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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34)화 (34/129)

역시나. 로만이 준비해 놓은 ‘임시방편’이 체이스였던 모양이다.

확실히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가오는 사람은 줄겠지만…….

“왜 정원사 일을 미루면서까지 날 도와주는 거야?”

“글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어리둥절할 만큼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체이스에게서는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덤덤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고용된 입장인 건 너나 나나 같으니까.”

시키니까 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생각에 잠겨 체이스를 빤히 바라본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그냥…….”

왜 체이스일까 궁금했다. 에드윈이 체이스와 잘 지내고 있는 데다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할 외모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니면 그도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걸까?

체이스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궁금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아 그를 빤히 바라보게 됐다.

체이스는 그런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았다.

“체이스, 얼른 그림 그려야지.”

“네, 에드윈 님.”

에드윈의 재촉에 체이스는 다시 흰 종이를 노려보고는 붓을 들어 올렸다. 아주 무겁고도 힘겹게.

체이스는 한참을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덕분에 늦게 시작했지만 금세 에드윈을 따라잡아 두 사람은 비슷하게 그림을 마무리했다.

“와, 에드윈 님! 그새 또 그림이 늘었네요!”

“정말?”

“네!”

에드윈의 그림은 전에 비해 세밀해져서 누가 보더라도 뭘 그렸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색깔도 조화롭게 잘 섞어 썼다. 언제 이렇게나 성장했는지.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내 시선은 에드윈의 그림 옆에 놓여 있는 체이스의 것으로 옮겨 갔다.

“체이스.”

“응.”

“에드윈 님께 그림을 가르쳐 드리겠다고?”

“응.”

나는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선들이 이어진 체이스의 그림을 보고는 이마를 짚었다.

심지어 에드윈을 처음 만났을 무렵의 그도 제대로 된 형상을 그려 냈는데…….

“이건 좀 너무하잖아. 그림이라기보다는 낙서 아냐?”

“왜? 엄청 예쁜 꽃이잖아!”

에드윈은 체이스의 편을 들어 주고 싶었던 모양인지 그의 그림을 화병 옆에 나란히 놓고 보여 주며 말했다.

“에드윈 님, 사과를 그렸습니다.”

체이스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은 에드윈은 들고 있던 그림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꽃도, 사과도,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림이었다.

애초에 곡선이라고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데.

에드윈은 놀란 얼굴을 채 감추지 못하고 천천히 떨어트린 그림을 주워 들었다.

한참을 빤히 그림을 내려다보던 에드윈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체이스가 나한테 배우는 걸로 하자.”

“그게 좋겠습니다.”

에드윈의 제안에 체이스도, 나도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

체이스의 그림이 가져다준 충격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한 궁금증이 뒤늦게 생겨났다.

그림을 가르쳐 준다는 게 그저 핑계일 뿐이라는 건 에드윈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체이스의 그림을 보고 에드윈에게 배우는 쪽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겠지.

체이스는 그렇다고 쳐도 에드윈은 이 상황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이 역시 에드윈에게는 묻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애초에 타이밍을 놓쳐 버려 더욱더 그랬다.

“로만 님께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피해 다니기 바빴던 로만을 먼저 떠올리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로만 님께 뭘 물을 건데?”

체이스는 에드윈과 늘 붙어 지내다가도 내가 혼자 떨어지는 순간이 되면 망설임 없이 나를 따라나섰다.

그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도 나를 보호하기 위한 레이넌의 대응으로 보였던 듯했다.

몇몇 사람들은 왜 하필 체이스가 붙어 있는지 의문을 표했다. 만약 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 붙어 있다면 로만이 가장 유력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터였다.

때문에 로만이 나를 반대한다는 소문에 힘이 실렸고, 더불어 레이넌과 로만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레이넌은 이렇게 새로 생겨난 소문의 내용에 꽤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 보니 체이스는 에드윈보다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말이 없는 탓에 종종 그가 곁에 있다는 걸 잊어버린 탓일까. 체이스의 존재를 잊고 입 밖으로 흘려 낸 혼잣말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응? 아니야.”

“그래.”

내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체이스는 더 묻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그는 함께 지내기 무척 편했다.

말이 없는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체이스는 다른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우락부락한 몸과 도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사나운 인상은 나에게 이점이 되었다.

그의 외모 덕분에 이제는 사람들이 쉽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내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다가도 그의 시선이 향하면 재빨리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

“승마는 좀 어때? 할 만해?”

“응? 아니.”

오늘도 어김없이 다가온 승마 시간을 떠올리며 내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런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체이스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아멜리아한테 배우면 금방 늘 텐데…….”

“체이스도 아멜리아를 알아?”

두 사람 사이에 전혀 접점이 없는 것 같았기에 아멜리아를 친근하게 부르는 체이스의 모습은 굉장히 의외였다.

“응. 여러모로 능력이 출중하지.”

체이스는 존경과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뭔가를 떠올린 듯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화만 안 내면 사람도 좋고.”

“아멜리아가 화도 내?”

웃는 얼굴로 상냥한 이야기만 줄곧 건네는 아멜리아였다.

그런 그녀가 화를 낸다니, 게다가 체이스가 질색할 정도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 그보다 로만 님 하니까 말인데.”

“응.”

“로만 님이 널 굉장히 반대한다던데?”

