하는 그녀의 의문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으니까.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캐서린은 곧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가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그녀가 나가고서야 몸에 힘이 좀 풀렸다. 꼿꼿이 세웠던 허리에 힘을 풀고 소파에 기댔다.

하지만 소파 등받이와 함께 레이넌의 팔이 느껴졌다. 어느샌가 내 등 뒤로 팔을 돌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팔이 닿자마자 다시 허리에 힘을 주어 곧은 자세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앞으로 이것보다 더 피곤해질까. 생각만 했는데도 더 큰 피곤함이 몰려왔다.

레이넌은 다 괜찮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

르네와의 티타임을 마친 레이넌은 집무실로 돌아왔다.

로만은 갑자기 떠맡은 대량의 업무에 항의라도 하듯 그의 책상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꽤 잘 어울리는군.”

레이넌은 그의 모습을 칭찬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공작님이시죠. 지금이라도 앉으셔서 남은 업무를…….”

“오늘은 일할 기분이 아니야. 사랑스러운 내 약혼녀가 걱정이 되어 말이지.”

“아직 약혼도 안 하셨지 않습니까.”

“곧 할 건데 뭐 어때.”

오늘 일어난 소동이 재밌었는지 레이넌은 다른 날보다 유독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 덕에 로만의 속만 타들어 갔지만 레이넌은 그조차 즐기는 것 같았다.

“재밌지 않나. 이제야 슬슬 보이는 게.”

“뭐가 보이십니까?”

혹시 새벽부터 내내 찾았던 침입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건가 싶었던 로만은 얼른 소파로 다가갔다.

어쩌면 내일까지 해야 하는 수많은 일 중 하나 정도는 금방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네 말대로 르네는 꽤 겁이 많은 모양이야.”

레이넌은 진지한 얼굴로 로만의 기대를 가볍게 짓밟았다.

“그걸 이제야……?”

저도 모르게 로만은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레이넌은 생각에 잠긴 탓에 그런 로만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그러게 말이야. 분명 예전과 같은 얼굴인데 다른 감정이 느껴지는 게 신기하군.”

자신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말에 순식간에 창백해지던 르네의 얼굴이 떠올랐다.

놀라 어쩔 줄 모르던 그 얼굴은 레이넌의 눈에도 익숙한 것이었다.

자신을 좋아해서 당황하는 것이라 여겼던 그 얼굴이 사실은 무서워했던 것이라니.

레이넌은 씁쓸한 얼굴로 제 착각을 인정했다.

“그나저나 새벽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러게. 그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 말이지.”

알 수 없는 인물이 저택 내를, 그것도 에드윈의 침실 근처를 서성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레이넌은 누구보다 빨리 그곳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에드윈은 별일이 없는 듯했지만 문제는 르네였다. 분명 잠들어 있어야 할 그녀가 방에 없었다.

비어 있는 방을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가는 걸 느꼈다.

멍하니 비어 있는 방을 바라보고 있으니 로만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르네는 에드윈 님의 침실에 있습니다.”

그때 로만이 시기적절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디로 뛰쳐나갔을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주 예전에 느껴 보았던 그 기분을.

이제는 다시 겪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에드윈의 침실로 돌아가 보니 르네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어두운 데다가 이불에 파묻혀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듯했다.

이런 소동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르네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그녀의 곁에 있던 에드윈은 잠들지 않았던 건지, 소란스러움에 잠이 깬 것인지 눈을 뜨고 있는 채였다.

“늦었는데 자지 않고?”

“르네가 여기 이렇게 있는 게 좋아서요.”

두 사람은 혹시나 르네가 깰까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아침까지 깨지 않을 것 같으니 에드윈도 얼른 자도록 해.”

“네.”

에드윈은 얌전히 대답하고는 르네의 곁에 찰싹 붙어 눈을 감았다.

하지만 들썩이는 눈과 입꼬리를 봤을 땐 쉽게 잠들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설레고 행복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에드윈을 보며 레이넌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일부러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외롭게 아이를 키웠던가.

그래도 저 아이에게 부족한 것이 없도록 신경을 썼다고 여겼는데.

“공작님?”

“그래. 나가지.”

두 사람이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집무실에 돌아오는 내내 곤히 잠든 르네와 들뜬 에드윈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에드윈이 르네를 정말 좋아하는군.”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알고 있었지. 새삼 에드윈을 너무 외롭게 키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레이넌의 말에 로만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이제까지 에드윈 님은 어떤 위협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리고 만약 보모가 다른 사람이 왔으면 또 어땠을지요.”

로만도 레이넌과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그래.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에드윈 역시 사람을 쉽게 믿지는 않지.”

“네.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건 저도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말씀드려 왔으니까요.”

“그래. 사람을 믿고 살라고 가르치고 싶지 않았지. 안쓰럽지만 그런 삶을 살아야 하니까, 에드윈은.”

“공작님이 그러하셨듯이요?”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쓰게 웃었다.

