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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28)화 (28/129)

“저한테도 물어본 적이 있어요. 혹시 아버지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생길 거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냐고.”

에드윈의 말에 레이넌은 그것 보라는 듯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도 잠시였다. 곧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레이넌의 시선이 에드윈에게로 옮겨 갔다.

빤히 에드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담긴 의미심장한 기운을 느낀 로만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보다 레이넌이 더 빨랐다.

“그래. 르네가 에드윈을 유독 예뻐했지.”

“그렇긴 한데,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로만의 질문은 들리지 않는 듯 레이넌은 에드윈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에드윈.”

“네.”

“르네가 떠나는 게 싫은가?”

“네.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어요.”

레이넌의 부름에 잠시 움찔했던 에드윈은 르네의 이름이 나오자 힘주어 대답했다.

그런 에드윈의 모습에 만족한 듯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네 도움이 필요해. 어때?”

“할게요!”

뭔지도 모르는 일에 에드윈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공작님?”

로만의 간절한 부름은 부자에게 닿지 않는 듯했다.

어느새 서로에게 집중한 두 사람은 진지한 눈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결혼에 관한 소문을 듣고 르네가 상처를 받은 것 같군.”

“결……혼이요?”

“그래. 게다가 그 소문의 상대를 르네가 직접 보기도 했으니 더 슬펐을지도.”

아무리 똑똑하다곤 하나 결혼이나 사람 간의 감정에 관한 것까지는 모두 깨우치지 못한 에드윈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이넌은 뜻밖에도 관대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아직은 그런 것까지 모두 파악하지 않아도 돼. 천천히 알면 되는 일이야.”

‘암요. 어른인 공작님도 미숙하신데 에드윈 님은 아예 몰라도 괜찮습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생각하던 로만에게 따가운 시선이 닿았다.

이제까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던 레이넌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로만은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제가 소리를 내어 말씀드렸습니까?”

“아니. 하지만 뭔가 불손한 생각을 하는 것만큼은 명확하게 보여서.”

“죄송합니다.”

“표정 관리도 예전 같지 않군.”

“주의하겠습니다.”

넙죽넙죽 대답하는 로만을 향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레이넌은 다시 에드윈에게 집중했다.

“좋아. 그럼…….”

“그런데 아버지는 왜 르네가 떠나지 않길 바라는 건가요?”

에드윈의 맑은 목소리에 레이넌이 눈에 띄게 멈칫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에드윈을 바라보며 레이넌은 뭔가 설명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다시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에드윈은 착실하게 레이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만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에드윈의 등장으로 끝맺지 못했던 제 질문을 떠올렸다.

혹시 르네를 좋아하십니까?

에드윈이 나타나기 전, 로만이 레이넌에게 물으려던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드윈이 던진 질문의 답은 제 질문의 답과 같을 것이다.

로만의 입에서는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제까지 고용주의 실연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공작님, 에드윈 님.”

당장 답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버린 로만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일단 확실하진 않으니 조금만 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장 내일 밤에 떠날 것 같은데?”

확신에 찬 듯한 에드윈에 말에 로만이 되물었다.

“왜 내일 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음……. 느낌이 딱 그래.”

내일이라고 하니 이래저래 여러 가지 그럴듯한 가능성이 로만의 머릿속에 바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르네를 붙들 것만 같은 에드윈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확실치 않으니…….”

“내일 밤이라. 신중하게 접근할 시간이 없군.”

로만의 마음을 몰라주는 건 에드윈만이 아니었다. 한술 더 뜨는 레이넌의 말에 로만은 입을 다물었다.

레이넌도, 에드윈도 로만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생각이 없는 건 분명해 보였다.

로만은 다급하게 그들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눈에 띄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에드윈을 보고 잠시 멈칫한 순간 레이넌이 먼저 말을 꺼냈다.

“괜찮다. 시간이 얼마 없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떠나지 않았으니까 충분히 잡을 수 있어.”

레이넌의 말에 에드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해 볼까?”

두 사람은 로만이 있다는 것도 잊고 소파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

원래 공기가 이렇게 차가웠던가. 따뜻한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시린 기운이 느껴졌다.

미소가 사라진 레이넌의 얼굴에 감도는 냉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가까운 곳에 있는 레이넌의 시선이 닿았지만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지금 뭐라고 했지?”

결혼이라니. 무슨 말을 어떻게 잘못 들어야 그런 단어가 나오지?

눈만 깜빡이는 나와 달리 레이넌은 금세 상황 파악이 끝난 모양이었다.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가더니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려 달라고?”

역시나. 분명 잘못 들었어! 저런 얼굴로 프러포즈라니!

짙은 어둠 속에서 스산히 느껴지는 레이넌의 얼굴은 가늘고 예리한 달빛이 그의 기분을 그대로 투영한 탓인 것만 같았다.

