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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21)화 (21/129)

나를 불러 놓고 그는 한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잠들고 레이넌과 나, 둘만 깨어 있는 것 같았다. 이 밤에 잠들지 못한 두 사람의 숨소리가 방을 채웠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건 나였다. 눈을 떠도 레이넌에게선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처럼 어색한 움직임으로.

레이넌은 우리를 둘러싼 밤과 같이 고요하고도 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손을…….”

“아, 그렇지.”

겨우 벗어날 수 있겠다고 기뻐한 건 잠시였다.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해 놓고 레이넌의 손은 여전히 조금 전의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공작님?”

내 부름이 들리고서야 그는 겨우 손을 떼기 시작했다. 꼭 아쉬운 사람처럼 느릿느릿하게.

얼른! 빨리!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마지막 손가락 하나가 내 몸을 떠나자 그가 닿았던 곳에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서늘하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에드윈이 잠든 이곳이 서늘해서는 안 되니까.

크고 단단했던 그의 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저 손이 떠나서 그랬구나.

그의 손이 떠나자마자 온기는 사라지고 찬 기운이 나를 감쌌다.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허전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게 꽤 이상하게 느껴져 마음속으로 그를 재촉하던 것도 잊고 멍하니 있었다.

레이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싶더니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꼭 저는 손을 뗐다고 알려 주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얼른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붉어진 듯 화끈거렸지만 레이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나를 보던 그런깊은 눈으로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손에 뭐가 묻었나.

레이넌은 나를 붙들고 있던 두 손을 한참이나 유심히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에서 벗어난 덕일까. 조금씩 머릿속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레이넌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장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날 경로를 확인한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여전히 제 두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으면서도 내가 움직이는 걸 느꼈던 걸까.

“르네.”

신나게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 순간 “그래, 르 주임이 있었군.”이라며 나를 찾는 상사의 목소리와 같은 부름이었다.

“……네.”

“그러니까 매일 에드윈이 잠들기 전에 이렇게 책을 읽는다는 거지?”

“네.”

“좋아.”

뭐가요? 왜 좋은데요?

좋다는 말이 이렇게 불길한 느낌을 담고 있었던가.

일단은 퇴근이 먼저였다. 이제 생각보다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럼 저는 이만. 수고하셨습니다.”

에드윈이 깰지도 모르니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를 남긴 나는 있는 힘껏 에드윈의 침실을 뛰쳐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못 들었을 거야.”

뛰면서 인사를 한 덕에 그 말을 할 때는 이미 에드윈의 침실을 벗어난 후였으니까.

몇 걸음만 더 가면 침대인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잠시 일어나려고 생각해 보던 나는 그냥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차가운 바닥에 닿자 달아올랐던 볼이 조금은 식는 듯했다.

“하아…….”

에드윈의 침실과 내 방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꼭 한참을 전력 질주한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릿한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해 봤지만 좀처럼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거 혹시…….”

죽을 뻔하다 살아난 탓에 긴장감이 몰려든 건가!

순식간에 피로가 밀려왔다. 하지만 오히려 잠은 오지 않았다.

게다가 문득문득 심장이 세차게 뛰기도 하고, 내 이름을 부르던 레이넌의 목소리가 간간이 떠오르기도 하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퇴근을 사수했지만 결국 휴식은커녕 일하는 것보다 더 고된 밤을 보내야 했다.

***

동이 터 오기도 전인 이른 아침부터 로만은 르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녀가 머무는 방 앞에서.

로만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르네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고, 할 말이 있을 뿐이라고 에드윈을 열심히 설득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로만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에드윈은 그 짧은 팔을 힘겹게 꼬아 팔짱을 끼고는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만 보낼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신뢰를 못 얻었을 줄이야.”

그렇다고 틈이 없을까. 에드윈이 깨기 전, 르네가 제 방에서 나올 그때를 로만은 노리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토록 누군가를 만나려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로만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만나기 너무 힘든…… 얼굴이 왜 그래?”

상쾌한 아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한 르네를 보자 로만의 말문이 막혔다.

그토록 기다려서 겨우 르네를 만나게 됐는데도 제 목적은 잊고 그녀의 상태를 먼저 묻게 됐다.

“심한가요?”

심했다. 에드윈이 그녀를 봐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화들짝 놀랄 에드윈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생생했다.

르네의 얼굴은 며칠 밤을 새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초췌한 데다 침울해 보였다.

그저 피곤만이 문제가 아닌 듯했다.

“오늘 쉬는 게 낫지 않을까?”

르네도 오늘 제 몰골이 어떤지 모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로만의 제안에 제 얼굴을 쓸어내린 걸 보면.

“쉴 정도는 아니에요.”

누구도 믿지 못할 대답을 한 르네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오늘은 너무 심란, 아니 피곤하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르네와 이야기를 하고 말겠다 다짐했던 로만이었다.

하지만 정작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로 비틀대는 그녀의 말에 로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이따가 공작님과의 티타임이 끝나고…….”

