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를 아멜리아에게 데려다준 로만은 그 길로 레이넌을 찾았다.
“르네는 요즘 어떻지?”
“체이스가 있는 것만으로도 쉽사리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으니 안전은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고개를 저었다.
“체이스만으로도 안전하다면 다행이지만……. 슈나이더가 얼마나 음흉하고 집요한지 너도 잘 알 텐데.”
“그래도 공작저에, 게다가 에드윈 님 곁에 있는 르네를 직접 노리긴 힘들 겁니다.”
“로에리안에 제 사람을 심어 두지 않았으면 말이지.”
“네.”
“과연 하나도 없을까, 이 많은 사용인 중에.”
레이넌의 의미심장한 말에 로만은 입을 다물었다. 로만 역시 그 부분에서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승마는 매일 가는 모양이지만 아직 말을 타 보지도 못했답니다.”
“체이스가 있으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말은 탈 줄 알아야겠지.”
“네. 아멜리아 말로는 말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게 제일 큰 난관이라고 합니다.”
“아멜리아의 입에서 난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군.”
“아마 동물 자체에 두려움이 있는 편인 것 같다는데요.”
“그래서?”
“괜히 재촉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좋은 기억을 덮어 주는 쪽으로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꽤 걸리겠군.”
“네.”
“좋은 기억으로 덮는다라…….”
레이넌은 다시 한번 아멜리아의 말을 입에 올렸다. 곧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일정하게 들려오던 소리가 멈추고, 레이넌은 입을 열었다.
“내일 시간을 좀 비워 놓지.”
“알겠습니다.”
“승마 외에 별다른 일은 없나?”
“네. 그보다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뭐지?”
“말씀하신 대로 르네가 여러모로 시선을 돌리기엔 적임자긴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레이넌이 르네를 좋아한다고 확신했던 로만은 날이 갈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르네가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과 자신이 죽이려 했다고 생각했다는 걸 알고는 제법 충격을 받았던 모습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제법 확신했다.
하지만 그 후에 태연한 모습을 금세 되찾았고, 르네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없었다.
르네의 상황을 세세히 살피는 모습을 보면 그런가 싶다가도, 지금처럼 무심한 얼굴을 보면 또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그때 레이넌에게서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어떤 대답이든 망설임 없이 내놓을 줄 알았지만 레이넌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보기 드물게 신중을 기해 고민하던 레이넌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군.”
“네? 모르겠다고 하셨습니까?”
들인 시간과 신중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대답에 로만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이제 겨우 충격에서 벗어났으니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지.”
“이제 겨우 벗어났다니…….”
“그렇게 안 보이나?”
“네. 평소와 같으셨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레이넌은 조금 전처럼 아주 태연하고도 무심한 얼굴을 한 채 물었다.
“글쎄요.”
“도대체 그렇게 내 앞에 자주 나타나고 수줍어했던 모습은 모두 뭐였지?”
‘애초에 그것도 잘못되었다는 걸 지적해 줘야 하나.’
로만이 고민에 빠진 사이 레이넌은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역시 내 결혼에 충격을 받은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도망칠 것까지야. 게다가 내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니…….”
“공작님.”
“그래.”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듯하니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해 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보이는 모습과 속내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건 비단 로만만이 아니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의 착각이 더 깊어질 것이 뻔했다.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군.”
“네. 당분간은 르네가 떠날 일도 없으니 부디 천천히, 차근차근 생각해 보시죠.”
요즘 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된다 싶더라니. 아무래도 레이넌이 충격에 빠져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골치 아픈 상황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큰 성과라고 여겨야 할까.
이제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르네와 관련된 일은 레이넌이 어떻게 반응할지 종잡을 수 없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녀에 관해서는 먼저 판단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레이넌에게 확인하는 것이 편할 듯했다.
게다가 저도 모르게 르네에 관한 이야기를 잘못 꺼내서 레이넌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또한 몇 번이었던가.
수습하느라 골치 아팠던 기억이 새삼 로만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로만은 앞으로 르네에 대한 그의 마음을 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좋아. 그건 그렇고, 주변 반응은 어떻지?”
“조금씩 르네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제가 반대한다니 오히려 더 그럴싸한 모양새가 된 듯합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진행해도 괜찮겠군. 진지하게 약혼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흘리도록 해. 지금처럼 어중간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도 여러모로 좋을 건 없으니.”
“악독한 시어머니가 버티고 있는데 두 분 사이가 진전이 될까요?”
“악독한 시어머니라.”
레이넌은 로만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한 번에 알아들은 듯 재미있다는 것처럼 웃었다.
“제가 그 정도로 모질게 반대하는지 몰랐습니다.”
“충신이로군.”
“제가 퍼트린 것보다 훨씬 더 부풀려져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그거야 평소 네 성격과 분위기가 한몫 단단히 한 거지. 게다가 이제까지와는 달리 네가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며 다들 놀랐다던데.”
“다른 때는 정상적이지 않았던 모양이죠?”
