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23)화 (23/129)

“르네, 얼굴이 빨개.”

“네?”

에드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내 얼굴을 더 붉게 만들었다. 화르르 타오르는 얼굴의 열기를 느낀 나는 재빨리 손으로 두 볼을 감쌌다.

왼쪽에서는 레이넌의 작은 웃음소리가, 오른쪽에서는 에드윈의 걱정이 동시에 들려왔다.

“역시. 르네가 오늘 아픈 건 로만 때문이야.”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로만은 다시금 돌아온 화살에 화들짝 놀랐다.

“저런 얼굴을 하고 쫓아오는데 르네가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야무진 얼굴로 에드윈은 로만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평소와 다르게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로만을 보자 조금은 그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에드윈 님, 손가락질은 하지 않는 게 예의예요.”

“응.”

하지만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로만에게 향한 에드윈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내려 주는 것뿐.

에드윈은 내 말에 착하게 웃으며 손을 곱게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저런 얼굴로 쫓아갔다는 말이지?”

나의 작은 노력은 레이넌의 나직한 물음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로만의 얼굴이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얼굴은 원래 이렇게 생겼는데 왜 갑자기 그러십니까!”

레이넌의 말이 그에겐 또 다른 두려움으로 다가온 걸까. 로만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알고 있었구나. 무서운 얼굴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지.”

에드윈의 말은 그렇다고 쳐도 레이넌이 동조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로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일은 잘하지만 성격엔 좀 문제가 있지.”

“그렇죠? 저한테도 잘해 주기는 하지만…….”

로만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그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에 로만은 쩔쩔매고 있었지만 나는 꽤 어리둥절했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나?

부자의 대화는 영양가는 없지만 꽤 친근하게 들렸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기를 바랐던 내 마음이 통한 걸까?

가운데에 끼여 괜한 소리를 듣게 된 로만은 좀 가여웠지만 둘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아 흐뭇했다.

더욱이 앞으로 두 사람에겐 시간이 많으니 더 친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레이넌과 에드윈을 조심스럽게 번갈아 봤다. 뜻밖에도 두 사람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미소는 서로를 향하진 않았지만 제법 자연스러웠고, 또한 꽤 닮아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들과 함께 웃었다.

내 얼굴을 보고 조금 더 활짝 웃은 에드윈은 앞에 놓여 있던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레이넌도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공작님.”

시종장의 목소리가 겨우 찾은 평화로운 시간을 파고들었다.

“벨라 크라우스 아가씨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여기에 와 있다고?”

“네.”

시종장의 대답에 레이넌은 로만을 바라봤다.

“급하지 않은 일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 저도 몰랐습니다.”

크라우스라면 전에 에린이 말한 그 아가씨인가. 레이넌과 곧 결혼할 거라던.

그런 것치고는 레이넌의 반응은 너무 차가웠고, 로만의 태도는 가벼웠다.

하긴, 어차피 레이넌의 결혼이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의 모습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시기가 나쁘지 않습니다. 일단 만나는 보시죠.”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나를 바라봤다.

아니, 왜 나를?

상황을 전혀 모르는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좀처럼 떠나지 않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나는 슬며시 눈을 피했다.

에드윈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고 있으려니 레이넌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예의가 없는 아가씨로군.”

레이넌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불쾌함이 묻어 나왔다.

***

딸각.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초조하게 서성이던 금발의 여자가 재빨리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도도한 얼굴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있던 여자는 레이넌이 다가오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레이넌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얼굴에는 화려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가 찬사를 보내는 그녀의 자랑이었다.

“크라우스는 방문 예절을 전혀 모르는가 보군.”

차가운 목소리에 벨라는 몸을 숙이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인사를 받지도, 건네지도 않고 제 할 말만 하는 건 무슨 예의란 말인가.

벨라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지만 겉으로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소식이 있을 법한데 없길래 직접 왔어요.”

“소식? 크라우스와 로에리안이 소식을 전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는 아닐 텐데.”

레이넌은 벨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드레스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벨라는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아무래도 크라우스는 예의를 배우고 다시 오는 게 낫겠군.”

소파에 벨라의 무게감이 실리기도 전에 레이넌은 불쾌하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공작님도 이렇게 크라우스를 놓치기엔 아쉬울 텐데요.”

벨라는 그를 따라 일어나는 대신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찻잔을 들었다.

그녀의 당당한 말에 레이넌의 얼굴에는 작은 흥미가 일었다.

“아쉽다. 내가?”

“크라우스가와 로에리안가가 손을 잡는다면 오래도록 비슷하게 유지해 왔던 두 가문의 세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크라우스는 슈나이더를 견제하는 것을 넘어 로에리안을 제국 최고의 가문으로 만들 수 있다?”

“저희 정도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 공작님께서도 소문이 그렇게 퍼져도 그대로 두는 게 아니신가요?”

“그래서?”

레이넌이 다시 걸음을 돌려 벨라에게 다가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조금씩 짙어졌다.

화려한 미소로 그의 시야를 가리겠다는 듯이.

“제가 찾아온 일이 공작님께 득이 되면 됐지 이렇게 화를 내실 일은 아니란 뜻이지요.”

“크라우스가 어떻게 로에리안의 검이 될 수 있을까?”

