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레이넌의 목소리가 그들이 환영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니, 왜 두 사람이 바로 여기, 그것도 하필 지금 나타난 거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외출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하하.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누가 들어도 도망가는 것이 분명한 모습을 하고서 외출이라니.
“그렇군.”
레이넌의 시선은 내 손에 들린 여행 가방으로 향했다.
일단 뛰고 볼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공작저를 나갈 수 있는 문은 레이넌과 에드윈의 뒤에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뛰어 봤자 어차피 공작저 안이 아닌가.
혹시나 다른 방법이 있진 않을까 재빨리 시선을 여기저기 옮기는 나를 보고서도 두 사람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시선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뒤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레이넌이 에드윈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에드윈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나에게로 달려왔다.
“르네, 떠날 거야?”
내 스커트를 꼭 붙든 손이 오늘따라 작고 애처롭게 보이는 건 아마 달빛 때문이겠지.
“에드윈 님…….”
편지에 써 두었던 이야기를 다시 내 입으로 말해 주려고 했지만 에드윈과 눈이 마주치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내가 나쁜 아이라서?”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는 에드윈을 보고 나는 얼른 허리를 낮춰 그와 눈을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에드윈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에드윈 님은 언제나 상냥하고 훌륭하셨어요.”
“그런데 왜 나를 떠나려는 거야?”
“에드윈 님을 떠나는 게 아니라…….”
내 말에 결국 에드윈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웃을 때마다 부풀었던 빵빵한 볼을 타고 서러운 눈물이 흐르자 안쓰러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 주며 그를 달랬다.
“나는 르네가 좋아.”
“저도 에드윈 님을 좋아해요. 얼만큼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죠? 정말이에요.”
“나는 르네가 너무너무 좋아서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
“에드윈 님…….”
떼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바람을 말하는 에드윈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에드윈이 이렇게 바라니 아버지 된 도리로 들어줘야겠군.”
난데없는 레이넌의 말에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언제 움직였는지 레이넌은 내 앞에 서 있었다.
애처로운 에드윈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다른 날보다 어두운 밤이라서 그럴까. 레이넌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아 아마 웃고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 웃음이 과연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가 문제였다. 레이넌을 앞에 두고 긴장에 몸이 굳었다.
그걸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징조로 여겼던 것일까.
에드윈은 스커트를 붙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오래오래 같이 살 방법이라……. 딱 들어맞는 게 하나 있군.”
천천히 올라온 손은 내 얼굴에 닿았다. 그의 목소리보다 은근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공포에 질린 내 얼굴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짙은 미소를 보였다.
“바라는 게 있으면 말로 해야지. 이렇게 시위를 할 게 아니라.”
말로 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지금 얼굴은 당장이라도 어떻게 할 것만 같은데요.
상냥한 목소리가 오히려 더 무섭게 다가온다는 걸 레이넌은 알까.
“르네, 말해 보래도.”
뭐든 들어주겠다는 듯 달콤한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매달리면 늦지 않을까.
레이넌은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그는 더 재촉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듯.
이미 그의 손에 잡혀 있는 이상 달리 좋은 방법이 없었다. 일단 매달려 보기라도 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겨우 마음을 먹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의 고민이 끝났음을 알아차린 듯 레이넌은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다고 한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할 자신은 없었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사, 살려 주세요!”
“그래. 결혼하지.”
동시에 나온 목소리가 조용한 밤공기를 뚫고 한데 겹쳐졌다.
그래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감았던 눈을 뜨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레이넌이 보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지금 뭐라고……? 결혼?
내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되새긴 그 순간이었다. 레이넌 역시 내 말을 이제야 이해한 듯했다.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
레이넌이 르네가 떠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그 전날이었다.
로만과 함께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시녀는 어떻게 됐지?”
“서쪽 별관으로 옮겼습니다. 본관과는 접촉할 일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계속 지켜보도록.”
“알겠습니다.”
사무적으로 대화를 이어 가던 레이넌은 끝내 입을 닫았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은 모두 그의 관심사에서 벗어난 것들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내내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린 듯 보였으니까.
지금도 그랬다. 중요한 업무에 대한 건 대강 흘려듣더니 정작 모든 대화가 끝나자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요즘 르네가 이상해.”
‘역시 르네에 관한 것이었나.’
로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래도 이상했지만, 요즘은 한층 더 이상하군요.”
“이유가 뭘까.”
“글쎄요. 딱히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는데요. 다른 때보다 더…….”
겁을 먹은 것 빼고는요.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레이넌은 여전히 그녀가 담대한 여자라 알고 있었다.
그러니 로만의 말에 동의하기는커녕 앞으로 그가 하는 말을 믿지 않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다른 때보다 더?”
“아닙니다. 에린이 했던 말 때문에 공작님 앞에서 조심스러운 건 아닐까요?”
“그런 거랑 또 느낌이 다른데. 얼마 전부터 뭔가 미묘하게 초조해 보인단 말이지.”
‘아무래도 르네에 관한 관심이 남다른 것 같은데…….’
