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레이넌의 눈에 담긴 쓸쓸함을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추억의 공간이 있다는 건 좋네요. 이렇게 찾아올 수 있는 거리에 있으니 더욱이요.”
“그런가.”
“그럼요. 그런데 형님이랑 사이는 좋으셨어요?”
“다른 형제들은 어떤지 모르니 좋았는지 어땠는지도 모르겠군. 딱히 좋았던 기억도, 나빴던 기억도 없는 것 같은데.”
“그 정도면 좋았던 것 같은데요.”
“그런가.”
“치고받고 싸운 기억만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요.”
“르네는 어땠지?”
“저는 혼자였어요.”
“혼자?”
레이넌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가족 관계에 대해 말했던 기억은 없는데 왜 저렇게 놀라지.
오히려 내가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자 레이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혼자였다는 게 조금 의외여서.”
“그런가요? 혼자라 부럽다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저는 그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그랬나.”
“집에 돌아가도 친구가 함께인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친구들은 질색했지만요.”
혼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지긋이 와 닿는 레이넌의 시선이 느껴졌다.
“공작님?”
“아니, 에드윈에 관한 이야기 말고 본인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군.”
“그랬었나요?”
“응. 생각해 보니 그렇네.”
자신도 막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레이넌이 곧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그랬군. 모든 게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네?”
“아니, 여기 어떤가?”
“정말 좋은데요.”
“그럼 앞으로 종종 오도록 하지. 여기라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니까 그대도 편안할 테니.”
“오가는 길에 여러 사람 눈에 잔뜩 띌 것 같은데요.”
농담처럼 건넨 말에 레이넌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겠군. 이만 돌아갈까?”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손을 내밀었다. 이제까지 생각보다 먼저 나갔던 손은 여전히 내 무릎 위에 있었다.
내 손을 감싸고도 남는 큰 손을 눈에 담았다.
그가 손을 내미는 것도, 그의 손을 잡는 것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괜찮은 걸까, 익숙해져도.
절대 편해질 리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조금씩 편해지고, 알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는 게 문득 불안해졌다.
“르네?”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문득 정신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다시 본관으로 돌아오는 길은 처음처럼 무섭지도, 창피하지도 않았다.
난데없이 떠오른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은 채였고, 그래서인지 레이넌과 닿은 곳들의 감각이 더욱 크게 느껴진 탓이었다.
같은 건 빠르게 뛰는 심장 정도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말 때문인지, 혹은 뒤에 앉은 레이넌 때문인지 헷갈렸다.
확실한 건 앞으로 말을 보면 한동안 레이넌이 떠오를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승마장에 도착하자 레이넌은 바삐 자리를 떠났다. 생각보다 시간을 지체한 모양이었다.
나는 기다리고 있던 체이스와 함께 에드윈의 침실로 돌아가는 길에 깨달았다.
공작저를 달리는 동안 생각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한층 더 날카로워진 시선들이 온몸에 내리꽂혔다. 수군거리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흥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새삼 한숨은.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잖아.”
내리 한숨을 쉬며 걷는 나를 보다 못한 체이스가 위로 섞인 말을 건넸다.
“그렇지만…… 마음의 준비가 아직 덜 됐나 봐.”
“앞으로는 더욱더 짐작도 못 할 일들이 많을 텐데. 신경 쓰지 마. 원래 사람들 신경 잘 안 쓰는 편 아니었던가?”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면 누구라도 신경 쓰지 않겠어?”
“공작저 정도로 약한 소리는.”
“그래. 신경 쓰지 말아야지. 이제 시작인데.”
“잘 생각했어.”
체이스 덕분에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에드윈의 침실에 도착했다.
“르네!”
에드윈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보자마자 쪼르르 뛰어왔다. 그러고는 상기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르네! 드디어 말을 탔다며?”
아무래도 나보다 소문이 더 발이 빠른 모양이었다.
***
레이넌과 함께 승마를 가장한 소풍을 다녀온 그날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지지부진하던 내 승마 수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아직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지만 일단 말을 탈 수 있게 된 것부터가 큰 발전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레이넌을 대하는 게 조금은 편해졌다.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예전과 같이 팽팽히 곤두선 느낌은 아니었다.
“르네, 요즘 되게 예뻐졌다.”
“그러게. 옷도 고급스러워지지 않았어?”
무엇보다 크게 달라진 건 사람들의 태도였다.
체이스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움찔 놀라며 물러나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를 밀쳐 내고서라도 나에게 다가왔다.
하나같이 가식적인 미소를 얼굴에 걸고서.
제대로 인사 한번 나눠 본 적 없던 사람도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그뿐일까. 성의 없는 아부도 더해졌다.
나는 달라진 게 없는데 사람들은 나를 달리 보고 있었다.
“평소랑 똑같은데요?”
이런 말을 해 봤자 듣는 이는 없었다. 그렇지 않다는 둥, 겸손을 떤다는 둥. 오히려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아무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중요하지 않나 봐.”
겨우 사람들을 떼어 내고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체이스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어?”
