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방에 갔더니 꽃이 있었어요. 제 방엔 꽃을 두지 않거든요.”
“체이스.”
“네. 가져오겠습니다.”
체이스는 금세 방을 빠져나가 화병째로 가지고 돌아왔다.
“튤립이군.”
“네. 창가에 있었는데, 뭔가 관계가 있을까요?”
“그렇겠지.”
“에드윈 님은 그렇다고 쳐도 저는 왜요?”
“아마 둘 중 한 명을 노린 거겠지. 그리고 나는 그중 르네 쪽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어.”
그의 말에 순간 오싹한 기운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 설마 제가 어제 여기서 잠들지 않았다면!”
“진정해, 르네.”
횡설수설 말을 내뱉으려는데 레이넌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는 눈높이를 맞춰 왔다.
“해치려고 한 건 아닐 거야. 그랬다면 에드윈의 침실에 있었다고 한들 안전하지 않았을 테지.”
“해치려…….”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저 죽을 수도 있는 건가요?”
이제야 겨우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나 싶었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위협에 손이 떨려 왔다.
“르네.”
흔들림 없는 부름이 귓가에 감겨들었다. 레이넌의 눈을 마주하자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럴 일은 없어.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단호한 레이넌의 말에 작은 한숨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어떤 근거도 없었지만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안심이 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안정이 될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레이넌은 그때까지 가만히 눈을 맞추고 어깨에 손을 올린 그대로 나를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노란 튤립이라. 그자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로맨틱한 선물이군.”
“누군지 알고 계세요?”
“얼쩡거린 놈은 모르지만, 그 뒤에 있는 놈은 알지.”
“그게 누구죠?”
내 질문에 레이넌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내 손을 붙들어 손목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눈만 크게 뜨고 있으니 레이넌은 조금 전 입을 맞췄던 곳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비어 있는 방에 꽃을 두고 간 정도로도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데, 누군지 알면 견딜 수 있을까?”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더 무서운 일이 아닐까?
“그만. 거기까지만 하도록 해. 짐작 가는 곳은 있으니까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거래도.”
끝없이 뻗어 나가려는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레이넌은 단호하게 말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심란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왜 꽃일까.”
레이넌은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대답은 체이스에게서 돌아왔다.
“노란 튤립의 꽃말은 헛된 사랑입니다.”
체이스의 말에 레이넌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헛된 사랑이라.”
“공작님?”
좋은 의미가 아님이 분명한데 레이넌은 꽤 즐거워 보였다.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남자로 보인 모양이야. 르네 그대에게 말이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떠보려는 것일지도.”
체이스의 조심스러운 말에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그럴 정도로 보이기라도 했단 말이겠지.”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이 되는 거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체이스는 아무래도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체이스.”
“네, 공작님.”
“로만에게 전하도록. 오늘은 쉬어야겠다고. 내일까지 숨어들어 온 게 있는지 확인해 놓으라는 말도 잊지 말고.”
“쉬신다고요?”
“그래. 위험에 빠진 내 여자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군, 오늘은.”
체이스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러는 사이 레이넌은 내 허리를 손으로 감으며 나를 이끌었다.
“그럼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러 가지.”
우리가 방을 떠날 때까지도 체이스는 망연히 서 있는 채였다. 방을 벗어나기 전, 레이넌은 등을 돌려 체이스에게 말했다.
“이렇게 된 거, 보답을 해 줘야겠지.”
“보답 말입니까?”
“그래. 그가 바라는 대로. 체이스.”
“네, 공작님.”
“로만에게 한마디 더 전해야겠군. 오늘 당장 르네의 방을 옮겨야겠다고.”
그는 짙은 미소를 보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침실의 옆방이 마침 비어 있군.”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레이넌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겨야 했다.
***
레이넌은 아침 식사를 했다던 로만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아침을 먹는 사이에 그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자리만 지켰다.
차라리 혼자 먹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레이넌은 내가 조금이라도 멈칫거리면 이런저런 음식을 내게 밀어 주었다.
거기서 더 머뭇거리면 먹여 주기라도 할 기세라 얼른 음식을 입에 넣었다. 덕분에 다른 날보다 더 많이 먹고야 말았다.
식사 후에는 바로 그와 티타임을 가졌다. 아침을 먹을 때도, 티타임을 가질 때도 아닌 척하지만 내내 사용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정작 레이넌은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서 나는 어느 쪽을 따라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눈치만 봤다.
“다른 걸 준비하라고 할까?”
“네?”
“영 못 먹고 있군.”
내가 좀처럼 차도, 디저트도 들지 못하고 있자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아침을 너무 많이 먹어서요.”
“이런 날일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하는 법이지.”
“그보다 괜찮을까요?”
“괜찮냐니, 뭐가?”
“수상한 사람은 아직 못 찾은 거잖아요. 꽃이 있었던 걸 보면 확실히 누가 침입했던 것 같은데.”
“아마 못 찾을 거야.”
“네?”
우물쭈물하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을 풀어내자 레이넌은 뜻밖에도 찾지 못할 거라 단언했다.
“네? 로만 님에게 찾아 놓으라고 하신 건……?”
“애초에 그런 사람이 있었을까? 이런 일을 벌였으니 숨어들어 온 쥐새끼랑 조금 놀아 주려는 거지.”
숨어들어 왔다니. 애초에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사용인 중에 범인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누군지 알고 있는 걸까. 혹은 금방 찾아낼 자신이 있는 걸까.