레이넌이 누군가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이렇게 고민할 인물이던가.
르네를 그저 귀여운 동물과 동급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로만은 이마를 짚고 선 채로 로만이 말했다.
“그보다 공작님.”
“응.”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기계적인 대답은 그가 로만의 말에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레이넌은 여전히 르네가 이상한 원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상태였다.
방해하기엔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으나 로만 역시 지금이어야 했다.
레이넌에게 르네가 어떤 존재인지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이제는 확실히 해야 했다. 제 안위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공작님은 르네를…….”
“르네?”
르네의 이름이 들리자 레이넌의 시선이 곧장 로만에게 닿았다. 이제까지 시큰둥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역시. 답은 듣지 않았으나 들은 것과 다름없었다.
로만이 작게 한숨을 내쉰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의 난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윈 님이십니다.”
“르네와 함께 왔나?”
“아닙니다. 혼자 오셨습니다.”
레이넌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로만 역시 당연히 르네와 왔겠거니 생각했기에 의아한 눈으로 레이넌을 바라봤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하지.”
레이넌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드윈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다른 날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에드윈은 꽤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의 힘으로 어떻게 하기 어려운 건 어른과 상의하는 거라고 르네가 알려 줘서 아버지께 왔어요.”
난데없는 말에 로만도, 레이넌도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에드윈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잔뜩 힘이 들어간 다부진 모습과는 달리 시무룩한 목소리가 작은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르네가 떠나려는 것 같아요.”
뜬금없는 에드윈의 말에 레이넌과 로만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지?”
“에드윈 님,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에드윈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얼마 전에 르네가 방 정리 때문에 중요한 물건을 챙겨 놨다고 했는데 아직도 가방은 그대로 있어요. 정리는 다 했는데도요.”
“그러니까 르네가 가방을 챙겼다는 건가?”
“네.”
레이넌은 사뭇 진지하게 되물었다. 에드윈은 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 정도로 떠날 것 같다 여기는 건 아무래도 성급한 판단인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이유가 또 있을까요?”
로만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에드윈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쓸쓸한 얼굴로 아래를 바라봤지만.
“너무 슬픈 얼굴로 나를 봐요. 그리고 자꾸 마빈에게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요.”
에드윈은 제 할 말을 다 하고서는 다시 기가 죽은 얼굴로 여전히 제 손가락만 보고 있었다.
뭔가 더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르네 말도 잘 들었는데…….”
하지만 서운함과 슬픔을 이겨 내지 못하고 끝내 울먹이고 말았다.
“에드윈.”
에드윈의 뜬금없는 말이 시작되고 내내 그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 빤히 그를 지켜보고 있던 레이넌의 부름이었다.
특별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가벼운 부름이었지만 에드윈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레이넌을 바라봤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에드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넌을 바라봤다.
레이넌의 말에 놀란 건 에드윈 하나만이 아니었다.
로만 또한 제 귀를 의심하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얼핏 들으면 달래는 것과 같은 레이넌의 말에 로만이 뭐라 물으려 앞으로 나섰을 때였다.
“떠날 결심을 할 정도로 상처를 받았을 줄은 몰랐구나.”
어쩌면 에드윈의 말보다 더 황당하고도 뜬금없는 레이넌의 혼잣말에 로만은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처를 받았다니요?”
“얼마 전에 벨라 크라우스가 로에리안가에 왔었지?”
“……그랬지요.”
“그날 르네가 벨라 크라우스를 본 모양이군.”
“설마.”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건 아니겠죠?’
로만의 의심을 담은 ‘설마.’가 레이넌에게는 달리 들린 것 같았다.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어 갔다.
“결혼 이야기가 도는 와중에 벨라 크라우스가 직접 왔으니 상처받을 법도 하지.”
벨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르네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조한 듯 서로 엉겨들었던 손가락,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가 손사래 치며 아니라고 말하던 모습까지.
다른 날과 달라 내내 신경이 쓰이더라니.
“그 정도였을 줄이야.”
“공작님? 아무리 그래도 공작님 결혼 소식에 르네가 떠나려 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요.”
“어째서지?”
“르네가 설사 공작님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공작님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닐 텐데요.”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꼭 로만의 부족한 인간미를 지적하는 것 같아 조금은 울컥했다.
아무리 그래도 레이넌에게 지적당할 정도는 아니건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생각처럼 움직이는 것이던가.”
“아무리 그래도 에드윈 님의 보모인데 공작님의 결혼에 상처를 받는다는 게……. 그 정도로 사리 분별을 못 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럼 다른 이유가 뭐가 있지?”
레이넌의 물음에 로만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혹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긴 했으나 이제까지 잘 버티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게다가 그렇게 아끼는 에드윈까지 두고서.
하지만 레이넌의 결혼 이야기에 상처받은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혹시 그새 에린이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제가 했던 잘못된 충고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레이넌의 짐작보다는 훨씬 그럴듯했다.
“아!”
레이넌과 로만의 대화가 무슨 뜻인지 알기는 하는지 그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좇던 에드윈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