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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31)화 (31/129)

내 질문을 들은 로만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 이미지부터 좀 바꿀 필요가 있어 보이네. 그것 때문에 어제 그 난리가 났는데.”

피곤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말은 날카롭게 아픈 곳을 찔렀다.

나도 모르게 그를 원망의 눈으로 바라봤다. 로만은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천천히 하도록 하고 일단 가자.”

“네.”

로만과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레이넌의 집무실 앞이었다.

혼자였다면 아마 레이넌의 집무실에 도착하는 데만 해도 꽤 시간이 걸렸을 텐데.

로만의 걸음을 쫓아가다 보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들어가.”

데리러 와 놓고 정작 로만은 문만 열어 주고는 뒤로 빠졌다.

“로만 님은 안 들어가세요?”

“지금은 내가 있을 자리는 아니니까.”

차라리 같이 있어 달라며 붙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레이넌과 둘이서 약혼 이야기를 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어색함에 숨이 막혀 왔다.

하룻밤 사이에 로만이 조금 더 편해지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그만큼 이 자리가 불편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얼른.”

로만은 등을 슬쩍 밀며 나를 재촉했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들어가니 레이넌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앉지.”

“네.”

어차피 해야 할 말, 미루지 말고 빨리하자.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하려는데 레이넌과 눈이 맞았다. 지긋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할 말을 잊었다.

가다듬은 숨이 힘없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나?”

“……네.”

“왜지?”

당연한 걸 왜 새삼 묻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대답은 착실히 했다.

“고민하느라…….”

“고민했다고?”

뜻밖이라는 듯 레이넌은 되물었다. 역시나 나와는 상식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소동이 났을지도.

“네.”

“그래서 대답은?”

“하겠습니다.”

머뭇거렸던 것과는 달리 정작 대답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레이넌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밤새 고민했다. 전혀 달라질 두 답을 두고 얼마나 고심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에드윈을 위한 일이라는 것, 게다가 1년 뒤에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내 발로 당당히 공작저를 나올 수 있다는 조건이 결국 결정에 있어 큰 몫을 했다.

물론 원한다면 남게 해 주겠다는 것 역시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든지 내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좋아. 로만.”

레이넌의 부름에 로만은 바로 집무실로 들어섰다.

로만은 내 결정을 알지 못해서 밖에서 기다린 걸까.

정말 로만이 말한 대로 내가 이들에게 선입견이라도 가진 걸까.

어젯밤에 가장 많이 한 생각 중 하나는 바로 과연 ‘이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인가’였다.

제안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껴진 것과 달리 의외로 레이넌은 내 결정을 우선해 주는 것 같았다.

들어와서는 앉지 않고 서 있기만 하는 로만을 바라보고 있자 레이넌이 말했다.

“내가 설명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본인이 하겠다더군.”

내 시선의 의미가 달리 전달된 것 같았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높이 설명이 가능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전에 계약서라도 써 주세요.”

“계약서?”

로만은 놀란 듯 되물었지만 레이넌은 당황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까지 준비해 놓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적어도 1년은 크게 전전긍긍할 일이 없겠구나.

한숨을 쉬며 마음을 놓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로만은 하려고 했던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당분간은 매일 공작님과 티타임을 가질 것.”

“네.”

“다음 주부터는 티타임 외에도 한두 번 정도 따로 공작님을 찾아오는 게 좋겠고…….”

“한두 번을 더요?”

“아, 혹시 소문을 못 들었나.”

“무슨 소문이요?”

“공작 부인이 되기 위해서 에드윈 님의 보모가 되려고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에드윈 님을 홀리고서는 이제 공작님에게 접근하고 있다, 부자가 모두 그녀에게 홀려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

로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관련된 소문을 줄줄 읊어 줬다.

체이스가 말하려던 게 이거였나. 이런 거라면 그가 걱정스럽게 물어볼 만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에드윈을 홀리다 못해 레이넌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건…….

“활용할 수 있는 건 모두 활용하는 게 좋겠지.”

레이넌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작님을…….”

차마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레이넌은 태연한 얼굴로 굳이 내 말을 이어 주었다.

“유혹해야 하는 상황이지.”

“……유혹.”

“기대되는군.”

기대하지 마세요. 그런 단어는 평생 품어 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대신 억울한 마음을 담아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레이넌은 내 눈초리야 어떻든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레이넌에게선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안 나는 로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소문이 났으니 그걸 최대한 자연스럽게 활용해 보려는 거야. 공작님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너에게 대단한 유혹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아.”

“감사합니다.”

로만 역시 내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 같으면서도 그의 말에 조금은 진정이 됐다.

“일단은 자연스럽게 만남의 횟수를 늘리는 것에만 집중해.”

“네.”

“딱히 뭔가를 더 하려고 하지 마. 어색하고 티 날 게 분명하니까.”

“네.”

“그리고 혹시나 누군가가 공작님과의 사이에 대해 물어보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술술 말을 이어 가던 로만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내 작게 고개를 젓고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마.”

