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는 짓이지?”
“공작님?”
손을 살짝 비틀자 레이넌은 다행히 바로 나를 놓아주었다. 대신 그의 손은 나의 머리로 향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레이넌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었다. 이렇게 명확한 감정 표현은 처음이라 나 역시 그대로 멈춰 서 눈만 굴렸다.
레이넌은 공중에서 멈춰 있던 손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뻗었다.
잔뜩 헝클어져 있던 내 머리카락을 쓱쓱 쓸어내리고서야 그의 손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머리를 가다듬어 주려고 했던 사람에게 너무 과한 반응을 보였던가.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묻지. 대체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손으로 때리면 아프지도 않을 것 같은데 대신 해 줄 사람이 필요한가?”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다. 조금 전보다 아주 서서히 올라오는 그의 손에 나도 모르게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더없이 민첩하게.
그런 내 모습에 레이넌은 이상하게 웃었다. 허탈한 것 같기도, 흥미로운 것 같기도 했다.
어울리지 않는 두 감정이 동시에 느껴져서 혼란스러운 건 아주 잠시였다.
“그래. 그 정도면 답이 되었군. 그러면 이번엔 내가 답을 들을 차례인가?”
“답이요?”
내가 그에게 답을 내어줘야 할 일이 있었던가.
애초에 레이넌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 자체가 시일이 좀 지난 일인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에드윈에 대해 주기적으로 보고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
올 것이 왔구나. 레이넌을 찾지 않으면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었다.
정원까지 찾아왔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그에 대한 준비도 되어 있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길 바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 미소를 본 레이넌은 잠시 움찔하더니 곧 평정을 되찾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내 물음에 레이넌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당당하게 내 방으로 걸어갔다.
그를 만난 게 내 방과 가까운 곳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동안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준비한 것을 뒤적였다.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정작 그에게 보여 줄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되었다.
“부족한 건 없겠지?”
재빨리 다시 한번 훑어보고 방을 나서자 레이넌은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르면서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간간이 내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려는 듯 레이넌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몸이 움찔 튀었다.
레이넌은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방에서부터 품에 꼭 안고 온 꾸러미를 눈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건 뭐지?”
“보고서입니다.”
여전히 긴장은 가시지 않았지만 허리를 쭉 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차근차근 정리하다 보니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양이 늘었다. 지난밤들을 생각하니 오른손이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전부 손으로 써야 했기 때문에 힘도 들었고, 시간도 꽤 많이 걸렸다.
그런데도 잠까지 줄여 가면서 이걸 쓴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그간 레이넌을 찾지 않은 것에 대한 핑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게 레이넌의 마음에 들면 앞으로도 만나는 일을 줄일 수 있으니 열심히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고서?”
네가 왜 그런 걸 썼지? 라는 물음이 얼굴에 드러났지만 애써 보지 않으려 했다.
“네. 에드윈 님의 일상 중 특이 사항이나 에드윈 님의 학업 진척 사항을 포함했습니다.”
책상에 보고서를 올려놓으니 레이넌은 천천히, 아니 무척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제대로 읽는 거 맞아? 뭐 저렇게 빨리 읽지?
“그래?”
“네. 아무래도 이 편이 조금 더 조리 있게 보고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순식간에 넘어가는 종이를 보느라 순간 말이 느려졌다.
엄청 공들여 쓴 건데 시간을 조금 더 들여서 읽어 주지.
마음속으로 아쉬움을 토로하는 아주 짧은 사이에 그는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고생했군.”
“감사합니다?”
뿌듯함은 잠시였다. 감사 인사를 제대로 끝맺지 못한 건 레이넌이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그가 움직이는 방향을 본 내 마음이 한순간에 불안해진 탓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를 따랐다. 그리고 간결한 레이넌의 행동 하나에 나도 모르게 짧은 탄식과 같은 말을 토해 냈다.
“안 돼…….”
조금의 망설임도, 미련도 없이 그는 손을 뻗었고, 그의 손짓 하나에 내 보고서는 벽난로의 땔감이 되었다.
“아니, 그걸 왜……?”
당장 뛰어가 꺼내 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건 레이넌이 떡하니 벽난로 앞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이가 타들어 가는 걸 꽤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나는…….
약이 올랐다.
야근 수당도 받지 못한 내 야근의 결과물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없던 화병이 생길 것 같았다.
벽난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한참 지켜보던 레이넌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레이넌이 내 시야를 모두 가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이 한참 만에 눈에 들어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의 키가 커서 내 목이 아픈 것도 짜증이 나려고 했다.
“이런 기록을 남겨 봤자 좋을 게 없어. 에드윈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널렸으니까. 그리고 보통 그런 사람들의 의도는 음험하지.”
“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내가 레이넌이나 로만을 피하려는 데 집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에드윈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중요하다고 해도 에드윈을 잊어선 안 됐는데.
순식간에 울적해져서 자책하고 있자 레이넌은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 주며 말했다.
