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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30)화 (30/129)

“에드윈 님이 그런 얼굴로 붙들었으니 도망가진 않겠지.”

로만은 걱정을 떨쳐 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노크까지 하고 들어왔지만 레이넌은 로만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뭔가 언짢은 기색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야기가 잘 안 되었나.

먼저 르네에게 물어볼 것을 그랬다는 후회를 삼키고 그는 조심스럽게 레이넌을 불렀다.

“공작님?”

“그래.”

여전히 시선은 주지 않았지만 다행히 대답은 돌아왔다.

“르네와 이야기는 좀 해 보셨습니까?”

“응.”

“그런데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으십니까?”

“로만.”

“네, 공작님.”

사뭇 진지한 부름이 어색하게 들렸다. 로만은 긴장한 채로 몸을 꼿꼿이 세우며 대답했다.

“르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나?”

“네?”

이런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게다가 이제 와서 묻기엔 더욱이 늦은 질문이 아닌가.

“결혼하자고 했더니 질색하더군. 부끄러워한다고 여기기엔 꽤 진심이었어.”

“결혼이요? 떠나지 않게 설득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결혼도 그녀를 설득할 방법 중 하나이긴 하지.”

갑작스러운 결혼 이야기에 르네가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런 모습에 레이넌은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르네와 결혼은 좀…….”

“그런가. 나는 여러모로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에드윈이 좋아하고 따르는 데다가 분명 나를…….”

레이넌은 설명을 하다 말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속으로 삼켜 버린 이야기가 뭔지 알 것 같았던 로만은 조용히 그를 기다렸다.

혹시나 갑자기 화를 내면 피할 생각으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하지만 레이넌의 반응은 로만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반대였다.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진 모습은 그의 곁을 오래 지켰던 로만에게도 낯선 모습이었다.

그 정도로 충격이었나. 하긴, 레이넌은 르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던 터라 로만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레이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에 르네에 대한 소문이 돈다고 했었지?”

“네.”

“이 소문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혹시?”

“그래. 벨라 크라우스보다 르네가 훨씬 낫지 않겠나. 사랑에 눈이 멀어 보이는 것 없는 귀한 남자가 되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니, 어쩌면 벨라를 택하는 것보다 훨씬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르네였다.

“르네가 할까요?”

“생각해 본다고 하더군.”

레이넌의 재촉에도 잠시 머뭇거리던 르네의 대답은 바로 그것이었다. 조금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아마 하겠지.”

“결혼을요?”

“아니, 약혼.”

역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로만 자신이 있었어야 했다. 도저히 어떤 흐름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설명하셨습니까?”

“간단히. 약혼이 필요하다, 르네가 적임자인 것 같다, 에드윈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 정도면 필요한 이야기는 모두 한 셈이었다. 물론 르네가 이해할 수 있게 전달이 되었는지는 나중에 따로 확인을 해야 하겠지만.

“충분한 보상과 정해진 기한을 제시했고, 그 후엔 원하면 다른 곳으로 가도 되고, 여기서 계속 일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지.”

레이넌의 건조한 설명을 들은 로만은 오히려 안도했다. 차라리 이런 조건들을 건네는 것이 르네에겐 덜 무섭게 느껴질 것이었다.

그냥 결혼이나 약혼을 하자고 했다면 아마 르네는 다시 도망을 계획했을지도 몰랐다.

그 와중에 상황을 이렇게 유리하게 풀어낸 레이넌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르네만 결정하면 되는 일이군요.”

“아마 할 거야. 다만 르네도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안 했는데…….”

“그건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일단 티 나지 않게 르네를 경호할 사람부터 찾아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사실 결혼이나 약혼을 거절한 것보다…….”

“네.”

“내가 진짜 자기를 죽일 거라고 믿었다는 게 꽤 충격이군.”

레이넌은 허탈하게 웃었다. 르네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가지만, 한편으로는 레이넌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레이넌이나 로만에 대해 떠도는 소문은 꽤 흉흉했지만 사실 그들은 그 정도로 흉악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실제와 다른 이야기가 돌아도 딱히 바로잡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이미지를 이용해 일을 쉽게 처리해 오기도 했다.

“그보다 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합니까?”

르네가 갑작스럽게 도망을 결심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에린을 처리하라는 말을 들었다더군.”

“아…….”

르네로서는 충분히 착각할 만한 상황이었다.

“일단 르네가 하겠다고 할 경우에 맞춰 준비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네가 반대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심란한 와중에도 지시를 내리는 건 잊지 않는 레이넌이었다.

로만은 그대로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레이넌의 생각을 정리해 줄 수 있는 건 로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로만도 꽤 마음이 복잡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의 대화는 잘 이루어졌고,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앞으로 여러모로 까다로워질 것 같단 말이지.”

로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당장 필요한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

도망을 준비하느라 한동안 긴장을 놓치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허무하게 실패한 탓일까.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로 터덜터덜 한참을 걸었다.

내일부터 고생하겠다던 로만의 걱정이 예언처럼 느껴져 몸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일단 좀 쉬고 싶긴 했지만 발은 자연스럽게 에드윈의 침실로 먼저 향했다.

설명과 사과를 담은 편지는 내가 놓아둔 그대로 있었다. 심지어 뜯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편지를 보고 바로 쫓아온 게 아닐까 했던 내 예상이 빗나갔다.

하긴, 이미 잠든 에드윈이 깨서 편지를 읽고 레이넌까지 데리고 그 자리에 나타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긴 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것도 좀 물어볼걸. 오늘 레이넌은 유난히 유한 분위기를 풍겼었는데.

