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럭.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였다. 멈춰 있던 시간이 그 작은 소리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바람 소리였나. 고개를 다시 돌리려는데 낮은 나무들이 잘게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곧 그 틈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바로 체이스와 에드윈이었다.
“르네?”
나무 사이를 비집고 고개를 내민 에드윈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어리둥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체이스의 얼굴에는 당황과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에드윈을 말리던 중이었는지 그의 팔을 붙든 체이스는 그대로 굳은 채였다.
어색한 분위기에 눈만 굴리던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레이넌과 찰싹 붙어 있다는 사실을.
차마 레이넌을 밀어내지는 못하고 나 역시 체이스와 비슷하게 얼어붙었다.
레이넌은 우리 중 유일하게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갑자기 나타난 에드윈과 체이스에게 아주 잠시 시선을 주었을 뿐이었다.
다시 나를 바라본 그는 곧 내게 손을 뻗어 고개를 돌릴 때 얼굴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레이넌의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나는 피하는 것도 잊었다.
머리를 정돈해 주고서 그는 허리를 감았던 다른 손을 풀고 뒤로 조금 물러섰다.
덕분에 레이넌과의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생겨났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그에게서 거리를 벌리는 동안 레이넌의 시선은 에드윈에게 꽂혀 있었다.
에드윈을 빤히 바라보는 레이넌의 표정은 어쩐지 익숙했다. 언제 그런 얼굴을 보았는지 떠올린 순간 레이넌이 입을 열었다.
“에드윈 님은!”
크게 터져 나온 내 목소리에 레이넌은 하려던 말을 멈췄다.
세 쌍의 시선이 한순간에 나에게 몰려들었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말을 이어 갔다.
“이미 충분히 많은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내 말에 레이넌은 아쉬운 듯 낮게 혀를 찼다.
역시나. 에드윈에게 새로운 수업이 추가될 뻔했던 모양이었다.
레이넌은 금세 에드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체이스는!”
역시나 다급한 목소리에 다시 레이넌은 나를 돌아봤다.
“아주 좋은 정원사입니다.”
그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모습이 어딘가 계속해 보라는 같아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심히 떼었다.
“에드윈 님도 체이스를 잘 따르고, 체이스가 생긴 것보다 섬세한 면도 있고…….”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드윈은 기껏해야 수업 하나가 늘어나겠지만 체이스는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나무와 꽃을 아주 사랑하는 정원사이기도 하고…….”
말을 하면 할수록 레이넌의 눈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목소리는 조금씩 작아졌다.
차라리 말을 멈추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나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은 횡설수설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군. 그러면 다른 곳으로 보내면 곤란하다는 말이겠지?”
“네.”
눈치를 보며 대답하자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동안 체이스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체이스는 레이넌이 멀어지고 나서야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도 좀처럼 긴장이 가시지 않았는지 몇 번을 더 크게 심호흡을 이어 갔다.
레이넌의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느냐마는 체이스가 이 정도로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은 조금 뜻밖이긴 했다.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어 그를 바라보고 있자 체이스는 숨을 고르고는 나에게 말했다.
“신세 졌네.”
“응? 아니, 신세 졌다고 할 정도까지야…….”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던 터라 당황해서 손을 내젓자 그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런 말은 안 하는 편이 나았을 거야.”
칭찬을 쥐어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원망 어린 눈으로 체이스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고맙다고.”
그리고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에드윈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에드윈 님.”
“응. 내일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체이스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레이넌은 에드윈이 돌보는 꽃을 본다더니 훌쩍 가 버리고, 체이스는 에드윈을 두고 먼저 자리를 떠나 버리다니.
남겨진 에드윈과 나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나도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
로만이 레이넌의 집무실을 찾았을 땐 드물게도 그가 자리를 비운 채였다.
금방 돌아오겠거니 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져 시종에게 물으니 르네와 함께 나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오늘 찾아봬야 한다고 했던가.”
힘없이 저를 원망하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로만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레이넌을 그렇게 귀찮게 하고서도 아직 무사한 걸 보면 운이 좋은 것 같은데…….
로만이 충고를 해 줬음에도 집무실을 떠날 정도로 시간을 보내야 할 일이 생긴 것을 보면 또 반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 정말 에드윈을 위로할 방법을 찾아 놔야 할지도 몰랐다. 에드윈이 그렇게 좋아하는 보모가 곧 바뀌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에드윈을 많이 아끼는 로만이 그를 위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을 무렵 레이넌이 집무실로 돌아왔다.
제법 언짢은 얼굴을 하고서는.
르네는 운이 없는 편이라는 쪽으로 로만의 마음이 기울었다. 그녀와 함께 나갔다가 이런 얼굴로 돌아오다니.
로만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를 시작했다.
“성격이 섬세하다는 건 칭찬인가?”
로만이 중요한 안건들을 힘주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레이넌은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다른 생각을 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까지 던지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냐에 따라 다르겠죠?”
