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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24)화 (24/129)

“그리고 소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드리는데, 누군가가 르네에 관한 이야기를 일부러 퍼트린 흔적이 있습니다.”

로만은 오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모두 처리할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소문이 뭔데?”

“공작 부인이 되기 위해서 에드윈 님의 보모가 되려고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에드윈 님을 홀리고서는 이제 공작님에게 접근하고 있다, 부자가 모두 그녀에게 홀려서…….”

마치 보고 읽는 것처럼 르네에 관한 소문을 읊는 로만을 바라보는 레이넌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그 모든 소문의 근원지가 로만이 아니냐는 레이넌의 의문은 말로 굳이 하지 않아도 전해질 정도였다.

레이넌의 의심은 딱히 과한 것은 아니었다.

로만은 필요하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해 왔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굳이 하지 않은 일로 레이넌의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르네에 관련된 일이 아닌가.

“에린이라는 시녀입니다.”

“네가 아니라고?”

“아닙니다.”

“그래. 일단 그렇다고 하고, 소문을 왜 일부러 냈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린의 뒷조사를 하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에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레이넌은 금세 흥미를 잃은 듯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로만은 한숨을 삼켰다. 요즘 특히나 레이넌의 집중도 격차가 너무도 컸다.

언제나 그랬듯 매사 시큰둥한 게 로만으로서는 훨씬 편했다. 지금의 레이넌은 전보다 훨씬 까다로운 느낌이었다.

눈에 띄게 관심을 두는 것과 아닌 것이 나뉘는 것이 더 피곤한 일이 될 줄이야.

게다가 레이넌만 신경 써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에드윈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무엇보다 요즘 로만을 가장 당혹스럽게 했던 르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특별히 뭔가를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아 오히려 로만을 힘들게 하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신세 한탄을 늘어놓으면서도 로만은 착실히 보고를 이어 갔다.

듣지 않는 것 같아도 중요한 건 놓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레이넌이었으니까.

그리고 로만은 얼른 일을 하나라도 처리해 버리고 싶었다.

“특별할 건 없었으나 이상하게 일부러 숨긴 듯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르네와 같군.”

“네. 둘이 오래전부터 친한 사이라고 하니 우연은 아닐 듯합니다.”

“얼마나 걸리겠나?”

“한 달 정도면 됩니다.”

“그래.”

레이넌은 서류에 집중한 채로 손만 까딱였다. 그만하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르네에 대해서 하나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로만은 그의 손짓을 못 본 척하고 나머지 보고를 이어 갔다.

***

갑작스러운 방문객으로 결국 로만에게선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쫓아다닐 만큼 중요한 이야기는 뭐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뒤늦게 생겨났다.

아무래도 로만이 나를 걱정할 사람은 아니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더욱이 아니었고.

뭔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기 곤란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에드윈과의 티타임이 끝나고 로만을 찾아갔다. 응접실에 있다고 해서 갔더니…….

도도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화려한 여자만 볼 수 있었다.

“와, 엄청 예쁘네.”

인형처럼 생긴 여자였다. 예쁘지만 그만큼 성질도 보통이 아닐 것 같았다.

나를 스쳐 지나갈 때 내려다보던 눈빛이 보통 독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레이넌과 꽤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에드윈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 주면 좋겠다.”

레이넌이야 어떤 여자가 부인이 되든 딱히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에드윈에게 좋은 사람이면 좋을 텐데.

응접실에도 없다면 어차피 로만이 있을 곳은 뻔했다. 레이넌의 집무실이겠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로만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뭔가 달랐다. 근처를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늘 굳게 닫혀 있던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로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그 여자는 처리할까요?”

“그래. 아무래도 에드윈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가는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처리라니. 꼭 저렇게 무서운 단어를 써 가며 이야기해야 하는 건가.

그보다 에드윈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는 여자가 누가 있지?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지금 에드윈이 마주치는 사람이라고 해 봤자 그의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들, 그리고 마빈과 나뿐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여자는 나 하나였다.

아무래도 처리될 여자가 나인가 봐.

순간 오싹할 정도로 따가운 한기가 온몸에 파고들었다.

“나 어떡해…….”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얼른 입을 막고 귀를 쫑긋 세웠다.

혹시나 레이넌과 로만이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전전긍긍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고, 그래서 내 목소리가 묻힌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게 날뛰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혹시라도 레이넌과 로만의 귀에 닿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안고 가는 숨을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또 다른 실수를 해서 눈에 띄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주변을 둘러본 나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확인하고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발끝을 세워 살금살금 움직이느라 마음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발을 움직인 덕에 적어도 숨은 자유롭게 쉴 수 있을 정도로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벽을 붙들고 서서 호흡을 가다듬는 것과 동시에 몸이 휘청거렸다.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혹시나 하며 피하려고 애썼던 날들이, 설마 하며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내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거야. 그것도 꽤 잔인한 쪽으로.

