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죽이려고 한다고 믿었다니.”
“죄, 죄송합니다.”
뭔가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나도 모르게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이유로?”
“그러니까, 이런저런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해 봤을 때 분명 그렇다고…….”
“이런저런 분위기라는 게 뭐지?”
레이넌은 정말 이유가 궁금했던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그의 집중한 얼굴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지난번에 로만과의 대화를 엿들었음을 실토했다.
“어쩐지 그때 누군가가 있는 것 같더라니.”
“네?”
“아니야. 그게 왜 본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
“에드윈 님에게 영향을 줄 만큼 가까이 있는 여자는 저뿐이니까요.”
“그렇군.”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소파에 기댔다.
“정말 오해가 있었군. 누군지 말해 줄 수는 없지만 그건 르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야.”
“네?”
이제 몰래 대화를 엿들은 것에 대해 혼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레이넌은 그저 내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아…….”
그의 말을 이해하고서 뒤늦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럼 이제 내 대답은 들은 셈이겠군.”
“무슨 대답 말씀이신가요?”
“살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 정말 죄송합니다. 혼자 착각해서 소란스럽게 했습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모양이군.”
“그런데 제가 떠날 건 어떻게 아셨어요? 게다가 오늘인 건 또 어떻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면 평소처럼 행동했어야지.”
평소처럼 행동했는데! 그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간의 노력을 한순간에 짓밟아 버리는 레이넌의 말에 순간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처럼 말이야. 눈에 띄게 행동이 이상했으니 모를 수가 없지.”
그는 내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자 레이넌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제법 티가 잘 난다고. 지금만 해도 그간 평소처럼 행동을 잘했다고 생각했던 거 같은데?”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아니면 정말 내가 그렇게나 티를 내고 다닌 건가.
“그럼 정말 죽이지…… 않으실 거죠?”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처리라는 말 말이지. 애초에 죽인다는 게 아니라 근무 장소를 옮긴다는 뜻이었어.”
“근무 장소를 옮긴다고요?”
“그래.”
아니, 그런데 처리라는 말은 왜 쓰고, 왜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해.
레이넌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도대체 그간의 난리는 무엇을 위함이었나.
“오해는 대강 푼 것 같고. 이제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어 볼까?”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들었지?”
“겨, 결혼하자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지만 뭐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이 안 되는 그 소리를 직접 꺼내야 하는 나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대로 들었는데.”
“네? 정말 결혼하자 하셨다고요?”
난 다시 한번 내 귀를 의심했다. 이런 내 모습이 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레이넌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짐작하지도 못한 이야기라…….”
나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대답은?”
“아니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간 탓에 마치 물음처럼 들리긴 했지만 레이넌은 내 뜻을 이해한 듯했다. 조금 전보다 더 눈에 띄게 얼굴이 구겨졌다.
딱 잘라서 거절한 것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일까.
“어째서?”
“어째서냐니…….”
레이넌은 내 거절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뜬금없이 결혼하자는데 손을 덥석 잡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라도 할 줄 알았나.
분명 이 상황에 내가 당황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얼핏 보기엔 레이넌이 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말 그대로야. 왜 거절하지?”
“애초에 공작님과 제가 결혼을 할 정도의 사이도 아니고…….”
이걸 왜 설명하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레이넌은 납득할 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보다 크라우스가의 아가씨와 결혼하실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제게 그런 걸 물어보시나요?”
마음대로 착각한 건 잘못했어요. 제발 그 말을 거둬 주세요.
레이넌과 결혼이라니. 언젠가 벨라와 그의 결혼 생활을 떠올려봤던 일이 있었다.
그 삭막하고 건조한 풍경에 내가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니.
아까 레이넌과 에드윈을 만났을 때 놀라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밖을 향해 뛰는 것이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일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오해겠군.”
“오해요?”
“그래. 나는 벨라 크라우스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 그런 소문이 도는 걸 알지만 그대로 내버려 둔 것뿐이지.”
“후작가이긴 하지만 크라우스가는 재력도 상당하고 입지도 좋은 편이라……. 저보다는 크라우스가의 아가씨가 훨씬 상대로 어울리시는데요.”
나는 레이넌의 상대가 되기에 부족함을 어필할수록 그의 표정은 더욱더 험악해져 갔다.
“전에 보니까 확실히 미인에…….”
“르네.”
“……네.”
“나는 그대에게 나와 어울리는 상대를 찾아 달라 한 것이 아니야.”
“그렇죠.”
“결혼이 너무 갑작스럽다면 약혼도 좋아.”
“그것도 결국은 결혼하기로 약속하는 거잖아요…….”
한탄처럼 흘러나온 내 말에 레이넌은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뭔가 생각과 일이 너무 다르게 흘러간다는 듯이.
레이넌은 그리고 한참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일단 대화를 마무리한 것이 아니라 자리를 일어날 수 없었던 나는 그대로 기다렸다.
간간이 그의 시선이 지긋이 이쪽에 머무르기도 했다.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로.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던 레이넌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조건부터 들어 보고 결정하지.”
자네, 지금 회사는 그만두고 우리 회사로 옮기지 않겠나.
꼭 그런 느낌으로 레이넌은 조건을 또박또박 읊기 시작했다.
“기간은 일단 일 년. 일 년 뒤에 연장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지.”
첫 조건부터 약혼이라기보다 이직에 가깝다는 내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레이넌은 곧바로 두 번째 조건을 말했다.
