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돌려?”
에드윈은 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눈까지 반짝이며 맑게 웃는 에드윈을 보며 로만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에드윈 님?”
“응?”
“무슨 뜻인지 다 아시잖아요.”
힘없이 내뱉은 로만의 말에 에드윈은 밝게 웃었다.
다른 때였다면 로만도 함께 웃었을 테지만 지금 그의 얼굴엔 고단함이 가득했다.
르네는 로만의 조언을 착실히 이행 중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레이넌과의 티타임을 피하곤 했다.
게다가 어쩌다 레이넌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눈에 띄게 어색한 움직임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르네와 만나지 못하는 날이 늘어 갈수록 레이넌의 기분은 점점 더 나빠졌다.
어떻게 해서든 르네에게 새로운 조언을 건네야 했다.
그렇게까지 피하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전처럼 레이넌의 앞에 종종 나타나는 편이 좋겠다는.
하지만 로만 역시 좀처럼 르네를 만날 수가 없었다.
살면서 초조함을 느껴 본 일이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로만은 잘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간 거의 느끼지 못했으니 한번 제대로 느껴 보라는 신의 뜻일까. 미뤄 왔던 빚 상환을 한 번에 하라는 통보를 들은 기분이었다.
요즘 로만은 매 순간 조마조마했다.
어쩌다 운 좋게 르네와 마주친다 싶으면 그녀는 아주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움직임으로 그를 못 본 척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부르면 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르네는 부를 틈도 주지 않고 냅다 도망가 버리기 일쑤였다.
몇 번 그런 일을 겪고 난 후, 로만은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싶으면 아예 뛰어서 잡을 준비부터 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에드윈이, 혹은 마빈이라는 시종이 나타나서 로만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주 짧은 순간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녀는 재빨리 사라지곤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르네도, 에드윈도 실력이 늘었는지 언젠가부터는 그녀의 그림자조차 보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분명 그녀에게 했던 쓸데없는 조언을 거둬들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큰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으리라 장담했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아주 힘겨운 고난의 길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한테 왜 그러시는 겁니까?”
“로만이야말로 왜 르네를 괴롭혀?”
“괴롭…….”
답답함에 말문이 막히는 경험 또한 로만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로만이 황당한 얼굴로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자 에드윈은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다부진 자세로 섰다.
“도대체 르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르네가 뭐라고 했길래 이러세요?”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러십니까?”
“멀리서 로만이 보이기만 해도 르네는 깜짝 놀라면서 눈치를 봐. 도대체 로만이 얼마나 괴롭혔길래……”
에드윈은 르네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로만을 바라보는 에드윈의 얼굴은 조금 전과 전혀 달랐다.
세상에서 제일 극악무도한 악당을 보는 듯한 에드윈의 눈빛에 로만은 억울함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물론 로만이 르네에게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르네를 위한 충고 몇 마디 했던 것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이건 에드윈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한 번쯤 더 고민해 봤을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귀여운 협박까지 해 가며 로만을 움직인 에드윈이…….
이렇게 몹쓸 사람 대하듯 바라보다니.
“르네 좀 그만 괴롭혀.”
에드윈은 마지막까지 야무진 당부의 말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총총거리며 사라지는 에드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만은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내 편은 아무도 없어.”
씁쓸한 혼잣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르네의 강력한 아군을 어떻게 따돌릴 수 있을까. 힘이 빠진 와중에도 로만은 치열하게 생각을 이어 갔다.
레이넌이라면 에드윈처럼 저렇게 깜찍한 경고로 끝내지 않을 테니까.
***
멀리서 로만의 모습이 보이자 몸이 절로 움직였다. 이제는 그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느낌으로 알아채는 정도까지 된 기분이었다.
언젠가부터 로만을 피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 시작한 에드윈은 이번에도 큰 역할을 했다.
로만을 피하려다 보니 에드윈과도 떨어지게 되었지만 마빈도 있으니 잠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죽일 듯이 쫓아오는 거야?”
로만에게 협박인지 조언인지 헷갈리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부터 이상할 정도로 그와 자주 마주쳤다.
굳이 로만과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매번 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 며칠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만이 나를 보자마자 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나를 잡으려고 했다.
물론 로만이 직접 해를 가하지야 않겠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만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로만이 나를 잡으러 뛰어오는 모습 자체로도 꽤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그를 피해 반대편으로 뛰게 되었다.
그래서 피하기 시작했던 게 에드윈이 도와주면서 일이 커졌다.
너무 본격적으로 피하게 되니까 오히려 로만을 마주치는 일이 더욱더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르네! 르네!”
로만이 지나다니지 않을 으슥한 곳을 골라 서성이고 있는데 소리 죽여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모퉁이에 숨은 에린이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에린? 왜 그렇게 은밀하게 불러?”
“응? 아니, 네가 요즘 도망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로만과의 추격전이 꽤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모양이었다.
하긴, 대놓고 뛰어다니며 쫓는 사람과 도망치는 사람이 있는데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할지도 몰랐다.
어쩐지 내가 원했던 안락한 삶과 한 발짝 더 멀어진 것 같아 어깨를 늘어트렸다.
“르네, 정말 미안한데…….”
“응?”
에린은 누군가가 오지는 않는지 눈치를 보면서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내가 전에 했던 이야기 말이야.”
“무슨 이야기?”
나를 붙들어서 말을 꺼내 놓고도 에린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에 의문이 생겨날 때쯤에야 에린은 입을 열었다.
“공작님 눈에 들려면…….”
“아, 그거…….”
그러고 보니 나의 안락한 삶이 날아간 건 공작의 눈에 들겠다는 다짐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하지 말걸. 그랬으면 뭐가 덜 위험한지 따지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코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깊게 한숨을 내쉬자 에린은 눈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거 내가 말한 거랑 완전 반대라고 하더라고…….”