“뭐야? 알고 있었어?”
“저자들한테는 네 말의 내용이 아니라 네가 대꾸를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야. 그들은 그걸로 몇 마디를 더 할 기회를 얻은 거니까.”
내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던 체이스는 요즘 내 소식통이 되어 주었다.
아무래도 이전보다 더 편하다고 생각한 건 나만이 아닌지 체이스도 조금씩 나를 더욱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알고 있으면서 왜 말 안 해 줬어?”
나도 모르게 투정을 부리듯 말했지만 체이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즐기는 줄 알았지.”
“그럴 리가 있어? 그럼 차라리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을까?”
“뭘 하든 비슷할 것 같은데.”
남의 일이니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체이스의 말을 들으니 문득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정말 피곤하다, 피곤해.”
“나는 이 상황이 꽤 재밌는데.”
“재밌어?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게?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동안은 눈치만 보더니 이제는 다들 이미 네가 공작 부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잖아.”
울컥해서 튀어나온 내 말에 체이스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평소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체이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고는 한숨과 함께 말을 계속했다.
“그래.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게까지 바뀌니 무서울 정도야, 정말.”
“하긴, 공작님도 요즘 꽤 귀찮아진 모양이야.”
“왜?”
“네가 성공했는데 나라고 못 할까, 이런 생각인가 보지. 예전엔 숨 쉬는 것도 조심하더니 요즘은 보란 듯이 앞에서 얼쩡대나 봐.”
“흠…….”
보통 담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용감한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경험자인 나로서는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귀찮게 구는 사람이 늘어서 공작님 심기가 보통 불편한 게 아니야. 나야말로 눈치 보느라 힘들다고.”
“응?”
“왜?”
“공작님 눈치를 본다고?”
“아무리 그래도 너를 대하듯 공작님도 대할까 봐?”
“그게 아니라……. 공작님을 만날 시간이 있어?”
“아, 뭐…….”
체이스는 내 말에 아차, 하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데 레이넌을 만날 시간이 있었던가.
“아무튼 덕분에 로만 님도 영 기분이 별로야.”
“그래?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
로만의 이야기까지 더해지자 의아함이 생겼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레이넌을 만나고 있었지만 그런 기색은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좋은 편이지 않나?”
고개를 갸웃하며 한 혼잣말이 체이스의 귀에도 들렸던 모양이었다.
“좋은 편?”
“응. 확실히 처음에 뵀을 때보다는 덜 무섭다고 해야 하나, 덜 딱딱하다고 해야 하나?”
“하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네.”
“그런가. 모르겠다. 지금도 너무 피곤해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어. 앞으로 지금보다 더 피곤해지는 걸까?”
“곧 괜찮아지겠지. 정식으로 약혼하게 되면 떨어져 나갈 사람은 떨어져 나갈 테니까.”
“아닌 사람은?”
“미리 걱정하지 마.”
“……응.”
이래저래 걱정은 늘었지만, 이번만큼은 체이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지금 걱정이나 생각 같은 걸 하기 힘들 정도로 피곤한 상태였으니까.
“어머, 르네잖아?”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과하게 친근한 척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이스가 바로 내 앞을 막아섰지만 상대방은 그를 간단히 밀쳐 내고 나와 팔짱을 꼈다.
본 적도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전까지 함께 수다를 떨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피곤에 피곤이 쌓여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순간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살짝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팔짱을 놓을 생각이 없는 여자 덕분이라고 감사해야 할까.
하지만 나를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준 여자는 내 상태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내게는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말을 내뱉기 바빴다.
“르네.”
“에드윈 님!”
나는 언제 들어도 반가운 에드윈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에드윈이 나타나자 여자는 재빨리 내 팔에서 손을 빼고는 그에게 인사를 했다.
갑자기 팔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아직 어지럼증이 가시지 않았던 나는 눈에 띄게 비틀거렸다.
이번에 나를 넘어지지 않게 받쳐 준 이는 체이스였다.
“아파 보여.”
에드윈은 여자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내 앞으로 달려왔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피던 에드윈은 내 손을 잡고 끌었다.
“가자. 쉬는 게 좋겠어.”
하지만 그의 바쁜 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었다. 갑자기 몸을 홱 돌린 에드윈은 조금 전 내게 말을 걸었던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여자가 반색하며 다가오려는데 에드윈은 제법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르네를 괴롭히지 마.”
“괴롭히다니요. 아니에요, 에드윈 님.”
여자는 분주히 말을 이어 가려고 했지만 에드윈은 그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발을 쿵쿵대며 걷는 모습이 뭔가 마음에 단단히 들지 않는다는 그의 속내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걸음뿐만이 아니었다. 힘을 잔뜩 준 눈과 빵빵하게 부푼 볼 역시 그랬다.
“르네, 아픈 거 아니야?”
침실로 들어서자, 에드윈은 나부터 살폈다.
“아니에요. 이렇게 건강한데요.”
일부러 과장해서 몸을 힘차게 움직이자 에드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