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한 마음을 감추려 애써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네?”
다른 때보다 작게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마침 들이친 바람으로 공기 중에 흩어졌다.
고개를 들어 되묻자 그는 뭔가 설명하려는 듯 다시 말을 꺼냈다.
“그녀는…….”
“공작님, 급히 가 보셔야겠습니다.”
다급하게 들려온 로만의 목소리에 레이넌은 이번에도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는 곧 로만을 무섭게 쏘아보기 시작했다.
뭐지, 저 눈빛은. 왜 아직 내가 여기 앉아 있는 거냐고 그를 책망하는 걸까.
레이넌의 시선을 받은 로만은 드물게도 당황한 얼굴로 나와 레이넌을 번갈아 바라봤다.
역시. 그랬던 모양이었다.
하루만 더 버티면 되는데. 괜히 약혼녀 이야기를 꺼내서…….
순식간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자 레이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나중에? 나에게도 내일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말에 고개를 들었지만 레이넌은 이미 한참이나 멀어진 후였다.
대신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로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음…….”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듯 턱을 매만지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로만 역시 레이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아주 잠깐 그의 눈에 원망이 스친 것 같았지만 어차피 나에게 중요한 건 내 미래였다.
아무래도 당장 끌려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는 무슨. 나는 내일 밤에 떠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다행히 무사하게 잘 지내 왔다.
오늘과 내일, 이틀만 잘 버티면 되는데…….
역시나 캐서린에게 월급을 며칠만 빨리 달라고 부탁하는 편이 나았나. 당장 오늘이라도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몇 번이고 고민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괜한 짓은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최대한 평소처럼 지내야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부탁을 할 자신이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조용히 기다리는 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초조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떠나기로 결심한 날이 다가올수록 초조함은 커졌다.
무거운 발을 이끌고 겨우 에드윈의 침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에드윈이 쪼르르 달려왔다.
“르네!”
내 손을 끌어당기는 에드윈은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온종일 붙어 있는데도 에드윈은 요즘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아쉬워했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응?”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에드윈은 순간 내 눈을 피했다.
“에드윈 님?”
“르네가 빨리 보고 싶어서 엄청 열심히 했거든.”
“잘하셨어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지만 내 칭찬에 그는 곧 다시 눈을 마주쳐 왔다. 하지만 다른 때처럼 환하게 웃지는 못했다.
대신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요즘 들어 에드윈은 내 일상에 관심이 커졌다. 특히 자리를 비우는 일에는 민감하다 싶을 정도로 반응했다.
“공작님을 뵙고 왔어요.”
“그랬구나.”
내 대답에 에드윈은 조금 의기소침해진 듯 보였다. 갑자기 풀 죽은 그의 모습에 내 마음도 괜히 아려 왔다.
그렇지 않아도 에드윈을 두고 떠나는 것이 내내 마음이 걸렸는데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걱정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로에리안저를 떠날 생각을 한 뒤부터 계속 에드윈이 신경 쓰였다. 이제 겨우 밝아진 아이인데.
말없이 에드윈을 떠나는 게 그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건 알면서도 나는 남아 있을 용기가 없었다.
레이넌이 결혼을 하게 되어 누구든 나보다 훨씬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면 좋으련만.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에드윈이 결혼에 대한 소문을 아는지 물으려고 했다가 레이넌을 만나는 바람에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에드윈 님.”
“응?”
“혹시 에드윈 님께 누군가가 공작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눈을 말똥말똥 뜨며 바라보는 에드윈에게 뭐라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나는 대강 얼버무렸다.
“음……. 공작님께 가장 친한 친구가 곧 생긴다거나?”
내 질문에 에드윈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턱에 손을 괴는 건 어디서 본 건지.
귀여운 자세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자 에드윈은 고민이 끝났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사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들 나한테는 잘 안 해.”
“그래요?”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만큼 내 표정도 모호했던 모양이었다. 에드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 왔다.
“왜? 궁금한 게 있으면 로만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여쭤본 거였어요.”
“그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몸은 당장이라도 침실을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만에게 묻는다니. 여러모로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아, 오늘 공작님과의 티타임에 함께 가고 싶으셨어요?”
“응? 왜 물어봐?”
“아니, 조금 전에 아쉬운 얼굴을 하시길래요.”
에드윈의 주의를 돌리려 급하게 던진 질문이 뜻밖에도 잘 먹혀들었다.
그 때문에 잠시 생기가 돌았던 에드윈의 얼굴이 다시금 쓸쓸함으로 물들긴 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반응에 당황하고 있자 에드윈은 활짝 웃으며 활기차게 말했다.
“다음에 같이 갈래!”
“네. 한 달에 한 번은 같이 와도 좋다고 하셨으니까요.”
내가 없어도 그들의 티타임은 계속 이어졌으면 했다. 느리더라도 조금씩 가까워져서 좋은 가족이 되기를 바랐으니까.
