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내가? 나라고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
“아니야. 르네라면 가능해.”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야?”
“르네, 곧 공작님과 결혼한다며?”
“응? 아, 그게…….”
에린에게도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던 터라 다른 사람에게 그랬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내 대답이야 어쨌건 에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어떤 대답을 하든 그녀가 바라는 건 정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공작 부인이 되면 르네도 시녀가 필요할 거 아니야? 그러면 나 좀 불러 줘, 응?”
“아니, 공작 부인이라니…….”
“그래, 그때까지 어떻게 버텨? 그러니까 되도록 빨리, 응? 지금이라도 르네는 나를 시녀로 불러 줄 수 있잖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에린에겐 내 난감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르네, 응? 우리 친구잖아. 나 좀 도와줘.”
“아니, 가능한 일이면 도와주고 싶긴 한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에 에린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에린, 에린. 일단 울지 말고 진정해 봐.”
아무리 달래도 그칠 기미가 없던 에린의 눈물을 멈춘 건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체이스의 목소리였다.
“르네?”
체이스의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뭔가 큰일이 있긴 한 것 같은데…….
체이스의 목소리가 다시금 멀어지고 나서야 에린은 큰 숨을 들이쉬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나 만난 것도 비밀로 해 줘.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응. 그거야 어렵진 않은데…….”
“고마워. 역시 르네뿐이야. 난 그럼 너만 믿고 있을게.”
“에린?”
에린을 만난 걸 비밀로 하겠다는 대답을 전혀 다른 쪽으로 이해한 듯한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착각을 바로잡기도 전에 에린은 주변을 살피더니 얼굴을 가리고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은 제법 위태로워 보였다.
“괴롭힌다고? 누가? 어떻게? 왜?”
에린을 달랜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다시 곱씹어 봐도 그녀의 말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뿐이었다.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던 그녀와의 대화로 남은 건 결국 에린의 착각과 나의 난감함, 그 정도였다.
“확실히 뭔가 안 좋긴 한 것 같은데.”
사람들 사이에서 늘 분위기를 이끌어 가던 에린이었다.
한창 바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정신없이 살 때도 에린은 끊임없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랬던 그녀와 조금 전의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서럽게 우는 와중에도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모습은 물론 간간이 내게 보내던 서늘한 눈빛도 그랬다.
“르네.”
내가 갈 길을 앞질러 갔던 체이스는 되돌아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부르는 체이스의 목소리에 에린의 생각에서 겨우 벗어났다.
“아, 체이스.”
“어디 있었어?”
“응? 그냥 계속 걷고 있었는데?”
“그래? 그럼 혹시 누굴 만났어?”
체이스의 질문에 에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과 만난 걸 비밀로 해 달라고 말하던 간절한 그 얼굴이.
“응? 아니.”
“그래?”
내 대답을 들은 체이스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에린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빤히 바라봤다.
체이스가 바라보는 곳엔 아무도 없었다. 에린의 모습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양심에 찔린 탓일까. 체이스의 눈빛이 의미심장해 보여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말을 건네며 걸음을 옮겼다.
“마빈은 뭐래?”
“몰라. 이상한 이야기만 하던데.”
다행히 체이스는 시선을 거두고 마구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상한 이야기?”
“에드윈 님이 그림 그리실 땐 어떤 간식을 내가는 게 낫겠냐, 요즘 에드윈 님 키가 훌쩍 큰 것 같지 않냐.”
“응? 그게 뭐야.”
“그러게. 왜 그러나 했더니…….”
“응?”
“아니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네.”
“다른 이유?”
내 질문에 체이스는 입을 닫고는 생각에 잠겼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에드윈과 관련된 일이라면 나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이유가 뭔데?”
하지만 계속된 질문에도 체이스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마구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응?”
“왜 그래?”
다른 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져 걸음을 멈추자 체이스가 의아한 듯 나를 살폈다.
“아니, 뭔가 달라서…….”
평소와 같은 고요함이나 편안함 대신 분주함과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내 느낌이 맞는다고 확인시켜 주듯 많은 사람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 난 그럼 갈게.”
“응. 고마워.”
체이스가 떠나고도 한동안은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뭔가 일이 있는 건지, 내가 방해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르네, 왔어요?”
“아멜리아.”
내 고민을 끝내 준 건 아멜리아였다. 그녀만큼은 언제나 그랬듯 미소로 나를 반겨 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좀 번잡스럽죠? 오늘은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볼까 해서요.”
“다른 방법이요?”
아멜리아는 다른 방법을 설명하는 대신에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평소에 이곳에서 보지 못했던 시종들과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레이넌이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면서도 레이넌과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눈길을 멈추지 못했다.
“오늘도 아름답군.”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타 봤다지?”
나는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그는 그런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서 도와주려고 왔지.”
자연스럽게 나 역시 손을 올리자 레이넌은 천천히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도와주신다고요?”
