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여기서 감히? 가능할 리가.”
“하하하. 그럼요. 도망이라니. 로에리안저는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 아닙니까.”
갑자기 어색하고 과장되게 말하는 로만을 보며 레이넌은 작은 웃음을 흘렸다.
실수를 수습하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진 탓에 초조함을 그대로 보인 것이 문제였다.
로만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정도 실수는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넌은 아주 작은 망설임도, 어색함도 모두 짚어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로만의 실수는 매우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레이넌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로만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바쁘고 정신없는 머릿속이 모두 보이기라도 하는 듯이.
“일단 네가 수습을 하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거야. 알지?”
“……네.”
‘걸렸구나.’
로만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뭔지는 아직 모르는 것 같다는 점이 단 하나의 위안거리였다.
“일단 이야기를 이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공작님이 르네를 귀여워하는 건 알겠습니다만, 르네가 워낙 겁이 많으니까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겁이 많아? 전에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녀만큼 겁 없는 여자도 없을 텐데.”
아, 전에 레이넌이 그런 말을 했었더랬다. 로만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대체할 말을 골라냈다.
“수줍음이 많은 듯하니…….”
“수줍음이라.”
급하게 골라낸 대체어가 레이넌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래. 요즘 너무 안 찾아온다 싶더니 수줍음이 많아 그런 것이로군.”
마음에 든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궁지에 몰린 르네가 도망칠 생각이라도 하면 로에리안저의 모두가 곤란했다.
그중 가장 곤란한 상황에 처할 사람이 로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직은 정확한 것을 모른다고 하나 레이넌이 로만의 실수를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르네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레이넌을 로만은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정말 그녀가 도망이라도 생각하면 큰일이었다.
“조금 다정하고 여유롭게 대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네. 르네가 수줍음이 많으니.”
레이넌이 마음에 들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하자 레이넌은 웃었다. 하지만 웃음과는 전혀 다르게 차가운 말이 되돌아왔다.
“나는 가끔 너를 전혀 신뢰할 수 없어.”
“가끔이니 다행입니다. 제가 공작님이었다면 항상 신뢰하지 않았을 텐데요.”
뻔뻔한 로만의 말에 레이넌의 얼굴은 편안하게 풀렸다. 집무실에 들어온 이래 로만의 입에서 나온 말 중 두 번째로 마음에 드는 말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첫 번째는 르네가 수줍음이 많다는 말이었다.
“지금 한 말은 어떻지? 네가 나라면 그렇게 할 건가?”
“아니요.”
로만은 손까지 내저으며 부정했다. 이건 사실이었다.
만약 자신이 레이넌이었다면 이렇게 뭔가 권하는 것에서부터 의도가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레이넌 역시 같은 마음일 것이다.
로만은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된 거, 확실한 방법을 써야 했다.
‘역시 에드윈에게 매달리자.’
레이넌은 처음부터 로만의 조언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입장을 바꾸고서야 레이넌의 마음을 이해했다.
로만이 생각을 정리한 것을 확인한 레이넌은 귀찮은 듯 이제 나가 보라며 손짓했다.
로만은 에드윈에게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매달릴 수 있을지 고민하며 걸음을 옮겼다.
***
“다정하고 여유롭게?”
로만이 집무실을 나가자 레이넌은 작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어떻게 대해야 다정하고 여유롭게 대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로만에게 묻지 않은 건 그 역시 모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건 누구에게 물어야 하지.’
레이넌은 꽤 오래도록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집중해서 답을 찾아보려 생각을 거듭했다.
“도망치면 안 되지.”
적당한 답은 찾아낼 수 없었지만 결론은 내릴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다정하고 여유롭게 대하는 것이 어떤 건지 잘은 모르지만 단어의 뜻은 알고 있으니 일단 비슷하게라도 해 봐야겠다는.
***
레이넌은 귀찮게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 에드윈도, 로만도, 에린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요즘 레이넌을 보면 그들의 말과는 반대인 것 같았다. 오히려 귀찮게 하는 걸 즐기는 편인 듯 보인다고 할까.
본인이 귀찮은 것과 남을 귀찮게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는 건가.
“차가 맛이 없나?”
찻잔을 내려다보고 들지는 않으니 그렇게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맛을 알 리가 없었다.
“아니요. 맛있습니다.”
“그러면 식어서 그러는 건가?”
“아니요. 아주 적당합니다.”
“그러면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나?”
장소라. 장소 자체는 아주 훌륭했다. 로에리안저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장미 정원이었다.
저택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 정원은 특히나 로에리안 가문의 사랑을 독차지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일개 보모 따위가 여기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온갖 색깔의 장미가 곱게 자리한 덕에 어디를 바라보더라도 눈이 즐거웠다.
다만 지나치게 호사스러워서 그렇지.
그리고 그런 호사를 베푸는 사람이 레이넌이라는 게 또 다른 문제라면 문제랄까.
“역시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군.”
“아닙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잠시 정신을 빼앗겼을 뿐입니다.”
