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22)화 (22/129)

여러 사람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자리는 분명 즐거울 터였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찻잔을 들어 올린 채 나는 눈만 여기저기 굴렸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흘러왔을까.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다른 날과는 달랐다.

아니, 어쩌면 유난히 길었던 지난 밤부터였을지도 몰랐다.

***

잠이 들만 하면 레이넌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르네.”

꼭 내 옆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몇 번이고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길 되풀이했다.

“이게 뭐야!”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탓일까. 아침에 거울을 들여다본 나는 기겁했다.

이게 과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몰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와 어두침침한 얼굴에 핼쑥한 모습은 내가 봐도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하루 잠을 못 잤다고 이 정도까지 티가 난 건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생김새가 이 모양이니 오히려 안락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겠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렇듯 딱한 내 몰골을 가장 처음 본 사람은 다름 아닌 로만이었다. 그간 나를 놓친 것이 꽤 분했던지 오늘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정한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오던 로만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나 역시 그의 기세에 놀랐지만 그것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로만은 걱정의 말까지 건네며 다음을 기약했다.

세상에. 로만이 걱정해 줄 정도일 줄이야.

물론 에드윈은 로만보다 더 강력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내가 큰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크게 아픈 것이 분명하다며 나를 제 침대에 올려놓고 토닥토닥하던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티타임 말이야…….”

“아, 티타임…….”

그제야 레이넌과의 티타임을 떠올렸다. 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면 오늘도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을까.

로만까지 걱정해 줄 정도이니 하루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을 때 에드윈이 물었다.

“나도 같이 갈까?”

에드윈이 건넨 뜻밖의 제안에 눈이 크게 뜨였다.

“괜찮으시겠어요?”

레이넌을 어려워하는 에드윈을 알기에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응! 혹시 르네가 쓰러지면 내가 업고 얼른 의사에게 뛰어갈게!”

에드윈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힘차게 대답했다.

과연 나를 업을 수 있을까. 애초에 쓰러질 정도로 몸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주치의를 부르는 게 빠를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에드윈의 표정이 너무도 결의에 차 있어서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든든하네요. 대신 불편하거나 자리에서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기예요.”

“응.”

“약속할까요?”

“응.”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그만큼 덜 불편한 자리가 될 터였다.

게다가 그 한 사람이 바로 에드윈이라니. 어중간한 열 사람보다 훨씬 나을 것이 분명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레이넌과 에드윈이 마주하는 일이 많으면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서로 조금이라도 익숙해져야 둘 사이의 딱딱한 분위기가 부드러워질 테니까.

이왕 이렇게 된 것, 사람을 더 많이 모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로만에게 함께하자는 제안을 한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로만과 만나야 했고, 그렇다면 사람이 많은 곳이 안전했다.

특히 에드윈도 있으니 협박을 한다거나 겁을 준다거나 위협을 하는 일은 하지 않겠지.

안타깝게도 로만은 내 제안을 거절했지만 레이넌과 에드윈이 오히려 선뜻 그에게 함께하자 권했다.

로만 역시 그들의 권유에 흔쾌히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람이 많이 모이는 편이 즐거울 터였다.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

나는 티타임 내내 찻잔에 얼굴을 가리고 이리저리 눈치를 살폈다.

이런 분위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사람이 많아서 즐겁기는커녕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늘어난 상황이었다.

어쩐지. 내 마음대로 일이 잘 풀린다고 했어.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찻잔으로 한숨을 흘려보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티타임의 분위기는 훨씬 어색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모두가 각자 다른 생각에 빠진 것처럼 느껴졌다.

기대했던 화기애애한 대화는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나뿐인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야 레이넌과 둘만 있는 자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잖아.

끈질기게 와 닿는 레이넌의 시선에 몸이 따가울 정도였다. 아무래도 그는 어제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도 안 되는 인사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날보다 더 집요하게 나를 바라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혹시 실수로라도 레이넌과 눈이 마주칠까 조심하던 나는 아예 고개를 에드윈에게로 돌렸다.

“에드윈 님이 좋아하는 간식들인데 왜 안 드세요? 다른 걸로 챙겨 올까요?”

분명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많이 놓여 있는데도 에드윈의 시선은 오직 로만에게 꽂혀 있었다.

포크에는 손도 대지 않은 에드윈에게 묻자 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돌아봤다.

“응? 아니? 맛있는데?”

한 입도 안 먹었는데 맛있다니. 맛있어 보인다는 말을 잘못한 건가.

“이것도 드셔 보세요.”

내 앞에 있던 접시를 밀어 주자 에드윈은 그제야 포크를 들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에 흐뭇하게 웃고 있으니 어딘가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한테는 왜 안 물어보지?”

“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그토록 노력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눈만 깜빡이고 있자 레이넌이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도 안 먹고 있는데.”

어울리지 않는 불평 어린 말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졌다.

자신은 챙겨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내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갸웃하자 레이넌은 심각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왜 내겐 묻지 않지?”

제대로 들었다니. 황당함에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차를 마시긴 해도 레이넌이 다른 걸 함께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왜 오늘 유독 안 먹은 것처럼 말한단 말인가.

황당한 기분은 접어 두고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입에 안 맞으세요? 다른 걸로 챙겨 올까요?”

