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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32)화 (32/129)

“공작님 옆자리에, 그것도 찰싹 붙어서 차를 마신다던데?”

“옆자리에 앉은 적은 있는데 찰싹은 아닐걸?”

“아주 화기애애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화기애애하지도 않았을 텐데?”

“공작님 손이 네 어깨에…….”

“에드윈 님은 지금 정원에 계신가? 체이스가 모시고 갔어?”

“응.”

“그럼 내가 모시고 올게.”

“체이스가 모시고 온대!”

다급하게 나를 붙들려는 마빈을 피해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요즘 에드윈의 침실만큼 나를 피곤하게 하는 장소는 또 없었다. 그만큼 마빈은 끈질겼다.

마빈에게서 멀어지는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편한 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래도 마빈 덕분에 편한 점이 하나쯤은 있었다.

따갑게 와 닿는 사용인들의 시선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마빈처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했다.

“신분 상승이 웬 말이야. 오히려 전보다 더 고달파진 게 분명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투덜거림을 내뱉고 나니 조금은 속이 시원해졌다.

“르네!”

멀리서 내 모습이 보이자 에드윈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나 요기 물만 주면 끝이야.”

“천천히 하세요.”

“응!”

에드윈에게는 꽤 무거운 물통을 들고서도 그저 신이 난 듯 보였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자니 체이스가 가까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너 요즘 유명인이더라.”

“아…….”

“뭐야, 알아?”

“응. 그 정도면 내 귀에도 들리지.”

체이스는 내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는지 잠시 그대로 멈춰 나를 살폈다.

“왜?”

“그래서 진짜야?”

“음…….”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로만의 지시가 사실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질문을 수없이 받으면서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건 꽤 난감한 일이었다.

내가 말끝을 흐리기만 하자 체이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다고 내 대답이 보이는 것도 아닐 텐데.

다행히 그의 관찰은 꽤 짧은 시간 안에 끝이 났다.

“그 정도로 야망 있어 보이진 않는데.”

“그렇지.”

“뭔가 이유가 있나 보지. 너도 고생이다.”

체이스는 금세 관심을 거두고 에드윈의 곁으로 돌아갔다.

“다들 체이스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의 무관심이 한 사람을 숨 쉬게 합니다!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며 뛰어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후로도 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키워야 했으니까.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여야 한다던 레이넌의 말을 흘려듣는 게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거늘.

심지어 아직 레이넌과 로만은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다음 날 바로 알 수 있었다.

***

“오늘은 장미 정원이네요.”

“다른 때보다 사람들 눈에 덜 띄는 곳이긴 하지.”

덕분에 오늘 티타임은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그간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는데 그나마 오늘은 훨씬 편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이넌과 멀리 떨어져 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마빈이 말했던 것처럼 레이넌은 내 옆에, 그것도 찰싹 붙어 앉은 채였다.

“사람들 눈에 덜 띄는 곳이니까 조금은 더 떨어져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이 아니니 방심하지 않는 게 좋겠지.”

“……네.”

“많이 피곤한가?”

“아무래도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게 쉽지는 않네요.”

“많이 힘들면 조금 천천히 진행하도록 하지.”

“아니, 그러실 필요는…….”

“사랑받는 여자가 이렇게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사람들도 믿지 않을 텐데.”

그는 내 얼굴을 슬쩍 쓸어내리며 말했다. 요즘 들어 종종 보이는 모습이지만 다정한 레이넌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직은 제 얼굴보다 공작님과의 사이에 관심도가 높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대신 힘들면 언제든 나나 로만에게 말하도록.”

“네. 그보다 이 정도로 말이 돌기 시작했으니 에드윈 님도 곧 알게 되지 않을까요?”

“벌써 어느 정도 들었을지도 모르겠군.”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이미 대강 이야기해 놨으니까.”

“그래요?”

“그리고 에드윈은 그대가 내 약혼녀가 된다고 하면 더없이 기뻐하겠지.”

“……역시 그렇겠죠?”

“그래. 자신과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 테니까.”

레이넌의 말에 잊고 있었던 죄책감이 밀려왔다.

“걱정하지 마. 미리 걱정할 일도 아니고, 르네가 걱정할 일도 아니니까.”

“……네.”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피곤해 보이니 돌아가서 쉬는 게 낫겠군.”

“알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레이넌의 손짓에 가까이 다가오는 로만의 손에 들린 것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갈 때 가져가도록 해. 보기에도 아름다운데 향은 더욱더 좋지.”

“……감사합니다.”

주변에 가득한 장미 향이 내 품으로 들어왔다. 제법 묵직한 무게만큼이나 크기도 큰 꽃다발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보낸 이유가 이거였구나.

이걸 들고 돌아가라니. 이것 때문에 사람들 눈에 더 띌 것이 뻔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물론, 그 후에도 또다시 새로운 방면으로 시달리게 될 것을 생각하니 다시 몸이 따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레이넌이 건넨 꽃다발은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은 그가 원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자연스러운 밑바탕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마음이 무거워진 건 아주 잠시였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일단 일 년이다. 일 년만 버티자.

어차피 해야 하는 거, 차라리 확실하게 해서 일 년 만에 끝내고 재계약 따위는 아예 싹을 잘라 버리자.