“나를?”

“그래서 공작님이랑 로만 님 사이가 삐걱댄다는 이야기도 있고.”

“삐걱댄다니. 그럴 리가.”

딱히 살가운 말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편이 아니던가.

황당한 체이스의 말에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체이스?”

“넌 정말…… 사람을 좀 더 사귀거나 소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지금이랑은 위치가 달라질 거잖아.”

그의 진지한 충고에 나는 눈만 깜빡였다.

확실히 뭔가 아는 걸까. 아니, 소문이 워낙 파다하게 퍼져 있으니 그걸 믿는 걸까.

“그게 중요할까?”

“아무래도 그렇지. 사교계는 공작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일 테니까.”

“사교계라니…….”

나도 모르게 체이스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나를 보며 체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표정 관리를 하는 법도 좀 배워야 할 텐데.”

그의 한탄과도 같은 말에 대답을 한 건 내가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로만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로만 님?”

놀란 나와는 달리 체이스는 그가 나타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 이대로가 사람들이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좋을 거 같은데.”

“글쎄요. 그러기엔 살벌한 동네 아니던가요.”

“당장 너만 해도 그렇지 않아? 어디 부탁한다고 이렇게 쉽게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잖아? 르네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지.”

“로만 님.”

“응.”

“지금 르네 편을 적극적으로 들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거 아십니까.”

체이스의 말에 로만이 그대로 굳었다. 뭔가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얼굴을 본 체이스가 슬쩍 웃었다.

“설마? 나는 네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알겠습니다.”

“그래.”

선뜻 긍정의 대답을 하는 체이스가 영 찝찝한 듯 로만은 가는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체이스는 로만의 시선이야 어떻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한 이야기는 잊어. 굳이 안 어울리는 걸 하느라 힘들게 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대신 조금 전 내게 했던 조언을 정정하고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승마하러 가는 길이지? 가자.”

“네.”

풀 죽은 내 목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로만은 내게 물었다.

“아직도 적응이 안 돼?”

“그렇네요. 아니, 애초에 승마라고 하기도…….”

“하긴, 말은 타 보지도 못했다지? 요즘은 동물들 먹이만 주고 있다던가.”

그랬다. 매일 꼬박꼬박 승마를 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아멜리아를 만나러 갔지만 정작 가서 말을 타 본 적은 없었다.

아멜리아가 말에게 먹이를 주거나 보살피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작은 동물들을 돌보는 일을 돕고는 했다.

돕는다고 해 봤자 먹이통을 들고 있는 정도였지만.

게다가 대부분은 풀밭에 자리를 깔고 앉아 간식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다.

“어쨌거나 아멜리아랑 사이가 꽤 좋아진 모양이야.”

“네.”

큰 키에 시원시원한 외모와 달리 아멜리아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섬세함을 지닌 여자였다.

그래서일까. 유독 동물들은 그녀를 잘 따랐다.

풀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어느샌가 동물들이 그녀의 곁에 모여들고는 했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 아주 뒤늦게 동물들 사이에 놓여 있다는 걸 깨달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덕분에 매일 소풍 가는 기분으로 그녀를 만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래도 되나, 걱정이 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로에리안가에서 승마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다는데 아직 말은 타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아직 승마의 ‘승’ 자도 모르는데 괜찮은 걸까요?”

“아멜리아는 뭐래?”

“괜찮다던데요.”

나를 위로하려고 한 말은 아닌 듯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걱정을 내비치면 그녀는 어김없이 호탕하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며 어깨를 도닥여 주는 그녀의 손에 담긴 힘은 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아멜리아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재촉하거나 타박할 거라고 여겼던 것과 달리 로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뜻밖의 반응에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왜?”

“아니, 아멜리아를 꽤 신뢰하시는구나 싶어서요.”

“아멜리아는 뭐, 여러모로 그럴 만하지.”

“아무리 그래도 로만 님이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게 어색하긴 하네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멀리서 아멜리아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만난 김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혹시 체이스도 알고 있나요?”

“뭘?”

“저랑 공작님이…….”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우물쭈물하고 있자 로만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할 거라는 걸?”

“음……. 네.”

“글쎄. 체이스가 알던가, 모르던가.”

로만은 딴청을 부리며 대답했다. 그사이 그에게 많이 익숙해진 덕일까. 전과는 달리 이제는 로만의 의도를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냥 놀리고 싶은 거구나.

“알고 있나 보네요.”

“쳇.”

재미없다는 듯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에드윈 님은요?”

“에드윈 님?”

“아니, 체이스를 데려온 건 에드윈 님이시니까요.”

“아, 그랬지…….”

로만이 대답을 하려던 그때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

“자, 그럼 얼른얼른 말을 탈 수 있게 노력하라고.”

로만은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끝내 나를 놀리는 말을 하고서는 돌아섰다.

“말을 탈 수는 있을까…….”

어렸을 때 강아지한테 물린 경험 때문일까. 크든 작든 동물을 보면 몸부터 굳었다.

소리를 치며 도망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뜻 가까이 다가가는 건 쉽지 않았다.

“아멜리아를 만나는 건 좋은데 승마는 자신이 없단 말이지…….”

그냥 소풍이라고 생각하라던 아멜리아의 말을 떠올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언제나처럼 웃으며 반기는 그녀를 향해 나도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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