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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37)화 (37/129)

“생각보단 무섭지 않네요.”

“그거 다행이군.”

“그런데 조금 창피하긴 하네요.”

“어째서?”

내 말에 레이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승마장을 벗어난 말은 공작저 내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덕분에 전에 보지 못했던 곳도 구경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이 다 저를 구경하는 것 같아서요.”

“어차피 앞으로도 내내 사람들은 그대를 그렇게 바라볼 거야.”

“그렇겠죠.”

익숙해질 자신은 없지만요, 라는 말은 마음속에 담아 뒀다.

그래도 로에리안 공작저를 이렇게 둘러본 적은 처음이라 절로 눈이 바삐 움직였다.

“이렇게 공작저를 돌아본 건 처음이네요. 본관도 그렇지만 다른 곳도 전부 예쁘네요.”

건물은 화려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주변과 잘 어우러져 과하게 보이지 않았다.

내 감탄에 레이넌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아, 선대의 누군가가 미적인 부분에 그렇게 집착을 했다던가. 지금의 모습은 대부분 그때 갖춰졌다고 하더군.”

“그래요?”

“그렇다는 말이 있긴 하지.”

레이넌은 제 선조의 일이지만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달리 나는 어디에서도 듣기 어려운 이야기에 흥미가 일었다. 그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로에리안 공작과 함께하는 공작저 투어 느낌인가. 꽤 호사스러운 승마 수업이었다.

“그런데 저기는 분위기가 좀 다르네요?”

나는 다른 곳과 다름없이 화려한 모양새를 자랑했을 것 같은 건물 한 곳을 가리켰다.

나무와 풀이 우거져 그 모습이 거의 가린 채였다.

때문에 오히려 눈에 들어왔다.

조금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긴달까.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의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어둡고 음습한 기운을 풍겨 내는 것만 같았다.

“서쪽 별관이군. 궁금한가?”

“아니요? 궁금하진 않은데요.”

레이넌은 내 대답이 분명 들렸을 텐데도 이미 그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분위기가 다르다고 했지, 가고 싶다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요.”

울상이 된 얼굴로 애써 그를 말려 보았지만 레이넌은 내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팔에 닿는 바람이 점점 서늘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에 나온다던가.”

“……뭐가요?”

의미심장한 레이넌의 말을 이어서 들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묻고야 말았다.

“100년 전에 공작에게 버림받고 죽은 시녀장의…….”

“그만! 그런 이야기까지는 안 하셔도 돼요!”

역시나. 물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여 그의 말을 막았다. 레이넌은 그런 나에게 호통을 치기는커녕 소리를 내어 웃었다.

즐거운 듯 큰 소리로 웃는 레이넌은 처음이었지만 그런 부분에 놀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새 건물 앞까지 와 있었고, 팔에는 소름이 잔뜩 돋아 있었으니까.

안에 들어가 보자고 말하면 어떻게 하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승마 수업이 담력 훈련이 되는 것인가.

하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말은 건물 옆에 줄지어 서 있던 나무들 사이로 들어섰다.

곱게 가꾸어져 있던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의 나무들은 모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높이 솟은 나무들이 만들어 낸 그늘 속으로 들어서자 확실히 서늘해진 공기가 몸에 와 닿았다.

말은 그 속을 뚫고 달렸다. 조금은 추운 기운이 느껴질 무렵, 작은 숲의 끝이 나타났다.

빽빽이 솟은 나무들 사이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만든 터널을 벗어나니 또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닌 공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뚫고 지나쳤던 것처럼 높은 나무들에 둘러싸인 낮은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하고 으스스했던 기운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초록 풀이 고이 깔린 언덕은 평화롭고 아득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신기하게 여기는 햇볕이 잘 들지. 다른 곳보다 시원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야.”

지금까지 열심히 달렸던 말은 그곳에서 천천히 멈춰 섰다.

“언제 와도 마음이 편안해져.”

레이넌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 장소인 모양이었다.

그대로 그도, 나도 아무런 말 없이 잠시 햇볕을 받으며 평화로운 공기를 느꼈다.

레이넌은 먼저 훌쩍 말에서 내려갔다. 그는 이번에는 아래에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소풍을 즐겨 볼까.”

나는 말에 오를 때와 달리 이제는 긴장이 완전히 사라진 채로 레이넌의 손을 붙들었다.

아멜리아의 도움 없이도 그는 가볍게 나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어느새 레이넌의 품에 안긴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바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은 레이넌이 가까이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변 분위기 덕분일까. 그의 얼굴 덕분일까.

그와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편안한 기분이 든 건 처음이었다.

“어때요?”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나는 얼른 그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건 나뿐인 듯했다. 레이넌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아멜리아에게 대답했다.

“올라오는 길이 생각보다 깔끔하더군.”

“로만이 어제 사람들을 시켜 정리했으니까요.”

“그랬군.”

아멜리아는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흐트러진 옷깃을 가다듬어 주고는 허리를 숙여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땠어요? 말보다 다른 데 정신이 팔리니 무섭지 않았죠?”

