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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33)화 (33/129)

“뭘 그만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고.”

그래.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지. 적어도 일 년은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간혹 잊곤 했다.

그래도 덕분에 아주 잠깐이나마 설레고 기뻤다.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고 있을 때 로만이 말했다.

“사람한테 굳이 더 시달릴 필요는 없다고 하셨으니까. 일단 거기서 해방되는 것으로 당분간은 만족하도록 해.”

“……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크네요.”

“일단 확실히 사람들을 떼어 내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그 전에 임시방편을 하나 찾았는데…….”

“네.”

“곧 사람들이 절로 떨어져 나갈 만한 든든한 사람을 붙여 줄게.”

“네. 그런데 로만 님.”

“응?”

“사람들이 물어보는 말에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하는 것도 이제 너무 힘든데요. 다른 대답은 없을까요?”

“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니다’. 이 정도로 당분간은 넘겨 보지.”

“네.”

“혹시나 그래도 끈질기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공작님께 직접 여쭤보라고 해.”

“그걸 어떻게 공작님께 직접 여쭤봐요?”

“그러니까. 직접 여쭤볼지 말지 그들의 문제니까. 여차하면 공작님을 팔아.”

“공작님을 팔라니…….”

“임시방편은 아마 지금쯤 에드윈 님의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승마는 절대 빠지면 안 되니까 잊지 말고.”

“네.”

할 말을 마친 로만은 바삐 자리를 떠났다.

오늘은 첫날이라 아주 짧은 시간을 마구간에서 보내긴 했지만 워낙 바쁜 로만이기에 그조차 많은 시간을 빼앗긴 듯 보였다.

반대로 나는 예상보다 적은 시간을 썼기 때문에 남은 시간이 많았다.

기다리고 있다는 임시방편이 누구일지 잠시 고민해 봤지만 어차피 내가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일이라도 줄면 훨씬 편해질 터였다.

“그보다 나를 걱정한다니.”

아멜리아와 로만, 두 사람에게서 연달아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은 이상했다.

“정말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럴싸하겠어.”

상황을 모두 아는 나조차 그럴듯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산책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었다. 조금 먼 길을 돌아서 에드윈의 침실로 가려고 했지만 금방 생각을 바꿨다.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느릿하게 걷던 걸음은 어느새 뛰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결국 에드윈의 침실에 도착하고 나선 차오른 숨을 골라야 할 정도까지 되었다.

하지만 그조차 마음 같지 않았다. 침실이 조용하기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마빈이 나타난 탓이었다.

“왜 이제 와?”

“일찍 온 건데?”

또다시 그 질문들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바깥으로 나가서 여러 사람의 시선을 견디는 게 나을까, 여기서 마빈의 질문을 견디는 게 나을까.

“에드윈 님이 누굴 데려왔는지 알아?”

“에드윈 님이 벌써 오셨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이면 에드윈이 정원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보통 정원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라 이렇게 일찍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침실에서 에드윈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 씻으러 갔기 때문인가.

“네 말을 그래도 에드윈 님이 잘 들어주시니까 부탁 좀 해 봐. 나는 너무 불편해.”

“무슨 소리야?”

마빈은 금방이라도 에드윈이 돌아올까 걱정스러웠던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꽤 초조해 보였다. 제대로 된 설명 없이 나를 닦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흘려들었던 마빈의 말을 떠올린 내가 그에게 물었다.

“에드윈 님이 누구를 데려왔는데? 그리고 무슨 부탁을 해? 그보다 왜 불편한데?”

마빈의 설명은 모두 질문이 되어 그에게 다시 돌아갔다.

마빈은 정말 제대로 된 설명은 하나도 하지 못한 셈이었다.

“아. 혹시…….”

로만이 이야기한 임시방편을 말하는 걸까. 그게 누군지 물어보기라도 할걸.

“뭐야? 넌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말리지 않았어?”

“진정 좀 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횡설수설이야?”

“정말 너도 모르는 이야기야?”

“정말 모른다니까. 그러니까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좀 해 봐.”

“너 요즘 비밀이 너무 많아.”

그간 매일같이 같은 질문을 했지만 한 번도 명확한 대답을 듣지 못해 쌓였던 짜증이 이제야 터진 모양이었다.

“아니, 그걸 왜 나한테 그러냐고.”

나 역시 쌓일 만큼 쌓인 상태라 예전처럼 웃으면서 받아 주거나 흘려넘기기에는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내 말에 마빈은 오히려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매번 대답을 피해? 공작님이랑 너 사이에 대한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둘 중 하나만 골라서 대답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 공작님께 여쭤보지 그랬어? 바로 대답해 주실 텐데.”

로만이 알려 준 방법은 효과가 좋았다. 평소보다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탓하던 마빈이 한순간에 입을 닫아 버렸다.

더 늦지 않게 로만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는지 물어본 것이 내게는 다행이었다.

“르네, 왔어?”

에드윈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차가웠던 공기가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에드윈 님, 잘 다녀오셨어요……?”

그를 맞이하는 반가운 내 물음의 끝은 조금 늘어졌다. 에드윈의 뒤에 서 있는 험악한 인상의 남자 때문이었다.

“응. 르네도 잘 다녀왔어? 승마는 재밌었어?”