“월급은 두 배로, 그리고 약혼이 끝나고 원하면…….”
“원하면요?”
레이넌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
“떠나도 좋아. 물론 월급 외에 돈이든 뭐든 필요한 건 부족하지 않게 챙겨 주지. 단, 에드윈에게 제대로 인사는 하도록.”
“떠나도 좋다고요?”
“물론 저택에 남아도 좋아. 에드윈의 보모든 원하는 자리로 배치해주지. 그대가 바라는 쪽으로 선택하면 돼.”
“공작님,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뭐지?”
“지금 약혼에 대해 말씀하시는 게 맞죠?”
“그래.”
레이넌이 아는 약혼의 정의가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인지, 그와 내가 사는 세상이 다른 탓인지 헷갈렸다.
아무리 봐도 약혼이라기보다는 스카우트인데.
“나는 지금 약혼이 필요해. 그리고 아무리 봐도 르네만큼 적임자가 없어.”
“왜 하필 저죠?”
“나는 지금 사랑에 눈이 멀어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사람으로 보이면 좋거든.”
사랑에 눈이 멀어? 사리 분별을 못 해?
무엇 하나 그와 어울리는 어휘는 없었다.
“일단 에드윈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군.”
“에드윈 님을 위한 일이라니요?”
“로에리안의 후계자에게는 언제나 죽음이 가까이 있지. 그런 이야기는 들어 봤나?”
“아니요.”
들어 본 적 없었다. 원작 속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에 남아 있진 않았다.
여기에 와서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이 별로 없어 소문에 어두웠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제국에서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처음 듣는다니 놀랍군.”
“아,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나만 모른다는 건 이상하니까 재빨리 덧붙였다.
다행히 레이넌은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설명을 이어 갔다.
“로에리안의 후계자들은 알 수 없는 병을 앓거나 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죽곤 했다.”
“아…….”
그건 나 역시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붙은 소문이었던가.
“에드윈에게 아직 위협이 없는 건 그 아이가 후계자라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요즘 분위기가 달라졌어.”
에드윈이 이런저런 수업을 받기 시작하며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게 에드윈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뜻일 줄이야.
“내가 시녀에게 빠져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한다고 사람들이 믿으면 에드윈이 후계자가 될 거라 믿는 사람 역시 줄어들겠지.”
그래서 벨라보다 내가 더 적임자라는 이야기였구나.
“이제 다른 대답을 할 마음이 생겼나?”
***
떠나지 않겠다는 르네의 대답을 듣고도 에드윈은 좀처럼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그런 에드윈을 달래는 건 로만의 몫이었다.
“르네가 직접 말한 거니까 믿어 보시죠.”
“나는 르네를 믿어. 그런데…….”
“네.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일단 오늘은 주무시고 내일 르네를 만나면 훨씬 나을 겁니다.”
에드윈을 겨우 달래서 잠든 모습까지 보고 나오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에드윈의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로만은 뛰듯이 레이넌의 집무실로 향했다.
르네와 레이넌, 둘이서 중요한 이야기를 잘 끝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로 눈치가 여러모로 없는 두 사람이 또다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에드윈 앞에서 의연한 얼굴을 했지만 불안한 건 로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로만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이야기를 끝낸 모양이었다. 집무실 앞에서 막 그곳을 떠나려는 르네와 마주쳤다.
“정말 오늘 밤이었을 줄이야.”
르네를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에드윈의 감이 이렇게 맞을 줄은 몰랐다. 레이넌은 그걸 알고 에드윈의 장단에 맞춰 준 것일까.
“네?”
“아니야. 그보다 앞으로…….”
모처럼 사람이 진지하게 조언을 하려는데 르네는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뒤로 물러났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는.
하긴, 지난번에도 좋은 마음으로 조언을 하려고 했는데 여러 사람 힘들게 됐었지.
“그게 아니라……. 앞으로 뭔가 모르는 일이 있을 땐 언제든 나를 찾아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조금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르네의 얼굴에 떠오른 경계심만 한층 더 강화될 뿐이었다.
“이제 와서는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에 내가 한 조언은 취소하지.”
“네?”
“나도 아주 가끔은 공작님의 의도를 착각하고는 해. 미안해, 헷갈리게 해서.”
깔끔한 로만의 사과에도 르네의 경계심은 좀처럼 잦아들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아. 일단 너는 오늘 도망가려다가 잡혔지?”
“……그랬죠.”
“당분간 도망갈 생각은 할 수 없을 거 아냐. 에드윈 님 때문이라도.”
“……그렇겠네요.”
팽팽하던 경계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대신 풀 죽은 목소리로 르네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한테 오란 말이야. 특히 이런 일을 저지르기 전에.”
“왜요?”
“네 사소한 행동 하나에 나 역시 꽤 귀찮아지거나 고달파질 것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 우리 모두를 위해 그렇게 하자.”
경계심은 한풀 꺾였지만 그래도 르네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어차피 너도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것보단 나을 텐데.”
“그건 그렇죠…….”
“일단 나는 매우 진심이고 달리 나쁜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 꼭 기억해 둬.”
“알겠습니다.”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이 이상 그녀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일부터는 더 고생할지도 모르겠네. 얼른 돌아가서 쉬어.”
“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르네는 한층 피곤함이 짙어진 얼굴로 인사를 했다.
가방을 꼭 안고 뛰어가는 뒷모습이 이대로 다시 도망을 가는 게 아닐까, 아주 잠시 염려스러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