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바쁘고 분주한 하루를 끝맺을 시간이 다가왔다. 창밖에는 이미 까마득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에드윈의 침실에서는 촛불 몇 개만이 흔들리며 아늑한 밤을 어렴풋이 밝혀 주었다.
“르네! 오늘은 이 책 읽어 줘!”
잘 준비를 마치자 에드윈은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 책을 안고 다가왔다.
에드윈은 잠들기 전 책 읽는 시간을 좋아했다. 나 역시 그랬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기 속에서 에드윈이 숨죽여 이야기를 듣는 모습도 좋았고, 그러다 편안한 얼굴로 잠드는 것도 좋았다.
어떻게 보면 에드윈과 나만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법이었다.
“네. 오늘은 그 책으로 하시겠어요?”
“응!”
내 대답을 들은 에드윈은 신이 나서 먼저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갔다. 제 옆자리에 베개도 세우고 톡톡 쳐서 내가 앉을 자리까지 마련한 에드윈은 들뜬 얼굴로 기다렸다.
나는 어느 때보다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를 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자 에드윈은 마음이 급해졌는지 제 옆자리를 손으로 팡팡 쳤다.
그의 곁에 앉아 제목을 읽고 책을 펼쳤을 때였다.
이 시간에는 바깥에서 열릴 리 없는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불을 대부분 끈 탓에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키가 아주 큰 성인 남자라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다.
늦은 시각에 찾아온 예상치 못한 방문자에 에드윈도, 나도 놀라 서로의 손을 꼭 붙들었다.
“여전히 사이가 좋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고서야 온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공작님?”
나는 침대를 벗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레이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도 그랬다.
언제나 단정히 손질되어 있던 머리칼은 지금은 살짝 물기를 머금은 채 그의 이마를 덮고 있었다.
평소에는 날카롭고도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나른하고도 여유로운 느낌이 흘러넘쳤다.
옷차림과 머리가 달라졌다고 분위기까지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어쩌면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눈앞에 서 있는 레이넌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는 잠자리에 들려다가 여기를 찾아온 것 같았다.
자기 전에 에드윈을 보러 온 건가.
종잡을 수 없는 부자 사이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가도 어느 때는 또 남보다 못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럴 때는 더욱 헷갈렸다. 보통의 부자 관계라면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자기 전에 아들을 보러 오는 것이 이상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간 레이넌이 에드윈을 대했던 태도를 봤을 때 굳이 자기 전에, 특히나 이렇게 편한 차림으로 여길 찾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 마침 시간을 맞춰 온 모양이군.”
역시나 레이넌이 에드윈의 침실을 찾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던 듯했다. 뜻밖의 방문객이 레이넌이라는 걸 알아차리자 에드윈은 얼마나 놀랐던지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레이넌과 내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여전히 얼떨떨한지 눈만 깜빡이며 레이넌의 얼굴을 살폈다.
레이넌의 시선이 에드윈에게 닿았다. 에드윈은 화들짝 놀라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끝내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인상이라도 쓰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레이넌은 태연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소파에 앉아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뭐 해?”
그러니까 학부모님이 보모가 아들에게 책을 잘 읽어 주는지 확인차 방문한 모양이었다.
당황스러움에 에드윈과 눈빛을 주고받자 레이넌은 몸을 편하게 기대며 말했다.
“신경 쓰이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마음대로 되겠냐고.
작은 불평을 속으로 삼키고 에드윈의 곁으로 다시 돌아갔다. 책을 쥔 에드윈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혹여 제가 읽어야 하는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오늘은 제가 읽어 드릴게요. 다음엔 에드윈 님이 읽는 것도 들려드리죠.”
“응.”
나직하게 말하자 에드윈은 금세 몸에 힘을 풀고 편안하게 누웠다.
“아주 먼 옛날에, 지금은 사라져 버린 전설의 동물이 나라를 만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밤에는 주로 역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이야기책을 골라 오는 에드윈이었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듯 읽어 주는 걸 좋아했고,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잠드는 일이 많았다.
오늘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책을 반쯤 읽었을 때 에드윈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에드윈이 잠들더라도 대부분 책은 끝까지 읽었다. 잠들고서도 내용까지 듣는 건 아니지만 내 목소리가 이어지는 걸 느끼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오늘 내가 책을 계속 읽었던 건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떨어지지 않던 레이넌의 시선 때문이었다.
에드윈이 잠들고도 레이넌은 따가울 정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걱정된 나는 다른 날보다 더 책에 집중했다.