“어, 그게…… 타 보지는 못하고, 인사만 하고 왔어요.”

대답은 에드윈에게 하고 있었지만 시선이 자꾸 그의 뒤쪽으로 향하는 탓에 말이 조금 느리게 나왔다.

“그랬어? 재밌는데. 르네도 얼른 탈 수 있으면 좋겠다.”

“에드윈 님?”

“응?”

“승마를 할 줄 아세요?”

“응. 아마 르네가 타는 것보다 훨씬 작은 말에 타겠지만.”

에드윈도 승마를 할 수 있다니. 로만이 딱 잘라서 승마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이었나.

“근데 에드윈 님.”

“응?”

“왜 체이스와 함께 계세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뽐내는 체이스를 뒤에 두고서도 에드윈이 평소처럼 말을 꺼내는 탓에 물을 타이밍이 늦어졌다.

내 질문에 에드윈은 잠시 뒤를 바라보고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체이스가 그림을 엄청 잘 그린대!”

해맑게 웃는 에드윈의 얼굴에 잠시 홀려 있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림이요?”

“응. 르네도 몰랐지?”

에드윈은 마치 제가 세기의 화가라도 된 양 가슴을 펴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체이스는 영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림이라니…….”

“그래서 체이스가 그림을 가르쳐 주기로 했어.”

“체이스가요?”

내 표정 역시 체이스와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물론 정원을 가꾸는 그가 꽤 섬세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림이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붓을 들고 있는 체이스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응. 그렇지, 체이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체이스는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에드윈의 질문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는 착실히 대답했다.

평소보다 더 작고 수줍은 목소리로.

“네. 제가 도와……드리기로 했죠.”

체이스는 허공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보지도, 에드윈을 보지도 못했다.

거짓말이 참 서투른 사람이구나.

“……왜?”

“아니.”

아무 말도 없이 체이스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날 힐끔거리더니 눈도 못 마주친 채로 물었다.

뭔가 나쁜 의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뻔한 거짓말을 왜?

“근데 마빈이랑 둘이 싸웠어?”

내 시선을 체이스에게서 떨어트린 건 에드윈의 목소리였다.

“싸우다니요. 아닙니다.”

마빈이 누구보다 빠르게 대답했다. 심지어 내 고개는 에드윈에게 당도하기도 전이었다.

“아니야?”

“마빈의 목소리가 바깥에서도 들릴 정도였는데.”

다른 때보다 현저히 낮아진 체이스의 목소리가 천천히 주변의 공기를 얼렸다.

그렇지 않아도 험상궂은 얼굴인데 노려보기까지 하니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체이스의 시선에 마빈은 몸을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마빈, 혹시 르네에게 소리를 지른 거야?”

어느새 에드윈은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정말 궁금한 것을 묻는 듯 말똥말똥한 눈을 마주한 마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냥 신나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목소리가 커졌나 봅니다.”

마빈은 두 손을 내저으며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르네, 뭐라고 말 좀 해 봐. 우리 싸운 거 아니잖아.”

“응. 싸운 건 아니지.”

내 대답에 마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싸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마빈이 화를…….”

“르네, 르네!”

잠시 떠오른 웃음은 사라지고 마빈은 화들짝 놀라 달려와 내 입을 막았다.

“마빈, 뭐 하는 거야?”

에드윈의 물음에도 마빈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내리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마빈의 몸이 잔뜩 굳은 것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나 역시 그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를 내는 에드윈은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화가 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에드윈의 모습에 오히려 마빈보다 내가 더 놀랐을 터였다.

아직은 어리고 밝은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목소리에 담긴 힘과 감정은 웬만한 어른 못지않았다.

공작 위를 이을 아이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아마 내가, 아니 이 저택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빈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놀란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을 내 얼굴이 가려진 건 고마운 일이지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체이스가 다가와 직접 마빈의 손을 떼어 냈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마빈은 에드윈에게 변명하듯 횡설수설 말을 이어 갔다.

“아, 그게 죄송합니다, 에드윈 님. 제가 너무 당황해서. 그러니까…….”

“됐어. 그냥 앞으로는 르네를 함부로 대하지 마. 속상하잖아,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에드윈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여전히 눈가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조금은 남아 있는 채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식사 준비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마빈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식사 시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지만, 누구도 떠나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럼 이제 그림을 그려 볼까?”

어색하게 굳어 있던 공기가 다시금 풀린 건 에드윈의 힘찬 목소리 덕분이었다.

조금 전 마빈과 내가 당황할 때에도 태연하던 체이스의 얼굴은 그 말에 잔뜩 일그러졌다.

“에드윈 님?”

체이스의 떨리는 부름을 들은 에드윈은 까치발을 들어 그의 팔을 토닥였다.

“잘 부탁해.”

옅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던 체이스는 끝내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신나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에드윈과 달리 체이스는 한참을 흰 종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조용히 묻자 체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잘 때 빼고는 에드윈 님 곁에서 지낼 거야.”

“에드윈 님 곁에서?”

“그래. 뭐, 수업하실 때까지 같이 있지는 않겠지만.”

체이스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닿았다.

“얼마나?”

“당분간.”

“정원은 어쩌고?”

“정원사가 나 하나는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만…….”

“얼른 끝나길 바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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