“아멜리아만큼은 아니라더라도 나도 승마에는 자신이 있거든.”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미소에 정신이 팔렸던 건 아주 잠시였다. 아주 잠깐이었는데 그 짧은 사이에 큰 난관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아, 아니! 잠시만요! 공작님?”
“응? 그냥 기대고 있으면 된다니까. 절대 떨어트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니,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듯 준비는 모두 끝나 있었다. 말 그대로 내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지 않았을 뿐.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내 손에 겹쳐진 그의 손은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한테만 집중해.”
한순간에 가까이 다가온 레이넌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주 약간 편해졌다.
몸에서 힘을 풀자 그는 잘했다는 듯 웃으며 내 볼을 쓸어내렸다.
오늘만 해도 두 번째였다. 레이넌의 미소에 정신이 팔린 것은.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내 손을 잠시 꽉 잡았다 놓은 레이넌은 그대로 훌쩍 말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몸을 낮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슬쩍 움직이는 말의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를 거부하는 모습처럼 보일 것 같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넌은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대신 손을 거둬들이고는 부드럽게 말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괜찮아.”
나에게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몇 번이고 속삭였다.
나직하고도 다정한 달램은 말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훈련이 잘된 말을 이제 와서 달랠 필요가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손은 조심스럽게 말을 다독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내게 향해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괜찮다고 속삭인 후에야 레이넌은 조금 전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의 곁에 가는 데까지, 그리고 손을 올리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레이넌은 미동도 없이 그대로 기다려 주었다.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싸 쥐는 그 순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놀라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나보다는 레이넌이 빨랐다.
손을 당기는 힘이 느껴지는 동시에 뒤에서 아멜리아가 나를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나는 말 위에 올라와 있었다.
“고, 공작님?”
“절대 다치는 일은 없게 할 테니까 나를 믿어.”
“아니, 아니! 공작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자, 여기를 잡고.”
고개를 저었지만, 손에는 힘이 이미 잔뜩 들어간 채였다.
내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그는 내 두 손에 제 손을 얹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대도.”
그래도 굳은 몸은 쉽사리 풀어질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레이넌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도닥였다.
“천천히 기대고.”
나직한 레이넌의 목소리에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있자 그는 작게 웃으며 내 어깨를 살짝 감싸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씩 손에서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손을 감싸고 있던 레이넌은 내 변화를 알아차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해.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네.”
“천천히 출발해 보지.”
레이넌은 그가 말한 대로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참을 레이넌이 기다려 줬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금 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절로 눈이 꼭 감겼다.
시야가 까맣게 차단된 채로 몸이 움직이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뒤에 있는 레이넌은 내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작게 웃었다.
“눈을 감고 있는 게 더 무서울 텐데.”
귓가에 그의 숨과 함께 목소리가 닿자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허리의 양옆에서 레이넌의 팔이 단단히 버티고 있는 덕에 몸이 휘청이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노, 놀라게 하지 마세요!”
“놀라게 하려는 게 아닌데…….”
대답하는 레이넌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억울함이 묻어났다.
그런 와중에도 말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분명히 아까와 같은 속도일 텐데 눈을 감았을 때보다 더 천천히 걷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덕분일까.
다시 몸에서 긴장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타 보니 또 느낌이 다르지 않나?”
“그러네요.”
레이넌의 말대로였다. 위에서 보니 꽤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커 보이던 말이 정작 올라오니 그 정도까지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직 긴장이 완전히 풀린 것도, 겁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은 그래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체이스랑 같이 다니는 건 어떻지?”
“확실히 사람들이 잘 다가오진 못하니까 편하긴 해요.”
“다행이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것을. 그보다 이제 슬슬 약혼 이야기를 진행했으면 하는데.”
“네.”
“너무 급하다 싶으면 천천히 진행해도 되니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해.”
“아니요. 어차피 할 거라면 굳이 미룰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조금씩 속도는 올라간 상태였다.
분명 조금 전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리 무서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약혼을 진행하게 되면 에드윈의 보모는 그만둬야 할 텐데 괜찮겠나?”
“네?”
“뭐 자연스럽게 볼 기회는 많겠지만 지금처럼 지내는 건 어려울 테니까. 각자의 일정만으로도 바쁘겠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지만,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였다.
“괜찮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달리는 말 위여서 그런 걸까, 혹은 정말 목소리에 감정이 담겨서였을까.
울먹이는 듯한 내 목소리를 듣고 레이넌은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대신 최대한 지금처럼 가깝게 지낼 방법을 찾아보지.”
“감사합니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레이넌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안을 찾아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대가 에드윈의 보모가 되어 참 다행이야.”
“저도 에드윈 님을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승마장 안을 달리던 말은 어느새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상쾌하게 몸을 스치는 바람 덕분에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니, 어쩌면 끊임없이 말을 거는 레이넌 덕분일지도 몰랐다.
두려움보다 후련한 기분을 먼저 느낄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의 노력 덕분일지도.
옆으로 금세 지나쳐 버리는 풍경은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지만 처음처럼 무서운 기분은 어느새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