에드윈이 잠든 걸 확인하고 조금씩 목소리가 빨라지는 걸 느꼈지만 레이넌은 딱히 뭐라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곧 남은 이야기를 모두 읽어 내고 책을 덮었다. 곤히 잠든 에드윈의 이불을 잘 여며 주고 침대를 벗어나자 레이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역시 어느새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 레이넌의 앞까지 다가갔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규칙적으로 몸이 오르내리는 걸 보면 잠든 것 같기도 했다.
깨워야 할까. 나는 레이넌을 내려다본 채로 고민에 빠졌다.
얼굴이 편안해 보이긴 하지만 앉은 채로 쭉 자면 불편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대로 두고 가 버리면 어쩐지 나중에 한 소리 들을 것 같기도 했다.
깨우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정작 깨우려니까 그가 너무도 편해 보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넌을 이렇게 긴장감 없이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어색한 경험이었다. 눈높이 또한 그랬다.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심지어 그는 앉아 있고 나는 서 있는 상황에서도 어쩐지 그를 올려다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몸이 아래로 내려갔다. 허리를 숙여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잘생긴 얼굴이네.
아니, 눈을 감아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그를 제대로 살펴본 적은 처음이었다.
슬쩍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눈앞에서 흔들어 봤다. 하지만 작은 근육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나 푹 잠든 모양이었다.
“음…….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일단 소파 끝에 있는 모포를 가져와서 그에게 덮어 주었다.
몸을 꼼꼼히 감싸는 중에도 여전히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꽤 곤히 잠든 것 같았다.
깨운다고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깨우는 게 무섭기도 한 나는 그를 깨우지 않기로 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지, 뭐.
일단 나는 퇴근이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서 나도 편하게 자야지.
설레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내디딘 그때, 모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디 가지?”
레이넌의 손이 내 손목을 붙든 걸 알아챈 것과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잠긴 목소리는 나른하게 귓가에 울렸다. 분명 목소리는 그랬는데 이상하게 그가 입을 연 순간공기의 밀도가 갑작스레 높아진 느낌이 들었다.
“주,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요.”
앉은 채 잠든 그를 두고 나 혼자 편히 자려던 것이 마음에 걸린 탓일까. 아니면 갑자기 그의 눈을 바라본 탓일까.
떨리는 목소리는 내 당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분명 잠들어 있었던 것 같았는데.
하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잠기운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레이넌의 눈이 다른 때보다 짙은 색을 띤다고 느낀 순간 그가 붙든 손목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비슷한 체온인데 왜 그가 붙든 곳만 이렇게 뜨겁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레이넌이 갑자기 깨어난 데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짙어지기까지 해서 당황한 나는 손목이 붙들린 것도 잊고 그대로 뒤로 물러섰다.
당연히 그가 나를 놓아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이넌은 내가 바랐던 것과는 반대로 행동했다. 그가 잡은 손목에 슬쩍 무게가 실린다 싶더니 내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아차, 하는 순간 무게 중심이 흔들렸고, 언젠가 그랬듯 익숙하게 레이넌은 내 허리를 감아 왔다.
나는 희미한 불빛의 흔들림이 잔잔해지고서야 내 시야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순식간에 그의 다리 위에 앉은 나는 갑자기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르네.”
덕분에 그의 목소리는 바로 귀에 닿았다. 손목에 닿은 것만큼이나 뜨거운 숨과 함께.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분명 세게 붙들린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움직여 봐도 그는 힘 한 번 쓰지 않고 여전히 나를 붙든 채였다.
“공작님?”
“그래.”
내 부름이 무얼 뜻하는지 알면서도 레이넌은 모르는 척 대답했다.
“놓아주시겠어요?”
“글쎄. 내 질문에 대답하는 게 먼저 아닌가.”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목소리가 귀에 닿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조금 전에 애써 피했던 레이넌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웃음도, 장난기도 없었다. 잔잔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밤이, 혹은 여전히 잘게 흔들리는 촛불이 만들어 낸 환영일까.
멍하니 레이넌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 그의 눈이 조금씩 휘어졌다.
“그래서 대답은?”
“아……. 질문이 뭐였죠?”
“어디 가느냐고 물었는데.”
귀에 닿는 목소리를 피하려고 고개를 돌렸더니 이번에는 그의 짙은 목소리가 그대로 얼굴에 쏟아졌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머릿속에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내 목소리가 레이넌의 얼굴에 닿을까 걱정스러웠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다시 돌렸다.
“에, 에드윈 님이 주무시니까, 저는 이만 제 방에…….”
이러면 적어도 내 숨이 그에게 닿지는 않겠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는 오히려 내 몸을 강하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르네.”
레이넌의 나직한 부름에 결국 눈을 감고야 말았다. 어두워진 시야와 달리 예민해진 청각은 그의 작은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