매일 찾아와서 에드윈에 대해 이야기를 하라는 것도 이상했는데…….
티타임 때 오라고 시간을 콕 집은 게 더 이상했다는 걸 깨달은 건 다음 날이었다.
다음 날 레이넌을 찾아갔더니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공들여 준비한 듯한 다과와 함께.
티타임을 하기 위해 에드윈에 관한 이야기를 하라고 말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그의 집무실 구석에서 시작된 화려한 티타임은 날이 갈수록 조금씩 범위를 넓혀 갔다.
간단하게 몇 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와 이렇게 성대한 티타임을 가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아예 다과에 손을 대지 않고 에드윈의 이야기만 끝내고 일어서려는 시도도 여러 번 해 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레이넌은 올라온 다과를 모두 맛보고서야 나를 보내 주고는 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내가 먼저 먹는 편이 부담이 적었다.
새로운 방식의 괴롭힘인가. 그러기엔 너무도 호화스러운 방법이었다.
게다가 번거롭기까지 했다.
“그래. 참 아름다운 곳이지. 너무 화려한 곳이라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의 인자한 미소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여러모로 적응이 안 되는 일투성이였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티타임에 공을 들인단 말인가.
“티타임을 굉장히 즐기시나 봅니다.”
“아니. 쓸데없는 시간 낭비 같아서 별로 좋아하진 않아.”
가설 1을 발표해 봤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그러면 요즘 마음이 어지러운 일이 있으신가요?”
“글쎄. 그런 게 있던가.”
가설 2를 발표했다. 그런 게 있나 고민하는 모습은 꽤 진지했으나 바로 떠오르는 게 없는 걸로 보이는바 이번 가설도 실패였다.
가설 3은 내 입으로는 차마 묻지 못했다.
그동안 제가 너무 귀찮게 해서 같은 방법으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건가요?
역시. 내 머리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설 중에 가장 가능성이 큰 건 가설 3인 듯했다.
마음은 불편하지만 차도, 다과도 너무 맛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다른 때는 누리지 못할 여유로운 시간도.
물론 뭘 하든 함께하는 사람이 제일 중요한 법이긴 했지만.
“아, 내일은 에드윈 님도 함께 올까요? 같이 즐기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순간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불편한 기색에 목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아니, 생각보다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매일 불러서 에드윈에 대해 이야기를 하라는 걸 보면 완전 무관심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딱히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은 여전히 없었다.
“에드윈도 함께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생각지도 못한 허락이 돌아왔다.
이렇게 맛있는 게 많은데, 특히나 에드윈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앞에 두고 나만 먹는다는 게 늘 마음이 불편했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레이넌의 앞에 얼쩡대기 시작한 게 두 사람이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 아닌가.
심장 붙들어 가며 노력한 결과가 드디어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이 자리가 물론 에드윈에게도 불편하긴 마찬가지겠지만, 그는 레이넌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조금 무섭고 낯선 것일 뿐이었다.
기뻐하며 이런저런 다과를 집어 먹을 에드윈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분위기도 지금보다 훨씬 경쾌하고 밝아질 것이 분명했다.
“에드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표정이 가장 편해 보이는군.”
“아, 그런가요?”
“대신 한 달에 한 번이야.”
“네?”
“에드윈은 이 시간에 늘 글을 배우지 않나. 시작했으면 나태하게 할 생각은 말아야지.”
나중에 에드윈에게 꾀병이라는 걸 좀 알려 줘도 될 것 같았다.
제 숨통 트이는 법은 찾아 놔야 하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이제 에드윈은 한 달에 한 번은 레이넌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이러다 보면 조금씩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함께 커졌다.
옆에서 지켜보면 레이넌은 생각보다 에드윈에게 관심이 많았다. 제대로 듣지 않는 것 같아도 모두 귀 기울여 듣는 것을 이젠 알았다.
레이넌은 아주 잠깐 스치듯 한 이야기까지 기억하고는 말이 맞지 않는다 싶으면 나중에라도 질문하곤 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또 없다는 게 조금은 쓸쓸하긴 했지만.
여전히 공작저 사람들은 에드윈이 레이넌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요즘은 뭘 하고 있지?”
“요즘 에드윈 님은 책에 빠져 있습니다. 글을 곧잘 읽으셔서 낮에는 제게 책을 읽어 주시지요.”
“에드윈이 네게?”
“네. 읽어 주시는 걸 꽤 즐거워하신답니다. 그런데 꼭 자기 전에는 저보고 읽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자기 전에는 그래서 네가 읽고?”
“네.”
“자기 전에 책을 읽는단 말이지.”
뭐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는데도 레이넌은 한참 생각에 잠겨 뭔가를 중얼거렸다.
오늘의 에드윈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었다. 티타임 시간에 비해 에드윈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이상한 티타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알려 줬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과 달리 그는 티타임으로도 모자라 번거롭게 낭비하는 시간을 조금 더 늘려 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