레이넌은 어느새 소파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인 모습은 그린 것처럼 근사해서 벨라는 하려던 말도 잊고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와는 달리 차갑기 그지없는 시선을 느끼고서야 벨라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제국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땅이 바로 후작령이지요. 물자와 재력, 어떤 면을 보더라도 크라우스만큼 뛰어난 가문이 없다는 걸 모르셔서 묻는 건 아니실 테고…….”

레이넌의 입에서 작은 숨과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게 비웃음이라는 걸 벨라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외모에 넋을 놓고 있느라.

“크라우스가 이제 망할 때가 됐나 보군.”

“……뭐라고요?”

레이넌의 싸늘한 목소리에 담긴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내세운 미소 따위는 그저 빛바랜 모조품이라고 비웃는 것처럼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눈이 부셨기 때문이었다.

화사한 얼굴과 냉소적인 말의 간극에 벨라가 당황한 사이에 레이넌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에리안이 크라우스 하나 없다고 큰일이라도 날까.”

“슈나이더를 상대하려면 공작님께 힘을 실어 줄 만한 가문을 늘려야 할 텐데요.”

“크라우스와 손잡는다고 쉬워질 만한 상대였으면 애초에 그대가 자랑하는 물자와 재력은 로에리안 아래에 있었겠지.”

레이넌의 말에 벨라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의 말처럼 별것 아닌 집안이 아니었다, 크라우스는.

후작가이긴 하나 여느 공작가 못지않은 부유함을 누리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큰소리치시기엔 이제까지 슈나이더에 당해 오신 게 많으신데.”

벨라는 모멸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의 형님 되시는…….”

“벨라 크라우스.”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냉기에 벨라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무거운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대로 꼼짝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밀려온 공포에 지금껏 어떤 감정에도 잃지 않았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조금 더 오래 그 재력을 누리고 싶으면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노력이 가상해서 하는 충고니 귀담아듣도록.”

레이넌은 그 말만을 남기고 미련 없이 응접실을 떠났다. 벨라를 위협하던 기운 역시 그대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는 한동안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조금 전의 기억이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만에 천천히 몸을 일으킨 벨라의 얼굴은 잔뜩 구겨진 채였다.

벨라는 야망이 크고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날 때부터 많은 것을 쥐었지만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모두가 크라우스가 가진 재력을 원했고, 그녀의 미모를 탐했다.

벨라를 원하는 이들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고, 그들을 선택하는 건 벨라였다.

비록 가문이 뒤처진다고 해도 그건 큰 문제가 아니라 여겼다.

오래도록 이어져 온 슈나이더가와의 경쟁을 이기기 위해 크라우스가만 한 가문은 없었으니까.

벨라는 늘 그러했듯 그녀의 선택이 옳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슈나이더가 아닌 로에리안을 선택한 건 오로지 레이넌 때문이었다.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우세한 가문을…….

“아니, 가문을 빼면 슈나이더는 볼 것도 없지.”

무엇보다 젊고 매력적인 레이넌을 원했다.

슈나이더는 나이도 나이지만 비열한 외모나 왜소한 체격, 쪼잔한 성격까지. 무엇 하나 남자로서 레이넌보다 나은 매력이 없었다.

레이넌이 두 팔 벌려 환영하리라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이런 눈빛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찮은 무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빛을 떠올리자 벨라의 몸이 떨렸다.

태어나 처음 겪는 모멸감이었다. 난생처음 겪은 거절이 이토록 모욕적인 방식일 줄이야.

“저 잘난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지네.”

이를 악문 탓에 목소리는 그녀의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이제까지 떠받들어지는 일이 너무도 당연했던 벨라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분노와 오기가 동시에 그녀의 안에 차올랐다.

감정을 숨기는 것에 익숙한 벨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응접실을 나섰다.

하지만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벨라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는 사라지고야 말았다.

***

벨라와의 짧은 만남을 마친 레이넌은 그대로 집무실로 향했다.

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모를 리 없는 로만이었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레이넌의 뒤를 따랐다.

“왜? 아쉽나?”

집무실 문을 닫으려던 로만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레이넌은 태연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추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레이넌이 묻지 않았다면 그대로 입을 다물었을지도 몰랐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에드윈 님이 차기 공작이 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론 여전히 공작님이 에드윈 님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한다는 의견도 반쯤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반반이라…….”

“오늘은 티타임도 함께 가졌으니 이제는 반반이 아니겠지요.”

“그건 곤란한데. 너무 일러.”

“네. 최대한 늦추는 게 좋은데 벨라 아가씨를 그렇게 보내시면…….”

“정말 결혼이 해결책이 되리라 생각하는 건가?”

“여자한테 홀려서 정신 못 차리는 귀한 남자들의 이야기야 언제나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워낙 욕심이 많은 성격을 다들 아니까 벨라 아가씨가 공작 부인이 되면 에드윈 님이 공작 위를 잇는 일은 없겠다고 모두 확신하겠죠.”

로만은 열심히 설득의 말을 이어 갔지만 레이넌은 시큰둥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여자한테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린다고? 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

이미 거기서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헛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레이넌에게 로만은 진심을 전했다.

“이미 가능성은 충분해 보이시는데요.”

자라나는 새싹이 눈앞에 있는데 정작 새싹은 제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충심을 담아 직언했지만 레이넌은 언제나처럼 흘려들었다.

“어쨌든 뭔가 방법은 찾아야 합니다. 슈나이더도 눈여겨보고 있을 테니까요.”

“방법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