“뭐? 반대라니?”
“그게…… 공작님은 본인을 귀찮게 하는 걸 제일 싫어하신대.”
제일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이 들어간 것처럼 들렸다.
귀찮게 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니. 로만의 말이 맞았다는 걸까?
에린의 말대로라면 로만의 그 말은 협박도, 알 수 없는 계략도 아니라 정말 나를 도와주려는 조언이었다.
이제야 겨우 에린과 로만, 세실의 말이 일치했다.
정말 울고 싶었다. 다들 나한테 왜 이래.
“전에 했던 이야기는? 확실하다고 했잖아?”
“그건 잘못 안 거더라고. 정말 미안해.”
“로만 님이 그렇게 그 자리에 올라갔다고도 했잖아.”
“그것도 그런 소문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대. 이러나저러나 해도 로만 님이 일 잘하는 건 사실이잖아.”
“일 잘하시지…….”
“그래. 아무리 잘 보였다고 한들 공작님이 그렇게 쉽게 사람을 곁에 두실 분은 아니잖아.”
“그렇지…….”
에린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지만 사실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틈만 나면 레이넌의 앞에 나타났던 건 내 손으로 내 무덤을 판 일이 되는 걸까.
“그보다 너도 전에 했던 이야기 있잖아…….”
“응?”
머리가 충격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 탓인지 에린의 이야기를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내가 말한 게 맞았다던 거 말이야.”
“아…….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어…….”
귀찮지 않다고 했지 나를 곱게 내버려 두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는걸.
하지만 그런 이야기까지 에린에게 할 필요도 없고, 그럴 기운도 없어 나는 연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알아챈 에린은 다행히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보다 공작님이 곧 결혼하신다던데, 아는 거 없어?”
“공작님이 결혼하신대?”
질문에 질문을 되돌리자 에린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했다.
“미안. 나야 공작님이 아니라 에드윈 님을 모시는걸.”
“그렇지. 그런데 결혼은 보통 일이 아니니까 너도 아는 줄 알았을 뿐이야.”
“너는 어디서 들었어?”
“응? 그냥 그런 소문이 돌더라고. 상대는 크라우스가의 아가씨래.”
“그래?”
명확한 대상까지 오르내리는 걸 보면 꽤 정확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넌이 결혼이라. 어쩐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그와의 결혼 생활은 굉장히 딱딱하고 어둡고 무미건조할 것 같은데.
하긴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다만 에드윈은 어떨까.
원작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미 많은 게 달라져 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에드윈이 이렇게나 변하고 있었으니까.
얼핏 마주쳤던 금발의 여자가 떠올랐다. 레이넌 못지않게 냉기를 폴폴 풍겼던 여자였다.
하지만 벨라와의 결혼은 원작에 없던 이야기였다. 레이넌은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에드윈을 잘 대해주는 것부터 원작이 틀어진 걸까. 그래서 벨라와의 결혼이라는 변수가 생겨난 걸지도 몰랐다.
레이넌의 결혼으로 에드윈 역시 원작의 모습으로 자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이제야 겨우 밝아진 아이인데…….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걱정이었다.
나는 레이넌도, 크라우스 영애도 잘 알지 못하는데 둘의 결혼이 에드윈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다 문득 당장 에드윈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에린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러자 스치듯 지나간 생각은 작은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아니야. 그냥…….”
“그냥?”
다른 때였다면 둘러댈 말을 찾았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혹시나 에드윈도 소문을 접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소문으로 접하게 되면 그저 결혼한다,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터였다. 벨라와 관련해 에드윈의 위치가 어떻게 되니 마니 이런 사담이 붙을 것이다.
나야 소문 같은 건 크게 귀 기울여 듣는 편이 아니라지만 에드윈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들려오는 것이 소문이니까.
일단 얼른 돌아가야겠다. 로만과 마주치는 일이 조금은 멋쩍은 일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에드윈이 먼저였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잠깐만, 르네!”
돌아서려는 나를 붙든 에린은 다시 한번 주변을 몇 번이고 살폈다. 그러고는 소리를 죽여 말했다.
“정말 결혼을 하신다면 너도 웬만하면 공작님 눈에 안 띄는 게 좋지 않을까?”
“그동안 이미 눈앞에서 얼쩡거렸는데, 그런다고 괜찮아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만……. 소문에 의하면 크라우스가의 아가씨가 굉장히…….”
말끝을 흐린 에린은 그렇게 살피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주변을 확인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귓속말로 말을 이었다.
“욕심도, 질투도 엄청 많으시대. 그런데 네가 자꾸 공작님 곁에 맴돌면…….”
“무슨 말인지 알았어. 고마워.”
“고맙긴.”
에린은 다시 당부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들어 줄 여유는 없었다.
일단 에드윈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에린과 대화를 나누느라 멈추었던 시간만큼 걸음을 재촉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더 고단해질 듯했다. 피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이 아닌가.
로만한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레이넌도, 미래의 공작 부인도 피할 수는 없었다. 마주치자마자 전력 질주라니.
그대로 공작저를 뛰어나가면 모를까.
왜 그랬을까. 아무것도 하지 말걸.
이미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후회였지만 다시금 괴로워진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쳤다.
그래 봤자 아프지도 않고, 기억이 사라지지도 않았지만 뭐든 해야 이 마음이 조금은 풀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에드윈의 침실을 코앞에 두었을 때, 계속해서 머리를 콩콩 치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누군가가 내 양손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얼떨결에 두 손을 번쩍 든 자세가 된 내 앞에는 레이넌이 황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렇게 바로 마주치다니. 뭘 하려고 했던 게 문제가 아니라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운이 없다는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