“겪어 보지 못한 일이니 그럴 수 있어.”
그에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상냥한 말이었다. 놀라 그를 바라보자 레이넌은 눈을 살며시 접었다.
“잘 만들긴 했더군. 내용은 꽤 간결하고도 핵심을 잘 담았어.”
“죄송합니다.”
어쨌건 내가 큰 실수를 한 건 사실이었다. 그의 말대로 에드윈을 이용하고자 하는 누군가가 먼저 그걸 봤더라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여 사과하려고 했지만 내 어깨를 잡은 손에 막혔다.
“그런 건 됐어. 다만 앞으로 잘하면 되겠지?”
생각보다 따뜻한 상사였구나, 레이넌은.
그의 배려 섞인 말에 감동 받은 나는 한참을 레이넌을 바라보기만 했다.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어딘가 흡족한 미소를 띠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내 감동은 무참히 깨어지고야 말았다.
“그러니 앞으로 직접 와서 말하도록.”
“……네.”
결국은 또 이렇게 되는구나. 뭐든 해 보려고 하면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매일.”
“네. 네?”
다시 들려온 그의 말에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나는 놀라 되물었다. 잘못 들은 것이 분명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는 듯 레이넌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정확하게 그의 의사를 확인시켜 주었다.
“매일.”
벽난로의 온기가 가까운 탓일까. 레이넌의 미소는 분명 따뜻하게 보였다. 그 내용은 어떻든 간에 일단 보이기는 그랬다.
그의 말에 차마 “네.”라고도, “싫습니다.”라고도 못 하고 나는 그저 입만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에드윈에 대해서는 작은 것 하나로도 한참을 이야기할 것 같더니. 그새 마음가짐이 바뀌었나?”
“아니요!”
이번만큼은 힘차게 대답할 수 있었다. 목청이 마음에 든 건지, 내용이 마음에 든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만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지. 내일부터는 점심 이후 티타임에 맞춰 오도록.”
“……네.”
“그리고 밖에 로만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지금 당장 들어오라는 말도 전달해 주겠나?”
“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울적한 마음을 안고 집무실을 나서니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 듯 결연한 얼굴을 한 로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
“로만 님.”
“……왜, 왜 그래?”
침울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로만은 꽤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공작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그러니까 잠깐이면…….”
“‘지금 당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사람 일이 아무리 안 풀려도 하나쯤은 숨통을 틔워 주겠지.
그게 레이넌의 말이라는 게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어쨌건 지친 마음으로 로만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생각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여기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쉬운 듯 자꾸 뒤를 돌아보던 로만의 모습이 사라지고서야 나 역시 무거운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
“왜 그러십니까?”
르네와 겨우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는데. 지금 당장이라는 말에 결국 그녀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로만의 아쉬움을 알 리 없는 레이넌은 이상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기쁜 감정을 참는 건지 화를 참는 건지 헷갈렸다.
레이넌은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다시 입매에 힘을 주기를 되풀이했다.
레이넌의 낯선 모습에 로만은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넌은 원래도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요즘처럼 짐작조차 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로만이 그의 속내를 읽어 보려고 노력 중일 때도 레이넌은 벽난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렇게나 집중해서 벽난로를 볼 일이 뭐가 있나, 싶어 로만도 기웃거려 봤지만 특별한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넌은 그러고도 한참 벽난로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러다 저기 들어간다고 하는 게 아닐까.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르네의 발길이 요즘 뚝 끊겼어.”
“방금 여기서 나간 여자는 누구입니까?”
“조금 전에는 내가 데려온 거지.”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로만이 제 귀를 의심하는 동안 레이넌은 겨우 벽난로 앞을 떠났다.
“왜 에드윈에 대해 이야기하러 오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뜸 보고서를 주더군.”
“보고서요?”
르네도 참 이상한 여자였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건 로만 하나만은 아닐 터였다.
“생각하는 것하고는.”
레이넌은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오싹해서 양팔을 감쌌을 만큼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로만은 그 웃음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레이넌은 지금 이 상황이 꽤 흥미로운 듯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일을 찾은 듯 만족감이 흘러넘쳤다.
레이넌에게서 느껴지는 만족감이 커질수록 로만의 초조함 역시 켜졌다.
‘지금 당장’이란 말에 르네를 놓아주는 게 아니었다.
로만은 처음으로 레이넌의 명을 우선으로 여기고 따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매일 찾아오라고 했지.”
혹시나 일이 다른 쪽으로 흘러가지는 않을까 해서 질문했지만 로만에게 반가운 대답은 아니었다.
어렸을 적의 일과 지금의 상황은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에드윈에게 매달리면 르네와 대화할 기회가 생길까.
어떻게든 일을 바로잡아야 했다. 지금 당장 르네를 잡으러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위해 로만은 온 힘을 쏟아 허벅지를 꼬집었다.
“왜 그러지?”
“르네가 부담스러워서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도망?”
레이넌의 얼굴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로만도 몸을 잘게 떨며 제 양팔을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