확실히 아멜리아의 말대로였다. 꽤 오래 말 위에 올라타 있었음에도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귓가에 닿던 나직한 목소리, 등을 지탱해 주었던 다부진 가슴, 허리에 닿았던 탄탄한 팔이…….

“아…….”

순식간에 말보다는 레이넌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얼른 얼굴부터 가렸다.

곧 화끈거리는 기운이 느껴지는 걸 봐서는 틀린 선택은 아니었던 듯했다.

붉어진 얼굴을 보진 못했겠지만, 아멜리아는 알겠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정도면 성공적이네요.”

“무슨 이야기를 둘이서만 즐겁게 하지?”

가까이 다가온 레이넌을 보고 아멜리아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질투하시는 거예요?”

“아멜리아?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아, 질투 말이지?”

황당해하는 내 목소리와 재미있다는 듯한 레이넌의 목소리가 겹쳐 흘러나왔다.

곧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래. 뭐든 내 눈 안에서, 내 귀에 들리게 하라고.”

“어머.”

아멜리아는 흐뭇한 얼굴로 레이넌과 나를 한참이나 번갈아 보더니 자리를 펴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안 앉아요?”

“두 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질투에 눈이 먼 남자를 건드리면 귀찮아지니까요.”

아멜리아는 다시금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고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섰다.

공작저 안이라고는 하나 레이넌이 움직인 탓일까. 평소의 티타임과는 달리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가까이 있지는 않았지만 다들 서 있는데 나만 레이넌과 함께 앉는 게 불편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앉지.”

“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쭈뼛거리며 그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풀밭이라 테이블과 달리 불편할 텐데도 레이넌은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불편한 마음은 접어 두고 나 역시 그를 따라 찻잔을 들었다.

“색다른 장소네요.”

“그렇지? 사실 오늘 바깥으로 나가 볼까도 생각했는데…….”

“공작저 바깥으로요?”

나도 모르게 반가운 목소리로 되물은 모양이었다. 레이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뜻하는 바를 조금 늦게 알아차린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도망 안 가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레이넌은 영 못 미더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피더니 곧 하던 말을 계속 이어 갔다.

“공작저 바깥으로 나가기엔 준비가 부족한 것 같아 오늘은 여기로 정했다. 다음엔 같이 나가 보지.”

“네.”

“그땐 혼자서도 말을 탈 정도로 나아지길 기대하지.”

“네.”

어쩐지 내일부터는 전보다 말과 가까워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레이넌이나 아멜리아처럼 말을 잘 다루게 될지 자신도 없었고, 당장 큰 변화가 있을 거란 기대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까지처럼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 터였다.

조금씩 나아지면 레이넌이 말한 대로 혼자 말을 타고 공작저를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내 여기에만 있었는데 바깥 구경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환하게 웃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더니 레이넌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우는 것 같았고, 나도 모르게 레이넌을 따라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니, 오늘처럼 같이 타고 가는 것도 좋긴 하겠군.”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깥에서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건 피하고 싶었다. 덕분에 의욕이 훨씬 올라갔으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승마 실력이 늘 수 있을지도.

레이넌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으며 찻잔을 내려놨다. 그는 곧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레이넌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이며 흔들거렸다.

나도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레이넌이 그랬던 것처럼 나무에 등을 기댔다.

레이넌의 팔에 어깨가 닿았다. 눈을 감으니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자장가 같네요.”

사락사락 스치기도, 사라라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도 하고. 뜻밖에도 나뭇잎과 바람이 만나 만들어 내는 소리는 다채로웠다.

“자장가라…….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정말 그렇게 느껴지는군.”

“몸이 나른해지네요.”

“이렇게 편안하게 있어 본 것도 오랜만이야. 하긴, 여기도 오랜만에 왔으니.”

“자주 오셨었어요?”

“어렸을 땐 그랬지. 로만과 함께.”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셨군요.”

“질긴 인연이지.”

정중한 듯하지만 농담을 던지기도, 거침없이 직언을 하기도 하는 로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아무래도 두 사람이 생각보다 가까운 사이여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어느샌가 레이넌의 곁에는 다람쥐 한 마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레이넌은 얼쩡거리는 다람쥐를 따뜻한 눈으로 한 번 바라보긴 했으나 만지지도, 집요하게 바라보지도 않았다.

뭘 하든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멜리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하게 지켜봐 주되 먼저 다가가거나 귀찮게 하지 않는 사람이 동물들에게 사랑받는 걸까.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웃지?”

“아뇨. 그냥 쓸데없는 생각을…….”

“같이 좀 웃고 싶어서 묻는 거야.”

“그보다 어렸을 때 자주 오셨으면 저 별관이 무섭거나 하지 않으셨어요? 분위기가 좀…….”

“안 무서웠어.”

하긴, 지금과 비슷한 성격이었다면 딱히 무서워하는 건 없는 아이였을 듯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땐 여기도 다른 건물들과 비슷했거든.”

“그랬어요?”

“응. 그랬지. 나도 그맘때는 여기에서 지내고 있었으니까.”

“그러셨구나. 그럼 언제부터 안 오셨어요?”

“형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아…….”

나도 모르게 안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이넌은 내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손가락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나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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