“글쎄. 이번 기회에 자신을 한번 돌아보는 것도 좋겠군.”
어차피 그런 이미지가 조금 더 늘어난다고 해도 로만에게는 전혀 타격을 주지 않았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제가 이런 나쁜 소문이 늘어 점점 더 삶이 고달파지겠습니다.”
“지난번에 월급 인상은 충분히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음에 이런 점도 꼭 반영해 주십사 부탁의 말씀을 올리는 겁니다.”
한 번 더 월급을 올릴 좋은 기회라고 여겼지만 레이넌은 그런 로만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만은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다는 듯 웃으며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남겼다.
***
바로 다음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승마를 하러 나가는 길에 마빈이 체이스를 불렀다.
“저기, 체이스.”
드문 일이었다. 체이스가 나와 함께 지낸 이후로 마빈은 그를 피하기 급급했으니까.
“왜?”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래. 다녀와서 하지.”
“아니, 지금 하면 좋겠는데?”
“지금?”
체이스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더니 곧 거절의 말을 건넸다.
“지금은 곤란해. 나중에 해.”
“에드윈 님에 대해서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지금 꼭 해야 해.”
“에드윈 님에 대해서?”
마빈의 말에 반응한 건 나였다. 에드윈에 대한 일이라면 나 역시 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마빈은 당황한 낯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 르네까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체이스가 정원에서 에드윈 님이랑 시간도 많이 보냈고, 그림도 요즘 함께 그리니까…….”
“굳이 지금이어야 해?”
체이스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어쩐지 마빈을 몰아세우는 듯한 말투였다.
마빈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움찔했지만 그래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응. 빨리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르네는 일단 승마 수업이 있으니까 얼른 가 봐.”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방을 나서려는데 체이스가 나를 붙들었다.
“잠깐이면 된다니까 기다려.”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빈은 내가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체이스는 나를 혼자 보내는 게 꺼림칙한 것 같았다.
“요즘은 사람들이 잘 다가오지도 않고, 설사 다시 그런다고 해도 한동안 덕분에 편했으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아.”
게다가 아멜리아를 만나러 가는 길에 시달려 봤자 뭐 얼마나 시달리겠는가.
작게 체이스에게 속삭였지만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정말 괜찮다니까. 네 말대로 잠깐이면 된댔으니까 천천히 가고 있을게.”
마빈을 빤히 바라보던 체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따라갈게.”
“응.”
체이스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에드윈의 침실을 나선 이후 특별히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마주치는 사람이 거의 없기도 했고, 어쩌다 스치는 사람들은 멀리서 뭔가 속닥거리며 나를 유심히 바라보기만 했다.
“체이스가 의외로 걱정이 많은 편인가?”
하긴, 생긴 것과 달리 세심한 성격이니까.
함께 지내면서 체이스의 배려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대로 지켜보고 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필요한 물건을 건네줬고 도움이 필요할 때 슬쩍 다가와서 말없이 도와주곤 했다.
“그것보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이네. 중요한 이야기였나.”
천천히 걸었지만 체이스는 마구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도 따라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내 혼잣말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더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잘못…… 들었겠지?”
괜히 오싹한 기분이 들어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
놀라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흐느끼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는 들려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귀, 귀신인가?”
저택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게다가 이렇게 환한 낮에?
가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귀를 막고 뛰어가려는 그때, 하얀 손이 구석에서 튀어나와 나를 붙들었다.
“으악!”
“쉿!”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만, 갑자기 나타난 손은 내 입을 막은 뒤 구석으로 끌고 갔다.
“에린?”
그녀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던 건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창백하고 야윈 얼굴은 귀신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어딘가 어둡고 울적한 분위기도 평소의 그녀와는 전혀 달랐다.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살피다가 에린을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기, 에린? 많이…… 피곤해 보인다. 무슨 일 있었어?”
무슨 단어가 적당할지 몰라 골라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자 에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핏 나를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르네…….”
날카롭게 뻗어 온 시선이 나를 향한 것인지 확인할 틈은 없었다. 에린이 울먹이며 나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붙드는 에린의 모습에 당황해 그녀의 팔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에린은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그러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눈물을 흘려 냈다.
“왜 그래? 얼굴은 왜 이렇게 상했고?”
다행히 그녀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변을 잠시 살피던 에린은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나…… 누군가한테 미움을 단단히 산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겠어. 갑자기 일하는 데가 바뀌질 않나, 혼자서 할 만한 일이 아닌데 나 혼자 하라고 하질 않나…….”
이야기를 하던 그녀는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지도 몰라.”
죽는다니. 그 정도로 힘들다는 소리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에린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에린, 도대체 누가 괴롭힌다는 거야?”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더 무서워.”
에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좀 진정하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 봐.”
“네가 뭘 알아! 차근차근이라니…….”
에린은 내가 한 말에 뭔가 마음이 단단히 상한 듯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얼른 목소리를 낮췄다.
“르네, 네가 나 좀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