마음먹은 김에 다른 때보다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레이넌에게 꽃다발을 받았으니 이 정도는 해야겠지.

“르네.”

몇 걸음 걷지 않아 나를 부르는 레이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잊은 것이 있는데.”

“네?”

“내일부터 그대도 뭔가 새로운 걸 배워야겠어.”

“새로운 걸 배워요?”

“그래. 내일 로만을 보내지.”

“네.”

뜬금없는 교육 일정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나를 보고 레이넌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꽤 잘 어울리는군. 꽃을 자주 선물해야겠어.”

무서운 소리를 남긴 레이넌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가 남긴 웃음과 말에 정신이 팔린 탓에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배울 게 뭔지 묻는 걸 잊었다는 사실을.

***

다음 날, 나는 영문도 모르고 로만에게 이끌려 마구간으로 향했다.

“로만 님?”

“응?”

“여기는 왜……?”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물었다. 로만은 내 질문에 오히려 당황한 얼굴로 돌아봤다.

“오늘부터 승마를 배우라는 말 못 들었나? 공작님이 직접 말씀하신댔는데?”

“새로운 거라고만 하셨는데요.”

“어쩐지. 옷도 제대로 안 갖춰 입었더라니.”

로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승마라니요. 이건 정말 아니에요.”

그대로 뒤로 물러나려는 내 등에 닿은 단단한 손이 있었다.

“당장 첫날부터 말을 타진 않을 거예요. 오늘은 간단한 인사 정도만 하죠.”

작지만 야무진 체구의 여자가 내 뒤에서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멜리아예요.”

“안녕하세요, 르네입니다.”

“알고 있어요. 요즘 공작저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시잖아요.”

웃으며 가볍게 건넨 농담과 같은 말에 내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멜리아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보다 승마는 진짜……. 저는 운동 신경도 없고 겁도 많아서…….”

심지어 고소 공포증도 있어요.

얼핏 보이는 말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저기 위로 올라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어지러웠다.

“일단 인사부터 하실까요?”

아멜리아는 내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내 손을 끌었다. 작고 여리여리한 체구와 달리 힘은 엄청났다.

별로 힘주는 것 같지 않은데도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녀의 손에 끌려 말에게 다가가야 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로만은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 아이가 여기서 가장 순하고 똑똑한 아이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잘 관리된 말이었다. 털의 윤기만 봐도 보통 정성으로 키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얗고 고운 털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낯선 이인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순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말은 예민하고, 또 섬세한 동물이라서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느낀답니다. 너무 두려워하면 오히려 말이 더 무서워해요.”

아멜리아는 애정이 담긴 손길로 말을 쓰다듬었다. 말은 그녀의 애정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무서우면 오늘은 이 정도 거리에서 보는 것만 하셔도 돼요. 위험하지 않게, 그리고 최대한 확실하게 가르치라고 하셨으니까요.”

“로만 님이요?”

“아니요? 공작님이 그렇게 당부하셨답니다.”

아멜리아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공작님이요?”

“네. 혹시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하셨어요.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걱정이요?”

레이넌이 일부러 당부를 하고 걱정을 했다니.

그녀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의문스럽게 여기는 부분은 아멜리아에겐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급하게 할 필요 없다고 하셨으니까 조금씩 친해지는 것부터 하죠. 불안한 채로 말에 올라타면 말도, 르네도 위험하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이야기였다. 가까이에서 본 말은 예쁘고 멋있었지만, 감히 올라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럼 내일부터 매일 이 시간에 여기서 만나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요.”

“네. 내일 봐요.”

짧은 첫 수업이 그렇게 끝났다. 말과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했지만, 말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지쳤어.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다, 정말.”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뒤에서 불쑥 들려온 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내가 이렇게나 놀랄 줄 몰랐던지 상대방은 나만큼이나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만 님? 돌아가신 거 아니었어요?”

“금방 끝날 거라서 기다렸지. 첫 수업이 어땠는지 보고도 드려야 하고.”

“아…….”

“그보다 왜 그렇게 놀라? 나도 놀랐잖아.”

“갑자기 나타나시니까요.”

“그래?”

내 소심한 항의는 흘려들은 로만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많이 지쳐 보이는군.”

“정말 지쳤다니까요. 갑자기 승마라니요…….”

“아, 그쪽이 문제야?”

“네?”

로만도 나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로만은 내가 지친 원인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승마는 어쩔 수 없어. 무조건 배워야 해.”

“왜 하필 승마를 무조건 배워야 하죠?”

“로에리안가의 사람이 되려면 당연히 익혀야 할 것 중 하나니까.”

“저는 일 년 뒤엔 여기에 없을지도 모르는데요.”

“네가 승마를 배우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너를 달리 볼 거야. 공작님이 널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네.”

“아멜리아는 여러모로 실력이 좋으니까 잘 배워 봐.”

“……네.”

“그보다 요즘 공작님이 걱정하시던데.”

“에드윈 님을요?”

“아니. 널.”

“저를요? 왜요?”

“사람들에게 시달리느라 고생 꽤나 하는 것 같다고.”

“아…….”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정말 사람들 눈초리와 수군거림을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그래. 내가 봐도 그렇긴 하네. 조금만 참아.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고 하셨으니까.”

“이제 그만해도 돼요?”

나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묻자 로만은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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