“아니. 나는 원래 단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러시구나.”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그 자리에 붙들어 두느라 대답이 늦어졌지만, 다행히 누구도 어색한 내 미소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로만 님은 왜 안 드세요?”

말이라도 해야 표정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내 찻잔만 보며 도통 다과에 입을 댈 생각을 않는 로만에게 묻자 그의 몸이 움찔 튀었다.

내 질문에 레이넌과 에드윈의 시선이 한데 모이자 로만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럼 차가 식었을 테니 차라도…….”

“나는! 정말 괜찮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보란 듯이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누가 봐도 안 괜찮은 게 분명한 얼굴로.

“그래서 둘이 따로 할 말이라는 게 뭐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레이넌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이를 악물고 말한 것 같았지만 착각이겠지.

“그래. 따로 할 말이 뭐야?”

에드윈은 레이넌의 자세를 그대로 따라 하려는 듯, 손을 양팔 사이에 힘겹게 끼워 놓은 채로 물었다.

팔이 불편해 보이는데…….

“따로 할 말……. 그보다 이렇게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니 여유롭고 좋네요.”

로만은 어색하게 말하며 화제를 돌렸지만, 그의 말에 누구도 대꾸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욱더 날카로워진 눈초리에 로만은 고개를 숙였다.

잠시 고민하는 듯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로만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르네가 너무 피곤해 보여서 혹시 도움이 필요한가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그걸 네가 왜?”

“그래. 로만이 왜?”

그간 교류가 별로 없던 사이치고는 제법 마음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추궁하는 듯 매서운 레이넌과 에드윈의 질문에도 로만의 얼굴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굴이 저렇게…….”

로만의 말에 레이넌이 헛기침을 뱉어 냈고, 나도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며 못 들은 척을 했다.

나와 레이넌을 번갈아 바라보는 로만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건 지레 찔린 탓이겠지.

평소처럼 행동하면 된다는 걸 알지만 뭘 하더라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푹 쉬면 저 이상한 얼굴은 없어질 거라고 그랬어!”

다부지게 나를 변호해 주는 에드윈의 목소리가 어색한 상황을 한순간에 깨트렸다.

벌떡 일어나 나를 가리키며 힘차게 이야기하는 에드윈의 모습에 두 성인 남자에게서는 아주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지. 내 얼굴이 진짜 그렇게 이상해서? 아니면 이상하다고 말하는 에드윈의 당당한 모습 때문에?

작은 한숨으로 모든 궁금증을 내보냈다. 알아 봤자 나에게 좋을 건 없었다.

“그렇겠죠? 내일은 저 이상한 얼굴이 없어지겠죠?”

끝내 에드윈의 말을 다시 한번 짚어 내는 로만의 행태에 나도 모르게 그를 노려봤다.

로만은 움찔했지만, 곧 무어라 말을 하려는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작게 흘러나온 에드윈의 말에 그는 그대로 굳었다.

“로만, 미워.”

로만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입만 벙긋거렸고, 에드윈이 고개를 홱 돌리자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에, 에드윈 님?”

로만의 간절한 부름에도 에드윈은 시선도 주지 않고 내 팔에 매달렸다.

“르네는 이상하지 않아.”

“그럼요. 내일이면 괜찮아진다니까요. 로만 님이 잘 모르셔서 그런 거예요.”

“아니, 에드윈 님이 먼저…….”

내 다독임에 에드윈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는데 억울한 듯한 로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고개를 돌려 매섭게 그를 바라보니 에드윈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로만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겠습니다.”

공손한 말투로 에드윈에게 고개를 숙이는 로만을 보던 레이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로만은 아직 한참 부족하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그는 등받이에 손을 대고는 허리를 숙였다.

갑자기 다가온 그의 얼굴에 당황에서 뒤로 몸을 물렸지만 그래봤자 등받이에 막힐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저, 저한테 물으시는 건가요?”

“그래.”

왜 이러세요. 로만은 저한테는 상사란 말입니다.

난감한 얼굴로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에 옆자리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게감뿐만 아니었다.

레이넌은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듯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르네는 착해서 나쁜 말을 못 해요.”

나의 또 다른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에드윈의 목소리가 나를 구해 주었다.

“그렇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레이넌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난감한 질문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그때, 레이넌과 에드윈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시선을 받은 로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눈은 불안한 듯 흔들렸다.

“로만이 엄청 괴롭혔는데도 르네는 나쁜 말 한 번 한 적이 없었거든요.”

“괴롭혔다?”

“르네를 엄청 쫓아다녔어요. 맨날 바쁘다더니. 거짓말쟁이.”

“에드윈 님, 거짓말쟁이라니……. 저는 정말 바빴고, 르네에게는 할 말이 있어서…….”

절절하게 에드윈을 향해 이어지던 로만의 변명과 같은 말은 레이넌도, 에드윈도 제대로 듣지 않는 듯했다.

“로만이 그랬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어보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레이넌에게로 돌렸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앞으로 향해야만 했다.

너무도 가깝게 다가온 그의 얼굴에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로만이 쫓아다녔다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은근하게 얘기 좀 하지 말아 주세요.

나직하게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가 어젯밤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분명 환한 낮인데 그의 숨소리만 들렸던 지난 밤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