에둘러 말해 봤지만 레이넌에게 통할 리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매서운 눈초리를 받은 로만은 고개를 숙였다.
대체 어디서 뭘 듣고 왔길래 여기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남자의 성격이 섬세하다고 칭찬을 두 번 했으면?”
“칭찬이겠죠? 칭찬이라고 공작님도 말씀하셨네요.”
“섬세한 성격은 또 뭐야.”
“글쎄요. 그보다 집중 좀 해 주시겠습니까?”
“아, 뭐였지.”
“에드윈 님에 대한 소문이 심상치 않습니다.”
“내버려 둬.”
“하지만 이제까지 기껏…….”
“어차피 언젠가는 나올 이야기들이었지 않나. 대책은?”
“에드윈 님의 소문에 묻히긴 했지만 공작님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결혼을 한다던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듯 시큰둥한 태도였다. 로만 역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합니다.”
“누구랑?”
“벨라 크라우스입니다.”
“크라우스가에서 빨리도 움직였군.”
“슈나이더가를 견제하기도 좋고, 벨라 아가씨는 워낙 욕심이 많기로도 유명하니까요.”
슈나이더 공작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로에리안가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처음엔 비슷한 수준이었던 두 가문은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관계가 아주 많이 훼손되었다.
경쟁이 견제로 바뀌었고, 또한 위협으로 발전했다. 어느샌가 두 가문은 서로를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되어 버렸다.
세월이 지나며 이제는 그것이 당연시 느껴질 정도였다. 눈에 띄지 않게 서로를 공격해 왔지만, 제국민 중에 두 가문의 사이가 나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그 덕분에 두 가문 모두 꾸준히 성장해 올 수 있었지만, 그만큼 위험이 도사리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크라우스라…….”
“후작가이긴 해도 일단 재력이나 인맥은 여느 공작가 못지않으니 나쁜 거래는 아닙니다.”
“그렇지…….”
꼬박꼬박 대답은 하는 와중에도 레이넌의 정신은 영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를 집중하게 하느니 그냥 얼른 일을 처리하는 편이 더 빠르다는 걸 잘 아는 로만은 그대로 일을 밀어붙이기를 선택했다.
안 듣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로만이 잘못된 이야기를 한다면 바로 짚어 낼 사람이었으니까.
특별한 말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대로 진행해도 문제없을 거란 뜻이리라.
“그럼 벨라 아가씨와 결혼 진행하겠습니다.”
“아니.”
“네?”
뜻밖의 대답이 들려오자 로만이 놀라 되물었다.
“내버려 둬.”
“그래도 결혼을 하시는 게 여러모로 나을 텐데요. 에드윈 님에 대한 이야기도 가라앉을 것이고.”
“특히 벨라라면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다들 아니까 말이지?”
“네. 벨라 아가씨가 에드윈 님을 공작 위에 오르게끔 두고 보지 않을 테지요, 실제로도.”
“그렇지. 벨라가 로에리안이 되는 것만으로도 예전의 에드윈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끌려 나오겠지.”
“그게 마음에 걸리십니까?”
“아니.”
“그럼 왜……?”
“급한 건 내가 아니라 크라우스 아닌가.”
“아, 그렇군요.”
“그대로 가만히 있진 않겠지. 소문을 더 키울 텐데 내가 아무 반응이 없으면 그만큼 그들은 더 초조하겠지.”
“알겠습니다. 얼마나 얻어 낼 수 있을지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
이로써 로만의 보고는 끝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레이넌이건만 그의 입에선 나가 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로만이 있다는 걸 잊은 건 분명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로만이 나가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말일 텐데…….
“왜 그러십니까?”
꼭 물어봐 달라는 모습처럼 보였던 건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로만의 질문에 재빠르게 반응하는 것이 오히려 그런 질문을 기다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무래도 말이지.”
“네.”
잔뜩 가라앉은 레이넌의 목소리에 로만은 바짝 긴장했다. 여느 때보다 심각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로만이 놓친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뭐지? 크라우스가에 요즘 더 잘된 일이 있었나. 뜯어낼 게 더 있었는데 파악하지 못했던가.’
아니었다. 크라우스가에서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몇 번이고 확인을 마친 후였다.
‘그렇다면 슈나이더가인가.’
그건 더욱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에리안가에서 일하면서 슈나이더가에 관한 일을 놓치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실수였으니.
아무리 생각을 되풀이해도 놓친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답답한 기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런 로만의 답답함을 알 리 없는 레이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없이 집중해서 레이넌의 이야기를 듣던 로만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졌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잘못 들은 것이 분명했다. 레이넌이 이렇게 심각하게 말할 일은 아니었고, 그가 정신을 팔 일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요즘 일을 너무 많이 한 탓에 건강에 이상이 온 것이 아닐까. 자신을 의심한 그 순간, 레이넌이 그 의심은 틀렸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르네가 날 마음에 품은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