달라질 건 에드윈의 손에 죽느냐, 레이넌의 손에 죽느냐. 그 정도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에드윈의 손에 죽는 것보다 낫긴 한데…….

“정신 차려. 그 와중에 뭘 또 고르고 있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어 그렇게 했지만 오히려 어지럼증만 몰려왔다.

“일단 침착하자, 침착해. 내가 아닐 수도 있잖아?”

그래. 레이넌은 그 여자라고 말했지, 내 이름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여자가 누군데?”

……나잖아. 나밖에 없다고.

애써 머릿속을 환기해 보려던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환기가 되기는커녕 천둥, 번개와 함께 무거운 비를 머금은 먹구름처럼 어두운 기운이 몰려들었다.

다시 한번 몸이 비틀거렸다. 다리가 풀린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여기 주저앉고 말 것이었다. 나는 벽을 짚은 채로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이넌이 있는 곳에서 조금 더 멀어지고 싶었다.

“아니, 왜 나를…….”

뒤늦게 억울함이 몰려왔다.

내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다고. 그냥 에드윈을 정성껏 돌본 게 전부인데.

혹시 에드윈의 간절한 눈에 넘어가서 간식을 한두 번 더 준 걸 알았나?

아니면 에드윈의 종이접기 상자를 보여 주지 않은 것? 그건 본인이 됐다고 해 놓고서는…….

“아!”

어느새 내 방 앞까지 와 있었다.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떠오른 가설에 나는 그대로 굳었다.

에드윈에게 꾀병을 알려 줘야겠다 생각한 게 들킨 건가.

이거다. 이게 분명해.

그간 집요할 정도로 빤히 와 닿던 눈빛의 이유를 이제야 찾은 것 같았다.

그렇게 뚫어져라 나를 쳐다본 건 내 속내를 읽으려는 레이넌의 노력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사람이 숨통 트일 구멍도 있고 그래야지. 야박하기는.”

아무도 듣지 않는 허공에 투덜거려 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생각만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한 꼴이었다.

일단 침착하자.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힘차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제 속도를 찾을 때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에드윈이 꾀병을 부린다고 한들 누군가를 처리할 정도의 일일까. 게다가 생각만 한 건데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도 아니고 무슨 수로!

“그럼 뭐지? 왜지?”

에드윈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만한 일을 뭘 했지?

조금 더 빨리 도착해서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이유를 알 수 있었을까?

“그 여자는 처리할까요?”

“그래.”

집무실 안의 분위기는 확실히 심각하고 비장했다.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냉기가 흘러나올 정도로.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이번에야말로 진짜다. 진짜야. 최대한 빨리 여기를 떠나야 했다.

로에리안 부자의 손에 죽거나 도망치거나. 나는 두 가지 갈림길 앞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애써 참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끝맺었다 생각한 로만은 집무실을 나가려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되돌아왔다.

“정말 에린을 처리하라는 이유가 에드윈 님이 전부입니까?”

로만의 물음에 레이넌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가 평상시처럼 생활할 수 없다면 당연히 에드윈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가겠지.”

레이넌과의 만남만 줄어들었을 뿐 르네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로만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뭔가 말을 하려던 레이넌이 그대로 멈췄다.

“혹시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저는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레이넌은 다시 집중해 봤지만, 사람의 목소리는커녕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로만도 함께 집중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닐까요?”

잠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레이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려 있군.”

“아, 크라우스 아가씨의 이야기 때문에 제가 깜빡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로만은 문을 닫기 전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습니다. 잘못 들으신 것 같습니다.”

“누가 됐건 들었으면 곤란한 내용이긴 한데…….”

“혹시 모르니 이야기가 새어 나가는지 유심히 지켜보겠습니다.”

“그래. 그보다 에린이 르네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로에리안가에서 르네와 친하다고 할 만한 사람은 에린뿐인데, 그렇다고 하기엔 둘 사이가 좀 미묘해 보여서요.”

“르네와 친한 사람이 그 정도로 없나?”

“예전엔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거의 없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전에 친했다는 이들도 딱히 영양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영양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뭔가 의도가 있어서 가까이 지낸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의도라…….”

“네. 원래 르네가 흥청망청 돈을 쓰는 편이어서 그 옆에서 그녀를 속여 돈을 받아 내거나 한 모양입니다.”

“흥청망청? 에드윈의 보모가 되기 전엔 꽤 열심히 돈을 모았다고 캐서린이 말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사람이 확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다 멀어지고 에린만 남은 모양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가.”

“그럴지도요.”

“에린과의 사이는?”

“에드윈 님의 보모가 되고서는 딱히 접점이 없습니다.”

“에린이 일부러 지속해서 르네에게 접근하는 것 같다는 건가?”

“네. 직접 본 사람들은 친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지만 저는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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