“그래. 하지만 나는 이런 삶에 환멸을 느끼거나 하지 않아. 게다가 로만 자네도 있고 말이지.”

드물게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레이넌의 모습을 보며 로만은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왜 이러십니까, 무섭게.”

질색하는 로만을 보고서는 레이넌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작은 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런 모습을 본 로만은 몇 발짝 더 뒤로 물러났다.

“어쩌면 에드윈에겐 르네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군.”

에드윈이 르네를 홀랑 믿어 버린 걸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졌다.

저 정도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은 적어도 이 저택 내엔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에드윈도 마음을 쉽게 내어줬을 터였다. 깐깐한 로만도 이러쿵저러쿵하지만 결국 르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가.

“네. 에드윈 님께는 잘된 일이지요.”

“그래. 덕분에 계획이 많이 틀어졌지만 나쁘지 않아.”

레이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뭔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모습이라 로만은 아무 말 없이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수상한 자를 목격한 사람은 한 명뿐이라고?”

“네. 에드윈 님을 모시는 마빈입니다.”

“마빈이라……. 그럼 애초에 누군가가 침입했는지부터 의심할 필요가 있겠군.”

“네. 아무래도 체이스가 전에 한 보고도 있으니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마빈이 체이스를 붙들고 실없는 소리를 했던 그날, 바로 두 사람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체이스는 정확하게 어떤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빈을 유심히 지켜봐야겠다는 보고를 했다.

“그래서 르네가 그때 누구를 만났는지는 결국 아직도 모르나?”

“네. 본 사람도 없고, 르네도 자꾸 말을 돌리는 게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뭐, 조금 더 지켜보면 알겠지.”

유달리 소란스러웠던 새벽, 꽤 많은 일이 일어났고, 여러 대화가 레이넌과 로만 사이에 오갔다.

특히 레이넌은 이제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금 인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작님? 공작님!”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던 레이넌을 다시금 현실로 불러들인 건 로만의 부름이었다.

로만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니 꽤 오래 생각에 잠겨 있었던 듯했다.

“생각을 좀 하느라.”

“그보다 르네를 이렇게 바로 옆에 두셔도 되겠습니까? 약혼 이야기를 먼저 진행하실 줄 알았는데요.”

“르네와의 사이가 어느 정도인지 떠보려고 한 짓 같으니…… 나쁘지 않겠지.”

“오히려 눈치챌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니 조금 더 생각해 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로만의 조심스러운 의견을 들은 레이넌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오히려 더 제대로 보여 줄까 싶은데 말이야.”

레이넌의 말에 로만의 얼굴이 다시금 창백해졌다. 불길한 예감이 너울거리며 밀려들었다.

“뭔지 모르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시죠.”

“휴가나 좀 다녀올까?”

로만의 간곡한 청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레이넌이 말했다.

“휴가……. 이런 시기에 말씀이십니까?”

“이런 시기니까 더욱더 의미가 있지 않겠나.”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여기서 이 정도로 나오면 슈나이더도 헷갈리겠지.”

“굳이 이 정도가 아니더라도 헷갈려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믿지 않겠나. 내가 그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 정도 손해를 감수하리라 여기진 않을 테니까.”

“휴가라니…….”

“아,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너는 안 데려갈 테니까.”

로만을 위로하는 듯한 레이넌의 말에 그는 끝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 말은 곧 저는 여기에 남아 공작님이 하셔야 할 일까지 모두 해결해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주십시오. 여기서도 충분히 르네의 존재감을 잘 키우고 계십니다.”

“이제 바깥에도 슬슬 알려 줄 때가 되었지. 기왕이면 눈에 확 띄게 보여 주는 게 낫지 않겠나.”

보통 때였다면 진작 포기하고 물러났을 로만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좀처럼 포기하지 못했다.

레이넌이 평소에 처리하는 업무량이 꽤 많았던 것도 있고, 그 없이 혼자 처리하기엔 까다로운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걸 레이넌이 모르지 않을 텐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로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넌이 쌓여 가는 업무를 어떻게 수습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매달릴 수밖에.

“그렇다고 이 시기에 휴가라니요. 일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공작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로만의 말에도 레이넌은 끄떡없었다.

“내가 없으면 참견할 사람이 없으니 네 업무 효율이 더 오르지 않을까?”

로만을 생각해 주는 듯한 레이넌의 말에 그는 얼굴을 구겼다.

“정말 저는 두고 가신다고요? 에드윈 님은요?”

로만의 질문에 레이넌은 턱을 천천히 쓸었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넌은 결정을 내렸는지 대답했다.

“데려가지. 그 편이 안전할 테고 르네도 마음이 편하겠지.”

“그런데도 저는 두고 가신다고요?”

로만은 억울한 듯 다시금 물었다. 레이넌은 보통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듯 로만이 당황한 모습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는 싫은 내색도 없이 다시 한번 같은 대답을 내어주었다.

“악독한 시어머니를 휴가지까지 데려갈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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