르네를 부축하려던 로만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조금 전 눈에 띄게 반응한 르네의 모습 때문이었다.

“공작님과의.”

움찔.

“티타임이.”

조금 전과 달리 평온한 그녀의 모습에 로만의 얼굴에는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공작님.”

움찔.

“그러니까 공작님이.”

이번에는 움찔거리는 것과 동시에 르네는 눈을 들어 로만을 노려봤다.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은 로만이 흠칫했다.

“미안. 반응이 너무 즉각적이라.”

도대체 그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르네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걸까.

레이넌보다 르네에게 묻는 것이 빠를 터였다.

하지만 르네가 겁이 없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레이넌의 얼굴을 떠올리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알았어. 티타임 끝나고 얘기 좀 해. 도망갈 생각은 말고.”

“네…….”

어깨를 늘어트리고 에드윈의 침실로 들어가는 르네를 보고 로만도 발길을 돌렸다.

“르네! 얼굴이 이상해!”

에드윈의 놀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로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드윈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한 가지 아찔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르네와 지금 만난 걸 에드윈 님이 알면…….”

앞으로 르네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뿐일까. 에드윈을 마주칠 때마다 따가운 눈초리에 온몸이 아파 오겠지.

르네는 로만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저 상태였다는 걸 에드윈이 믿어 주지 않을 거란 걸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르네를 저렇게 만든 사람은 로만이 되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말 안 했겠지?”

입 밖으로 희망 사항을 내뱉어 봤지만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르네에게 헛소리를 지껄인 게 저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레이넌이 르네의 오해를 알게 된다고 해도 뒤집어씌울 사람이 생겨서 마음이 가벼웠는데.

“아니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오히려 에드윈의 날 선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모두 그녀에게 뒤집어씌우고 저는 다시 에드윈의 신뢰를 되찾으리라.

로만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그는 그대로 레이넌의 집무실로 향했다.

최근 들어 가장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레이넌의 집무실에 들어선 로만은 문을 열고 잠시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굴이 왜 그러십니까.”

르네보다 더한 몰골을 한 레이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레이넌은 로만의 물음에 답을 하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종종 있는 일이긴 했지만…….

일부러 주변의 모든 것에 신경 쓰지 않으려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이럴 땐 그를 더욱이 귀찮게 하는 일은 안 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오늘도 해결해야 할 일은 많았다. 로만은 난감한 얼굴로 레이넌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그는 로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서류에 묻혀 있을 뿐이었다.

레이넌의 관심을 끌기 위해 헛기침도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짜증을 내기라도 했을 텐데 오늘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결혼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가장 무난한 주제부터 이야기했고, 일 이야기를 해서일까. 드디어 레이넌이 고개를 돌려 로만을 바라봤다.

레이넌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한 로만은 웃는 얼굴로 정중하게 말했다.

“아직 급하진 않으니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이넌의 시선이 금세 서류로 돌아갔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로만의 머릿속에 조금 전 마주쳤던 르네의 모습이 떠올랐다.

“르네가.”

집무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분주히 움직이던 레이넌의 손이 한순간에 멈췄다.

“르네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레이넌을 보자 식은땀이 흘렀다.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할 필요는 없는데.’

경솔하게 르네에 대한 말을 꺼낸 것을 후회하며 로만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좋아하는 다과가 뭔지 아시는가 해서요. 오늘은 그걸 티타임에 내 볼까 합니다.”

“좋아하는 다과라…….”

이제까지 몇 번이고 그의 목숨을 지켜 낸 임기응변이 이번에도 제대로 통한 모양이었다.

“알아볼까요?”

“그래.”

레이넌의 대답을 듣자마자 로만은 얼른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오늘 해결할 일 중에 르네에 관한 것도 있었지만 로만은 최대한 뒤로 미루기를 선택했다.

그걸로 로만 자신의 평화를 지켜 냈다고 믿었다. 티타임이 오기 전까진.

에드윈을 데리고 온 르네의 모습에 놀랐지만 어차피 저는 참석하지 않는 자리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로만 님도 함께하시는 건 어때요?”

오늘따라 적극적으로 사람을 모으는 르네는 로만까지 기어코 티타임에 합류시킬 모양이었다.

레이넌과 에드윈은 비슷한 눈으로 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타임 내내 저 시선을 받을 생각이 없는 로만이 거절의 말을 꺼내려고 할 때 르네가 말했다.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해맑은 얼굴로 건넨 단 한 마디로 르네는 로만의 안위를 단숨에 위험하게 만들었다.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기도 전에 한층 더 차가워진 눈빛들이 느껴졌다.

“따로?”

“할 말?”

레이넌과 에드윈은 동시에 중얼거렸다.

그들의 목소리에 담긴 비슷한 감정을 느낀 순간, 로만은 티타임에 함께하게 될 제 미래를 봤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티타임이 결정된 그 순간, 웃고 있는 건 르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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