“르네?”

대답을 기다리는 레이넌의 눈빛이 조금씩 살벌해지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제대로 매달려야 했다.

“처리는 하지 말아 주세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살겠습니다.”

비장한 내 말에 레이넌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꽤 유쾌한 상황을 마주한 듯 가벼운 웃음이었지만 그의 기분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조금 전보다 더 언짢은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그냥 잡히더라도 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물러나려는데 그조차 쉽지 않았다.

여전히 스커트를 꼭 붙들고 있는 에드윈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레이넌이 손이 내 어깨를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이렇게나 따르는 보모를 죽일 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레이넌이 말했다. 내 눈에 여전히 불신이 어려 있었던 걸까.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한 모양이군. 누군가가 쓸데없는 소리라도 지껄였나? 처리라는 건 또 무슨 말이고?”

어느새 잔잔해진 그의 목소리는 달래는 것처럼 들렸지만 분위기 자체는 여전히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조금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레이넌의 눈빛이 아주 잠시 날카로워졌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자 그는 다시금 상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어째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볼까?”

……그거 정말 이야기로 푸는 게 맞나요? 그리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오해일까요?

잡히더라도 낮에 잡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어둡고 고요한 밤보다 더 조용히 사람을 압박하는 레이넌을 앞에 두고 있으니 너무 무서웠다.

“에드윈.”

갑자기 레이넌이 에드윈을 부르자 내 몸이 움찔거렸다.

혹시 괜한 불똥이 튀는 건가 싶어 걱정스러운 나와 달리 에드윈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르네와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야.”

“오해?”

“그러면 르네는 떠나지 않는 거예요?”

나의 작은 되물음은 에드윈의 밝은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목소리보다 더 환한 얼굴로 나를 보는 그를 보니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대신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레이넌이 에드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렇지.”

“다행이다!”

당사자의 의견은 전혀 듣지 않은 부자의 북 치고 장구 치는 장단에 나는 그저 그들을 번갈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에드윈에게 내가 떠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건 그럴 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내 일이 분명한데도 나는 좀처럼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렇구나.”

에드윈은 안도한 듯 웃으면서도 내 스커트를 붙든 손을 좀처럼 놓지 못했다.

어색하게 에드윈을 따라 웃고만 있자 레이넌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니 걱정 말고 이만 침실로 돌아가도록 해. 르네는 떠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마지막 물음이 향한 곳은 나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건 다정한 목소리 뒤에 느껴지는 단호함 때문이 아니었다.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 달라는 듯 애절하게 와 닿는 에드윈의 눈빛 때문이었다.

“정말?”

“네. 공작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봐요.”

그렇게 몇 번이고 에드윈에게 확답한 후에야 그는 겨우 꼭 붙들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에드윈 님.”

어둠 속에서 기척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랐다. 로만까지 함께였던 모양이었다.

“르네, 내일 봐. 꼭 내일 또 보는 거야.”

“네. 내일 뵈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 에드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만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도 이제 오해에 대해 이야기를 하러 가 볼까?”

“……네.”

힘들게 챙긴 가방을 꼭 끌어안고 레이넌을 따라가는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 띄면 퍽 우스웠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여전히 지나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누군가의 시선보다 당장 레이넌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더 걱정스러웠다.

“앉지.”

“네.”

그의 집무실에 도착하고서도 레이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정도면 이제 이곳은 익숙한 공간이라기보다 처음보다 더 불편한 곳일지도 몰랐다.

유독 여기서 긴장할 일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무거운 침묵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봤다.

“살려 달라는 게 무슨 의미였는지부터 시작해 볼까?”

“그게…….”

“내가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나?”

레이넌이 작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지금도 충분히 그런 분위기이신데요.

내가 아마 조금만 더 용감했더라면 그에게 그렇게 대답했을지도 몰랐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웃는 것.

표정은 안 봐도 뻔했고, 내 귀에 들리는 웃음소리까지 어색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레이넌도 부자연스러움을 감지한 것일까.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설마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겠지?”

조금 전보다 대답하기 더욱더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만큼 내 웃음에 담긴 어색함은 점점 더 커졌다.

레이넌은 표정을 지운 채로 나를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 나에게서 더는 웃음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어떻게든 대답을 직접 하라는 그의 무언의 압박에 나는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다.

“네. 분명 그러신 줄 알고…….”

그가 바랐던 대로 직접 대답을 했지만 레이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우 사라진 침묵이 다시 내려앉은 것을 느낀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서 그를 살폈다.

표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의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조금은 충격받은 듯한…….

충격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순간 떠오른 생각을 지우려 고개를 저었다.

잠시 굳은 듯 가만히 있던 레이넌은 나를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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