“네?”

“르네가 다른 사람을 속이려 하면 외려 티가 날 것 같아서 그래. 그냥 아무 대답도 하지 마. 절대.”

“……네.”

알 수 없는 억울함이 느껴졌지만 뭐라 할 말은 없었다. 로만이 말한 대로 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았으니까.

더불어 어제 그가 말한 것처럼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먼저 로만에게 상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지시였다. 나보다 나를 더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약혼이든 유혹이든 막막하게만 느껴졌는데 로만의 말을 들으니 할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좋아.”

“아니, 열심히 하지 마.”

내 말에 레이넌과 로만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들의 대답처럼 레이넌은 만족스러운 듯 흐뭇한 미소를 보였고, 로만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내게 위안을 주지는 않았다. 아마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제일 막막하고 걱정스러운 사람은 바로 나일 테니까.

에드윈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 분명 잘한 결정인데 조금 더 깊이 고민을 해 봤어야 했나.

그래 봤자 달라질 것 하나 없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그들을 붙들고 하소연을 할 것만 같았다.

***

“르네?”

아……. 못 본 척 재빨리 몸을 돌린 노력이 무색해졌다.

레이넌의 부름이 들려오자 속으로는 한숨을 쉬면서도 자연스럽게 웃으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흥미가 가득 담긴 시선이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시간을 맞춰 우연히 마주치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렇지만 요즘 들어 그런 노력 없이도 레이넌과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지금만 해도 에드윈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잠시 그를 위한 간식을 챙겨 오는 길에 레이넌을 마주친 것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목표는 로에리안가를 벗어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레이넌의 연인처럼 보이는 것에 온 관심이 쏠려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앞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내 삶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도망을 꿈꿀 때와 같이 고달프고 매사 조마조마했다.

“어머, 공작님.”

반가운 기색으로 레이넌에게 다가가며 인사하자 그는 손을 내밀었다. 손을 올리자 레이넌은 살짝 힘주어 끌어당겼다.

작은 힘이었지만 그와 나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약혼 제의를 수락한 이후로 너무 친밀하게 다가오는 레이넌의 태도에 화들짝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금 더 가까이.”

티 나게 놀라다 보니 이제는 이렇게 준비할 시간을 주는 모양이었다.

“이미 충분히 가까운데요.”

아주 미약하게 반항을 해 보았지만 레이넌은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이제는 너무도 잘 알았다.

“충분하다니. 이 정도는 돼야 충분하다고 할 만하지.”

그는 나를 붙든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조금 더 앞으로 끌어당겼다.

결국 몸과 몸이 서로 맞붙었고 그제야 레이넌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웃어 봐. 조금 더 자연스럽게.”

놀라지 않은 것만 해도 나에겐 대단한 발전이었다. 그 역시 내게 큰 기대가 없었는지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오늘 에드윈은 어땠지?”

잘 달래 주었지만 그럼에도 에드윈은 한동안 내가 떠날까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레이넌과 만나는 횟수를 늘리기 시작하고서야 에드윈은 안정을 찾았다.

어쩐 일인지 이제 에드윈은 내가 떠나지 않으리라 확실히 믿고 있었다.

덕분에 전처럼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에드윈은 하루하루 쑥쑥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역시 에드윈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표정부터 달라지는군.”

조금은 서운한 기색이 레이넌의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서운하다니. 어째서?

너무 붙어 있는 탓에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레이넌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봤다.

순간 뒤통수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작은 힘이 나를 앞으로 끌어당기자 그의 가슴에 기댄 모양새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 눈에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인가.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

레이넌은 한순간에 다가왔던 것처럼 훌쩍 멀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뒷모습은 꽤 멀어져 있었다.

“결국 확인은 못 했네.”

서운한 목소리라니. 잘못 들은 것이 분명했다.

레이넌이 나에게 서운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꾸만 신경 쓰이는 건 왜일까.

“르네.”

레이넌에게서 벗어난 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손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멍하니 걷는 동안에 어느새 에드윈의 침실에 도착했다. 침실의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빈이 나타났다.

“오늘은 말 좀 해 봐.”

처음엔 떠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묻던 마빈은 이제 매일 공격적으로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로만의 지시대로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었던 나는 매번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오기 마련이었다.

“나는 뭐라 할 말이 없다니까?”

“요즘 공작님 옆자리에 앉아서 차를 마신다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눈에 은근히 띄는 장소에서 티타임을 가지는 일이 많아졌다.

은근히 눈에 띄는 만큼 소문은 은밀히, 그리고 그만큼 빠르게 퍼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소문에 어두운 나조차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은 심하게 몰려들었다.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던 사람들이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하더니 모두 같은 것을 물어 왔다.

레이넌과 대체 무슨 사이냐고.

뭐라 확답을 줄 수 없는 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고, 그게 소문을 더 크게 키운 듯했다.

유독 집요하게 질문하는 마빈 덕분에 이번만큼은 나도 소문에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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