“약속이야.”
“네.”
에드윈은 말로 약속을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걸고도 한참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작은 손의 온기를 놓는 게 문득 아쉬웠다.
“에드윈 님.”
“응?”
“언제나 지금처럼 이렇게 웃으며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뜬금없는 내 말에 에드윈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슬픈 기색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지만 너무 짧은 순간이라 의아함을 가질 틈도 없었다.
“저는 에드윈 님이 누구보다 행복하시길 바라요. 제가 에드윈 님을 좋아하는 만큼이요.”
“내가 제일 좋다는 말이지?”
“네. 전 에드윈 님을 정말 많이 좋아한답니다.”
“나도 르네가 정말 많이 좋아.”
에드윈은 놓지 않을 것 같던 손가락을 빼어내고는 양팔로 있는 힘껏 원을 그려 보였다.
“이만큼 좋아해.”
“저도 이만큼 좋아해요.”
나 역시 에드윈이 그랬듯 있는 힘껏 두 팔을 뻗어 원을 그렸다. 그런 나를 보고 에드윈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끝에 쓸쓸함이 묻어 나오는 느낌이 드는 건 내 마음이 그래서겠지.
***
유독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던 시간이었다. 초조함과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오늘이 왔다.
월급은 언제나 반갑고 뿌듯하지만 이번 달은 유달리 특별했다.
하지만 기다림은 끝이 아니었다. 이제 정말 떠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절로 긴장감에 몸이 굳었다.
티 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모든 행동이 어색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조금씩 해가 저물어 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물론 곧 밤이라는 생각에 다시금 긴장이 몰려왔지만.
그렇게 끝없는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까마득한 어둠이 내린 밤이 찾아왔다. 다른 날과 달리 더 정적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 터였다.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아.”
애써 소리를 내어 나를 다독였다. 그렇지 않으면 긴장으로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누군가를 만날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눈에 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동안 밤에 슬쩍 돌아다니며 동향을 지켜본 보람이 있었다.
“역시 시간대가 중요했어.”
바삐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주변을 돌아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사용인들이 주로 연애할 때 써먹곤 하는 낡은 뒷문에 도착하고서야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워낙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라 사용인들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언젠가 에린이 흘리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얼기설기 얽힌 풀 사이로 낡은 문이 보였다. 저 풀만 슬쩍 들추면 바로 문을 열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저 문만 넘으면 이곳을 떠나는 것이었다.
고개가 절로 뒤로 돌아갔다. 한눈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넓고 큰 로에리안저가 바로 뒤에 있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즐거운 생활은 아니었을지도. 처음엔 돈을 모아야 한다며 죽기 살기로 일만 했다.
그러다 에드윈의 보모가 됐고, 일이 잘 풀릴 거란 기대완 달리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일상을 보냈었다.
“그래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잔혹하고 무서울 줄 알았던 에드윈은 어디서 만나기 힘들 정도로 예쁘고 착한 아이였다.
그런 에드윈이 내가 좋다며 졸졸 따르는 모습은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흐뭇함을, 또한 행복을 주기도 했다.
오늘도 다른 날처럼 곤히 잠들었던 에드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했던 정신없고도 평화로웠던 시간도 이제는 끝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떠난 뒤 에드윈이 상처받지 않을까, 그게 가장 큰 걱정이기도 했다.
어눌했던 발음도, 무슨 말을 하든 눈치를 보던 습관도 이제는 거의 사라진 에드윈이였다.
혹시나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아니 어쩌면 더 큰 상처를 안겨 주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기다렸던 오늘이 마냥 기쁘지 않은 것도, 작은 문만 넘으면 되는데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모두 에드윈 때문이었다.
그때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알 수 없는 남자.
시큰둥한 말로, 혹은 웃는 얼굴로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
“르네.”
늘 들어 왔던 이름이 달리 느껴지게 했던 레이넌.
조금씩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얼굴도 다시금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추억에 빠져 시간을 너무 지체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얼른 움직이라는 본능의 신호라고 판단한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다시 작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정말 이곳과는 안녕이었다.
물론 공작저를 나가서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 이후로의 일도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 나았다.
정말 문을 코앞에 남겨 둔 그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달빛을 등진 탓에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익숙한 실루엣 덕분에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레이넌과 에드윈이었다.
아니, 이 시간에 왜 여길? 그것도 둘이?
에드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 미안해서 남겨 둔 편지를 벌써 읽은 건가.
무엇보다 에드윈이 푹 잠든 걸 확인했는데 지금 그의 얼굴에선 잠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리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꽤 담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 공작님? 에드윈 님?”
당황스러운 감정이 역력히 묻어나는 내 부름에도 두 사람의 표정은 딱히 바뀌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그들을 떠올린 탓에 나타난 환영인가.
“이렇게 늦은 시간 외출이라도 하는 모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