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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25)화 (25/129)

르네의 뒷조사를 하다 우연히 에린까지 조사를 하게 되었다. 시작은 일부러 감춘 듯한 르네의 과거 정보였다.

술술 나오던 정보가 어느 기점으로 가려진 듯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파 보니 다시 술술 흘러나왔다. 특별할 것도 없는 것들이.

그게 로만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 시기에 에린과 급격히 친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에린에 관해 파다 보니 또 르네와 비슷한 식으로 과거가 끊어져 있었고, 또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기록이 손쉽게 손에 들어왔다.

수많은 정보 중 무엇보다 로만에게 중요한 건 에린이 자꾸 르네에게 부자연스럽게 접촉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덕에 르네에게 레이넌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조언을 한 게 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에린이 르네에게 한 말들은 정확하게 어떤 것들이지?”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충 공작님과 최대한 멀어지라든가, 공작님은 크라우스 아가씨와 곧 결혼할 것이니 밉보이지 말라는 내용 같습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르네가 갑자기 나를 피했던 이유는 확실해졌군.”

레이넌과 멀어지라는 말에 눈에 띄게 얼굴을 굳힌 것치고는 꽤 냉정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공작님께 잘 보이려면 최대한 눈에 띄라고 르네를 부추긴 것 또한 에린이랍니다. 그로 인해 시녀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고도 합니다.”

“일단 최대한 르네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계속 지켜보도록.”

“알겠습니다.”

눈에 띄게 수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드윈의 보모인 르네를 이리저리 휘두르려고 하는 건 좋지 않았다.

나쁜 의도로 접근하는 것일지도 몰랐고.

레이넌이 신경을 쓰는 이가 르네인지, 혹은 에드윈인지 로만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내린 지시가 에드윈을 위한 일임은 분명하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지켜 왔던 에드윈의 안위를 위협할 만한 일은 싹부터 잘라야 했다.

르네에게 허튼소리를 지껄인 실수를 덮어씌울 수 있는 대상이 에린이어서 다행이었다.

***

방에 들어선 나는 곧장 옷장부터 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가 가득한 옷장은 언제나처럼 한숨만 불러왔다.

이미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드레스를 뒤적거렸다.

“르네 얘는 왜 입지도 못할…… 이런 드레스를 사 모은 거야?”

시녀가 이렇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을 일이 도대체 뭐가 있는가.

입지 못할 것이 뻔한 이런 드레스를 사는 대신 돈으로 모았으면 이게 다 얼마야.

호화로운 드레스 사이에서 유독 돋보이는 옷은 세 벌 정도였다. 그만큼 빼어났다기보다는 오히려 허름해 보여서 더 눈에 들어왔다.

“입을 만한 게 이 정도라니.”

옷을 꺼내기 위해 뻗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차곡차곡 정리해서 넣을 정신도 없었던 나는 옷들을 대충 가방에 구겨 넣은 뒤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진정해. 진정하자.”

잠시 숨을 고르고 나를 다독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차분한 대처였으니까.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방부터 챙기기로 했다. 그 후로는 딱히 기억나는 건 없었다.

그냥 공작저를 떠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게 뭐야!”

방은 그사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온갖 물건이 모두 바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가방 안은 더욱더 난리였다. 잠기지 않을 정도로 가득 채운 물건들을 보자 손수 그 모든 걸 챙긴 나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넣었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촛대는 왜 챙긴 거야. 베개는 어떻게 넣었대?”

꼭 다른 사람이 챙긴 짐을 살펴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필요 없는 물건들을 모두 빼고 나니 가방은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로 챙긴 물건이 없었다.

“가져갈 만한 게 없어. 돈 될 만한 것도 없고…….”

뭔가를 채워 볼까, 하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난장판 속에 눈에 띄는 물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좋게 생각하자. 가벼운 게 최고지.”

그대로 가방을 닫으려던 손이 멈췄다.

“아니야. 돈이 최고라고…….”

내 눈은 자연스럽게 옷장으로 향했다. 이 방에서 가장 비싼 건 모두 그 안에 있었으니까.

“일단…… 챙겨 볼까?”

하나 정도라면 어디서든 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일었다. 잠시 물욕에 눈이 멀었던 나는 곧 드레스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드레스를 팔기 전에 내 팔이 먼저 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화려함과 무게는 비례하는 듯했다.

드레스를 포기하면서 이 방에 더 미련 가질 것은 없었다. 가방을 여미고 방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똑똑똑.

이 방에 머물고 단 한 번도 들려온 적이 없던 소리였다.

주변을 다급하게 둘러본 뒤 조금 전 가방에서 꺼낸 촛대를 들고 문으로 다가갔다.

벌써 찾아온 걸까.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을 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

“에드윈 님?”

예상치 못한 인물에 놀라 재빨리 문을 열었다. 에드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티타임 후 곧장 예절 교육을 하러 갔던 에드윈이 벌써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시간에 내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드윈이 의아한 얼굴을 할 만했다.

차분하기는커녕 오히려 수상쩍은 행동을 해 버렸구나.

