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6)화 (16/129)

“르네가 뭐라고요?”

레이넌의 서늘한 시선이 로만에게 꽂혀 들었다. 로만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했다는 것 자체가 큰 실수였다. 하지만 로만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르네가 레이넌을 좋아한다니. 이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게다가 그런 이야기를 왜 저렇게 경쾌하게 하는 걸까.

“똑똑히 들어 놓고서 다시 묻는 건 뭐지?”

“죄송합니다. 너무도 뜻밖의 말이라서 그만.”

순순한 사과에 레이넌은 선뜻 물러났다.

그 순간 로만은 확신했다. 레이넌은 지금 기분이 꽤 좋았다.

‘조금 전까지 꽤 언짢은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들떠 보이지?’

로만의 머릿속은 더없이 혼란스러워졌다.

레이넌은 기본적으로 변덕이 심한 스타일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이런 모습은 로만도 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운 내색을 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레이넌은 그런 로만의 모습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뭔가 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기색이 느껴져 로만은 일단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나랑 눈을 잘 못 마주치더군.”

하마터면 ‘뭐라고요?’라고 물을 뻔했다. 다행히 그의 속에서만 크게 메아리친 것이 다행이었다.

로만은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입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혹시나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천천히 다시 질문했다.

“공작님과 눈을 잘 마주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앞에 있네. 너.”

레이넌의 손가락질을 받은 로만은 얌전히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말이 그렇게 틀린 건 아니었다.

로만이 레이넌과 눈도 잘 마주치고 할 말도 제법 잘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사람은 로만이 거의 유일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근거도 있으시겠죠, 물론?”

다른 게 있을 것이다. 로만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물었다.

“가끔 눈이 마주친다 싶으면 바로 시선을 돌리고 어딜 봐야 할지 모르더군. 그리고 얼굴도 빨개지고.”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레이넌의 표정, 목소리, 말투는 하나같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런 부분이 아니더라도 레이넌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어떠한가. 로만조차 한 번씩 그의 기운에 눌리는 기분이 들곤 했다.

설사 레이넌이 상냥한 성격이었다고 해도 보통은 그의 앞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위치가 상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레이넌은 그런 정상적인반응을 보고 르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판단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라는 말은 로만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르네 말고 다른 사람도 늘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르네만큼 내 앞에 꾸준히 나타나는 사람은 없지.”

대신 달리 말해 봤지만 레이넌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로만은 제 경고에 창백해지던 르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리 봐도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로만은 이번에도 역시 제 생각을 속으로 삼켜 냈다.

지금은 때가 좋지 못했다. 레이넌이 이렇게까지 확신하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말을 했다가는 오래도록 그에게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과로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로만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언제나처럼.

“치울까요?”

“내버려 둬.”

그 순간 로만은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어째서입니까?”

“귀엽잖아, 하는 짓이.”

그랬다. 레이넌의 눈에 르네는 꽤 귀여웠다. 르네는 그 작은 몸으로 쓸데없이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였고, 그런 것에 비해 결과물은 꽤 변변찮았다.

그런데도 정작 눈앞에서 르네가 그렇게 아등바등 움직이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도 그랬다. 말을 할 때 그녀는 늘 곧은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다 한 번씩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는데…….

“역시 귀엽네.”

레이넌의 입에서 두 번이나 나온 귀엽다는 말에 로만은 기함했다. 그런 로만의 얼굴을 보고서도 레이넌은 기꺼운 듯 웃었다.

“아니, 그러니까 르네가 공작님을 마음에 품었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던 로만은 끝내 같은 질문을 한 번 더 던지고 말았다.

레이넌이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만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르네는 전혀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 말에도 잠시 날카로운 눈을 하던 레이넌은 곧 시선을 거뒀다. 그제야 로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 그대로야. 눈도 못 마주치는데 어쩌다 한 번 바라볼 때는 얼마나 열렬히 바라보는지 모를 수가 없더군.”

로만은 아무래도 레이넌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로만은 그간 레이넌의 곁에서 봐 왔던 르네의 눈빛을 떠올렸다.

잔뜩 겁먹고 불안한 눈빛이 어째서 열렬한 눈빛으로 바뀐 것일까.

최근 르네가 에드윈에 대한 보고를 할 때는 로만도 나가라고 한 탓에 둘만 남겨지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르네가 열렬히 레이넌을 바라보는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장 오늘 르네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좋아한다는 감정보다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가.

“그렇게 간절히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보면 르네는 욕심이 없나 봐. 겁도 없으면서.”

“……르네가 겁이 없어요?”

“그렇게 끈질기게 내 앞에 나타나서 당당하게 할 말 다 하고 사라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 너 말고.”

“없지만…….”

없지만 르네는 당당하지 않았고 할 말을 모두 하지도 않았다.

르네가 끈질기게 그의 앞에 나타났던 그때 로만도 늘 함께 있지 않았던가.