레이넌을 떠올리자 다시금 머릿속이 복잡해져 왔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약혼이라니.”

자연스럽게 걸음은 에드윈의 침대 쪽으로 향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에드윈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에드윈의 이불을 잘 여며 주고는 조심스럽게 침실을 나와 내 방으로 돌아왔다.

“에드윈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레이넌이 친절히 설명을 잘해 준 덕에 그의 뜻이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정말 다행이지만 다른 의미로 고민이 넘쳐났다.

“아무리 그래도 약혼인데.”

최대한 원작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레이넌의 결혼은 원작에 없었다. 게다가 나와의 약혼이라고 하면 오히려 원작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레이넌이 에드윈에게 무심했던 이유였다. 그건 정말 에드윈을 방치했던 것이 아니라 그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하긴, 로만이 에드윈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정말 레이넌이 에드윈을 방치하려고 했다면 로만이 그렇게나 챙기지 않았을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이 몰려오자 로만의 말이 조금은 달리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을 때 상담하러 오라는 건가.

그의 호의를 마냥 의심만 했던 것이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아, 그렇다고 로만한테 가서 약혼을 하는 게 나을까요, 그렇게 물어볼 수도 없잖아.”

뭔가 답은 이미 정해진 것 같았지만 쉽게 결정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이 방에서 다시 잠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익숙한 침대에 누우니 조금 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한순간에 머릿속에 지나갔다.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다.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 소원이라는 걸 알지만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본 후 눈을 감았다.

푹 쉬고 싶었던 것과는 달리 제대로 잠들지 못한 밤이 지나가고 다시금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하루의 시작이기도 했다.

“르네?”

에드윈은 눈을 뜨자마자 나부터 찾았다. 옆에 앉아 그가 깨기를 기다렸던 나는 에드윈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네, 에드윈 님.”

잠시 눈을 비비며 나를 확인하던 에드윈은 그대로 내 품에 안겼다.

“르네가 가 버린 줄 알았어.”

“죄송해요, 에드윈 님.”

에드윈의 등을 쓸어 주며 나는 한참 동안 그를 안심시켰다.

“이건 어제 써 둔 편지인데요. 이제 필요 없어졌지만 그래도 읽어 주세요.”

읽지 않았던 편지를 어떻게 할까 꽤 많이 고민했었다. 그래도 에드윈이 읽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편지?”

“네. 제 마음을 담아 썼어요. 절대 에드윈 님을 상처 주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냥 상황이 조금 그랬어요.”

“르네…….”

“그때의 저는 떠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에드윈 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제 일이었어요.”

“그랬구나.”

“편지에도 써 두긴 했지만 절대로 에드윈 님이 뭔가 잘못하거나 나빴던건 아니라는 걸 꼭 알아주셨으면 해요.”

“응.”

내 말에 에드윈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을 내내 탓했을 것이 분명했다.

“죄송해요. 어제 공작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가 오해를 크게 해서…….”

“그럼 안 떠나도 되는 거야?”

“네.”

“그거면 됐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고맙습니다.”

그는 편지를 품에 안은 채 환하게 웃었다.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 못 들었던 지난 밤이 무색할 정도로 에드윈의 곁에 있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떠나 버렸다면 아마 아주 오래오래 에드윈이 마음에 남아 있었을 테니까.

나 살자고 에드윈을 떠나려 했던 것이 많이 미안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는 떠나지 않으면 뭘 해도 다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에드윈의 착한 심성이 또 내 죄책감을 더 키웠다.

“편지는 이따가 혼자 읽어 볼게.”

“네.”

안심한 듯 일상을 시작하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은 남았는지 에드윈은 틈만 나면 눈으로 나를 확인했다.

“그게, 잠깐 다른 데 본 사이에 르네가 없어져 버릴까 봐 무서워서…….”

“안 그럴 거예요. 혹시라도 제가 여기를 떠나게 된다면 에드윈 님께 제일 먼저 말씀드릴게요.”

“정말?”

“약속할까요?”

내가 먼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는 다른 때보다 강한 힘으로 손가락을 걸어 왔다.

약속의 힘은 꽤 컸다. 간간이 나를 확인하기는 했지만 오전보다 그의 불안은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혹시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마빈은 아침부터 내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에드윈을 보며 의아한 눈을 했다.

내내 궁금한 얼굴을 하고서 묻지 못하다가 에드윈이 글공부를 하러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겨우 입을 뗐다.

“아니? 왜?”

누군가에게 알릴 만한 일은 아닌지라 최대한 뻔뻔한 얼굴로 되물었다. 다행히 그럴싸해 보였는지 마빈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에드윈 님이 오늘따라 유독 너를 찾는 것 같아서.”

“그래?”

“응.”

“왜 그렇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래? 이상하네.”

마빈은 여전히 의문을 거두지 못한 듯했지만 그래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르네.”

“로만 님?”

“공작님 뵈러 갈 시간이야.”

“왜 직접 오셨어요?”

“가면서 이야기하지.”

나름 잘 얼버무렸는데 갑작스러운 로만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에드윈의 침실을 나서기 직전 본 마빈의 눈에는 의문이 아닌 의심이 담겨 있었다.

또 어떻게 발뺌을 해야 하나.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어떻게 들었는지 한숨을 내뱉자마자 로만은 멈춰 서서 나를 살폈다. 그의 질문을 듣고 나는 먼저 주변부터 살폈다.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라 소리를 죽여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혹시 도망갈까 봐 일부러 오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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