“걱정은 그만하고 일단 차나 들지. 너무 충격받아 찻잔도 못 들 정도라면 도와줄 수 있으니 얼마든지 말하도록.”
레이넌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의 손이 내 찻잔에 닿기 전에 얼른 찻잔을 들어 올렸다.
레이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며 제 찻잔을 들었다.
“어쨌거나 방은 옮기도록 해. 에드윈이랑 붙어 있으면 한꺼번에 노리기 쉬우니까.”
“그럼 에드윈 님은요?”
“이렇게 된 거 체이스가 당분간 계속 붙어 있으면 되겠지.”
“그럼 보모 일은……?”
내 질문에 레이넌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그만두는 편이 좋겠어.”
“네?”
물론 전에 한 차례 언질이 있긴 했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놀란 마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이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함께 일어나 나를 자리에 앉혔다.
“전에 말했듯이 나와 약혼하면 에드윈의 보모로 있을 수 없어.”
“그건 그렇지만…….”
갑작스럽기도 하고 에드윈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 생각해 두지도 못했다.
아마 나보다 에드윈이 더 실망할 텐데 그가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에 찻잔만 내려다봤다. 어두운 찻물 때문일까.
찻잔 속에 비친 내 얼굴에는 울적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괜찮아. 지금처럼 자주 보면서 지낼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했잖아.”
“정말요?”
어르듯 차분하게 이어지는 레이넌의 말에 반색하며 그를 바라봤다.
내 얼굴을 마주한 레이넌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곧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너무 공격적으로 물어봤던가. 너무도 반가운 말에 나도 모르게 몸을 그에게 들이밀고 있었다.
순간 기가 죽어 몸을 살짝 뒤로 물리며 고개를 숙이려는데 레이넌이 재빨리 말을 이어 갔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뭔가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누군가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는 없었다.
“공작님!”
급하게 달려온 걸까.
로만이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울부짖듯이 말했다.
“오늘 쉬신다니요? 지금 쌓여 있는 일이 얼마나 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아, 이런 상황에 일이라니. 매정하기도 하군.”
능청스러운 레이넌의 말에 로만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당장 공작령의 변경된 조세 때문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게다가 축제 관련 업무는 어떻고요?”
“그래. 모두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군. 내일 전부 처리할 테니까 정리 끝내 놔.”
“그놈을 잡으라고도 하셨잖아요.”
“그것도 내일 확인하지.”
아주 간단한 지시를 내리듯 산뜻하게 말하는 레이넌의 목소리에 로만은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만은 곧 울적한 얼굴로 이마를 짚으며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늘 르네의 방을 옮길 테니까 정리도 끝내 놓도록 해.”
“공작님, 저는 한 명입니다.”
“네가 받는 급료는 한 명분이 아니지. 고작 한 명분의 일을 시키려고 내가 돈을 그렇게나 주는 줄 아나.”
냉정한 레이넌의 말에 로만이 조금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로만의 편을 들어 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려고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난 그럴 만한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할 일이 많으니 그만 놀고 얼른 가서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
느긋하게 놀고 있던 레이넌이 말했다.
로만은 무슨 말을 하든 먹히지 않으리라는 걸 짐작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캐서린도 좀 부르고.”
“……네.”
로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짧은 대답만 남기고 떠났다.
그렇게 불만을 잔뜩 표현했지만 시킨 일은 곧잘 하고 있는 듯했다.
로만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서린이 찾아왔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그래. 당분간 캐서린이 에드윈을 좀 돌봐야겠어.”
레이넌의 말을 들은 캐서린은 드물게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난 캐서린과 내 얼굴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했다.
시녀장인 캐서린은 이미 하는 일이 많았다. 에드윈을 돌볼 여력이 없다는 건 로에리안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당황스러운 마음을 이해하는 듯 레이넌은 몇 가지 지시를 더했다.
“에드윈이 듣는 수업을 더 늘리고 당분간 체이스도 붙어 있게 하지. 마빈도 있으니 특별히 캐서린이 할 일이 많지는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래. 캐서린은 그냥 비어 있는 보모라는 이름만 가져가면 된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뭐지?”
“르네는 그럼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캐서린의 물음에 레이넌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살포시 눈꼬리를 접은 레이넌은 내 손에 다과를 쥐여 주고서야 캐서린에게 대답했다.
“계속 일을 하게 둘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새로운 보모를 찾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금 에드윈의 보모를 새로 들이면 더 골치 아프고 시끄럽지 않겠나. 그렇지 않아도 귀찮게 하는 것들이 많은데.”
생각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레이넌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의 얼굴을 보자 언젠가 체이스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레이넌의 앞에 자꾸 나타나서 기회를 만들어 보려는 사람이 늘어나서 그가 꽤 귀찮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고도.
그 말을 들을 때는 의아했는데 지금 레이넌의 얼굴을 보니 체이스가 한 말이 이해가 됐다.
내 눈에도 보일 정도로 레이넌은 언짢은 기색을 하고 있었으니 캐서린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캐서린은 더는 질문도, 제안도 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이제 매일 점심 후 티타임에 에드윈도 함께할 테니 수업 일정을 조율해 놓도록.”
“알겠습니다.”
레이넌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매일 가지는 티타임에 에드윈이 함께할 수 있다니.
오늘 들은 이야기 중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것이었다.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레이넌 역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윽한 눈을 보니 그간 계속해 왔던 대로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