르네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 바들바들 떨면서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어쩌다 한 번 레이넌과 눈이 마주칠 때면 그녀가 그대로 정신을 잃을까 걱정했던 건 로만 하나만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르네가 나타나면 근처의 시종 하나쯤은 그녀의 뒤에 꼭 서 있었던 걸 보면 그랬다.

같은 사람을 봤는데 어째서 이렇게 기억이 다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보통 강심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특히 로만 자신에게.

“왜 그러지?”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진 로만의 얼굴을 보고 레이넌이 물었다. 로만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닙니다.”

“왜 하필 오늘 이야기하신 걸까요?”

르네의 힘없는 목소리가 로만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로만은 르네의 말에 깊게 공감했다.

오늘 르네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던가. 그렇지 않아도 로만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들바들 떨던 르네는 전보다 더 레이넌을 피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귀찮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귀찮게 구는 게 귀여워.”

“아, 그러고 보니 공작님은 어려서부터 작은 동물을 귀여워하셨죠.”

“비슷한 느낌인가?”

“네.”

로만의 확신에 찬 대답에도 레이넌은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하지만 로만은 달랐다. 아주 예전에, 레이넌도, 로만도 아직은 어렸을 적에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예민하고 귀찮게 구는 걸 질색하던 레이넌이 유일하게 관대하게 대했던 것이 있었다.

간혹 풀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작은 동물들이 알짱거리고는 했는데 이상하게 레이넌은 그들을 쫓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편하게 놀라고 돌을 골라 주기도 했다.

“그때 다람쥐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들이 유독 공작님 곁을 맴돌았었죠.”

“그랬지.”

그때를 떠올리는지 레이넌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오래전의 일인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감정이 묻어났다.

“르네가 그것들과 비슷해 보이십니까?”

“글쎄.”

그 상황과 비슷한 듯 느껴지지만 뭔가 다른 것 같다는 찝찝함이 있었다.

그런데 레이넌이 이렇게 모호하게 대답하니 로만의 속이 조금씩 타들어 갔다.

로만이 생각하는 적당함이 제 기준과 많이 차이가 날까 물었던 르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가 답답해할 걸 알지만 웃음으로 얼버무렸던 것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군.”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다람쥐였나. 갑자기 나를 피하기 시작했지.”

레이넌은 아련하고도 즐거운 추억을 되새기듯 이야기했지만 로만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배신감을 느낀 레이넌이 얼마나 불같이 화를 냈던가.

이미 시간이 오래 흘러 제법 빛바래진 기억임에도 새삼 다시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그건…… 임신을 했으니 본능적으로…….”

“그래. 나중에 저보다 훨씬 작은 새끼를 데리고 다시 오다니. 귀엽기도 하지.”

본인이 화를 냈던 기억은 아예 지워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때 들이친 폭풍과도 같은 레이넌의 화를 모두 받아야 했던 로만은 달랐다.

혹독한 과거의 기억에 괴로워하던 로만은 잠시 숨을 멈췄다.

혹시 르네가 갑자기 레이넌을 피하기 시작한다면?

그런 가정을 떠올린 로만의 몸이 잘게 떨렸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을 한 가지 생각이 가득 채웠다.

르네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걸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그보다 얼굴이 많이 안 좋은데? 잘못한 일이 있으면 미리 말하는 게 신상에 좋은 건 알고 있겠지?”

로만이 레이넌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그 역시 그랬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 시간은 그런 역할이었다.

“요즘 공작님이 혹사시켜서 그렇습니다.”

뻔뻔한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헛웃음을 보였다.

“특별히 일을 더 시킨 건 없는 것 같은데?”

“언제나 일을 많이 시키시니까요.”

이번에는 레이넌도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시위라도 하려고 일부러 얼굴을 그 꼴로 만들었다는 건가?”

“설마요. 하지만 월급이 오르면 제 얼굴도 조금은 더 밝아지겠죠?”

“5프로.”

“째째하시긴.”

“네 월급을 생각해. 싫으면 5프로를 빼는 것도 나는 좋고.”

“싫다니요. 감사한 마음으로 이 몸 다 바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평소처럼 이야기를 하면서도 로만의 머리는 바쁘게 굴러갔다.

일단 르네에게 했던 조언부터 주워 담아야 했다.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하고 집무실을 나서는 로만의 안색은 조금 전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뻔뻔한 얼굴로 월급 인상을 얻어 냈지만 르네의 일이 틀어지면 그간 벌어 놓은 돈쯤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될 터였으니까.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한 조언이었고, 그녀를 설득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금방 잘못된 조언이었다는 걸 알았으니 바로잡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터였다.

***

분명 그래야 했는데, 로만의 예상과는 달리 일은 꽤 어렵게 흘러갔다. 일단 르네를 만나는 것부터가 매우 힘들어진 탓이었다.

어쩐 일인지 아주 간발의 차이로 그녀를 놓치기 일쑤였다.

레이넌의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어도 봤지만 그녀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녀가곤 했다.

누군가의 협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게 유효한 협조를 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에드윈 님.”

“응?”

겨우 르네의 모습이 보인다 싶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에드윈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그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비장한 로만의 부름에 에드윈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르네를 빼돌리시는 겁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