“그건 뭐야?”

에드윈의 질문에 나는 얼른 촛대를 등 뒤로 감췄다.

“저, 정리를 좀 하던 중이라서요.”

내 뒤를 힐끔 바라본 에드윈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드, 들켰나?

나는 슬쩍 눈을 돌려 가방의 위치를 확인했다. 여차하면 그냥 들고 내달려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르네.”

“네, 에드윈 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에드윈의 입이 열렸다. 나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에드윈의 입만 보고 있었다.

다른 때보다 시간이 아주 서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반대로 내 심장은 평소보다 더 빨리 뛰는 것 같았고.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도둑이 들었나 봐!”

“네?”

얼떨떨하게 뒤를 돌아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놀랄 정도로 엉망이었는데 에드윈의 눈에는 오죽할까.

일단 들키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부터 나왔다.

“말씀드렸듯이 정리 중이었거든요.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에드윈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저 가방은 뭐야?”

“중요한 건 일단 여기에 넣어 두고 정리를 마친 후에 다시 제자리에 두려고요.”

“그렇구나…….”

재빨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말은 횡설수설 흘러나왔다. 하지만 에드윈은 내 말을 그대로 믿는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카락이 고갯짓과 함께 흩날리는 걸 보고 있자 문득 울컥했다.

이렇게 예쁜 에드윈을 더는 볼 수 없다니…….

좋은 엄마 만나고, 좋은 보모도 만나서 지금처럼 사랑스럽고 밝게 자라 주렴.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고여 들어서 그렇다는 건 에드윈의 질문으로 겨우 알아챌 수 있었다.

“르네? 울어?”

“물건을 한 번에 꺼냈더니 먼지가 날려서 그런가 봐요.”

정신 차려야지. 어차피 도망칠 거라면 틈을 보여선 안 돼.

눈물이 흐르기 전에 재빨리 닦아 낸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일단 가실까요?”

“방을 저렇게 두고?”

“나중에 정리하면 되니까요.”

침착하자고 몇 번을 스스로 되뇌어 놓고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침착은 무슨. 내 머릿속은 도둑이 든 듯한 모양새인 내 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렇게 해가 훤히 떠 있는 대낮에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설 생각을 어떻게 한 거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는커녕 시선을 모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은 평소처럼 지내는 것이 나았다. 가방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준비를 제대로 마친 후에 떠나야 했다.

나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은 건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불안 요소였지만…….

그보다 지금 이 상황, 테레스가 떠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잖아.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에드윈의 보모가 되어 돈만 모으고 도망은 꿈꿔 보지도 못했던 과거가 문득 떠올랐다.

“이번에도 설마 그럴까.”

괜한 걱정이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여유롭게 준비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전처럼 돈이 모일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음 월급만 받으면 떠날 터였다.

다행히 월급날은 며칠 남지 않았다.

당장 내일 처리……하진 않겠지?

***

조마조마한 마음을 품은 채 도망을 위한 준비로 바쁜 하루들이 이어졌다.

일상은 그렇게 계속되었지만, 예전과는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작은 일 하나하나가 나에겐 경고 같기도, 위협 같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돌이 너무도 많았다. 어디를 어떻게 두드려 봐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금세 녹초가 되고는 했다.

“입맛에 안 맞나?”

“네?”

지쳐서일까. 한순간에 멍해져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레이넌이 물어 왔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온몸에 긴장이 퍼진 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작게 몸이 튀어 올랐지만 아마 그는 알아채지 못했을 터였다. 표정은 아주 자연스러웠을 테니까.

하지만 나의 당당함과는 달리 레이넌은 눈썹을 끌어 올리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지?”

“안 놀랐습니다.”

귀신같은 놈.

안 놀랐다는 내 말에 그의 시선은 다시금 집요해지기 시작했다.

또다. 또 뭔가를 읽으려는 그 눈빛이었다.

요즘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오직 도망이었다. 그 속내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결혼하신다던 크라우스가의 아가씨가 상당히 미인이시던데요.”

내 말에 레이넌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아……. 내가 이런 말을 건넬 입장은 아닌가.

괜히 밉보여서 얼른 처리하라고 로만을 재촉할까 봐 겁이 났던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니, 별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멀리서 봤을 뿐인데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미인이시더라.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요.”

“글쎄.”

“칭찬이었습니다.”

“그렇군.”

“외모도 빼어나게 예쁘시지만 마음도 물론 그러시겠죠.”

시큰둥한 대답을 이어 가던 레이넌은 끝내 마지막 내 말엔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데는 약혼녀 칭찬만큼 적절한 화제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무덤을 내가 판 걸까.

큰일 났다 싶었던 나는 열심히 레이넌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읽을 능력이 없었다.

“제가 감히 판단하려거나 했던 건 아니고요. 그냥 그랬다고요…….”

변명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끝내 그의 귀에 닿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작아졌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심상치 않았던 탓이었다. 레이넌은 꼭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난감한 것 같기도 했다.

오늘 바로 끌려가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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