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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4)화 (14/129)

“준비는 다 해 뒀어. 바로 씻으시면 될 거야.”

“응? 알았어.”

아직은 기회가 있었다. 마빈은 르네에게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르네는 로만의 뜻을 알 수 없다고 말했지만, 웬만큼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앞뒤 상황이나 분위기를 들으면 로만의 생각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레이넌과 가장 가까운 그의 말을 놓칠 수는 없었다.

“르네, 조금 전에 로만 님이…….”

로만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르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애처로워 보일 정도여서 마빈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을 때였다.

“이제 공작님을 뵈러 가야 하는데 마빈이 갈래? 에드윈 님이 어떻게 지내셨는지 간단하게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힘없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마빈은 뒷걸음질을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가기엔 좀…….”

“……그렇겠지?”

설사 르네가 가엽다고 해도 그건 마빈이 대신 해 줄 수는 없었다. 레이넌과 마주치는 일은 그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마빈의 말에 르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갔다 올게.”

“그, 그래. 잘 다녀와.”

다른 때보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고야 마빈은 다시금 깨달았다.

또 한 번 제 목적을 잊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시 물을 타이밍은 또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

로만의 말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아서 괴로웠던 나는 일단 오늘만이라도 레이넌을 피하고 싶었다.

혹시나 마빈에게 나 대신 레이넌을 만나러 가겠냐는 질문을 던져 봤지만 역시나 그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겨우겨우 떼서 레이넌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시종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

언젠가부터 레이넌에게 내가 왔음을 보고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사라졌다.

정말 로만의 말대로 매우 자주 레이넌을 찾아갔다는 증거일까.

나는 심란한 마음을 안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무거운 집무실의 공기는 이제 전처럼 낯설지 않았다. 습관처럼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막고 레이넌의 책상 앞에 섰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때였다면 내가 먼저 입을 열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마른 입술만 깨물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흘렀지만 레이넌은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레이넌은 늘 한결같았다.

접점이 전혀 없었을 때도, 그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의 눈에 띄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지금도.

이렇게 시선을 한참 마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레이넌의 얼굴에는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내가 그를 관찰하고 있는 걸까, 그가 나를 관찰하고 있는 걸까. 의미 없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어디 아픈가?”

침묵을 깨트린 건 레이넌이었다. 그를 찾아온 건 난데 한참이나 바라보고만 있었던 탓일까.

걱정처럼 들리는 그의 말에 몸이 굳었다.

“아닙니다.”

내 귀에 닿는 목소리는 분명 내 것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낯설게 들렸다. 더없이 딱딱하고 어색한 탓일 터였다.

내 귀에도 그렇게 들릴 정도이니 레이넌에게도 크게 다를 리 없었다.

아픈 것이 아니라는 대답에 그는 몸을 일으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걸음에 맞춰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아주 조금씩 좁혀지는 거리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초조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넌은 여유로운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그의 여유로움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탁.

닫힌 문에 등이 닿았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내가 멈추자 그도 함께 걸음을 멈췄다. 다행히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었을 때였다.

“왜 물러나지?”

“다, 다가오시니까요?”

“그렇군.”

내 대답에 그는 뜻밖에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면 이제 조금만 더 떨어져 줬으면 좋겠는데…….

나의 바람과 그의 생각은 아주 달랐던 모양이었다. 레이넌은 오히려 조금 더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럼 이젠 어쩌려고?”

레이넌의 얼굴에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그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꼭 에드윈이 장난을 치기 전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물론 귀엽고 사랑스러운 에드윈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코끝에 익숙하게 와 닿는 그의 향이 어지러울 정도로 짙어졌으니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공기의 밀도가 높아진 느낌이었다. 몸이 무거워지는 듯해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등 뒤로 손을 돌렸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는 내가 왜 그러는지 알아챈 듯했다. 그의 팔이 내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내 손 위에 내려앉았다.

크고 단단한 손이 닿자 나도 모르게 붙들었던 문손잡이를 놓았다.

아니,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내 손을 꼭 붙들고 있는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왜…… 왜 이러세요.”

“자꾸 도망가니까?”

도망가니까 쫓고 싶다는 걸까. 나를 사냥감 취급이라도 하는 건가.

약하게 올라오던 울컥함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레이넌의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게 그가 지금 얼마나 흡족한지를 아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도대체 저 정도의 만족감을 느낄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당장 바라는 건 얼른 손을 놓고 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주는 것이었으니까.

다행히 손을 덮었던 온기가 천천히 멀어졌다. 마지막 손가락이 손등을 쓸고 떨어지고 나서야 나도 얼른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슬쩍 눈을 내려 그 모습을 확인한 레이넌은 잘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참았던 숨을 내쉰 그 순간 레이넌이 물었다.

“그래서 어디 아픈 건 아니라고?”

“네. 아프지 않습니다.”

“에드윈을 돌보는 네가 아프면 안 될 일이지. 주치의를 부르는 편이 낫겠어.”

“아닙니다!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얼른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적극적으로 두 손을 내저었다.

또한 양팔을 빙빙 돌리고 일어섰다 앉기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나의 건강함을 증명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내가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넌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의외로 상쾌하게 터져 나온 웃음은 그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물론 아주, 매우, 굉장히, 무척 짧은 시간 동안.

“그럼 에드윈이 추가로 돌보게 됐다는 꽃이나 보고 오지.”

“네? 네…….”

말하기가 무섭게 다시 다가오는 레이넌을 피해 옆으로 물러섰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문을 열었다.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레이넌은 문을 붙들지 않은 손을 바깥으로 향해 보였다.

꼭 에스코트하는 모양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지웠다. 레이넌의 얼굴이 미세하게 움찔거렸으니까.

그가 금세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것이란 신호였다.

재빨리 그의 집무실을 벗어나자 레이넌 역시 내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체이스는 실력 있는 정원사지.”

“네. 생긴 것과 다르게 섬세해서 식물도 잘 돌보고, 에드윈 님과도 잘 맞습니다.”

“그래?”

에드윈과도 잘 맞는다는 말이 어디가 기분 나쁠 구석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레이넌은 슬쩍 인상을 썼다.

뭔가 실수를 한 걸까. 내 말을 다시 곱씹어도 딱히 짚이는 건 없었다.

“체이스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로군.”

“네? 마음에 들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저랑 같이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그와는 마음에 들고 말고 할 정도로 많이 마주치는 사이가 아니기도 하고요…….”

뭘 묻고자 하는 건지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침묵의 압박이 계속될 것 같아 일단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횡설수설했지만 레이넌은 뜻밖에도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방금 한 말 중에 또 뭐가 그의 마음에 들 만한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내 착각이었던 걸까.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그런데 공작님?”

“뭐지?”

레이넌은 걸음까지 멈추며 내 부름에 답했다. 뭔가 대단한 것을 물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위축되었던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에드윈 님이 꽃을 돌보게 되었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던가요?”

내 질문에 레이넌의 입매가 단단히 굳었다. 입을 꾹 다물고 그대로 멈춰 버린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전에 꽃을 심는 걸 보지 않았나. 어째서 꽃을 심게 됐는지도 들었고.”

“추가로 돌보게 된 꽃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에드윈이 돌보는 꽃이라고 했는데?”

그랬던가? 아니, 추가로 돌보게 됐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기억력이 나쁜 편인가 보군.”

레이넌은 딱 잘라 말하고는 내 등에 손을 올렸다. 슬쩍 미는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내 걸음을 재촉하기엔 충분했다.

아무래도 아까는 상황이 그랬으니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지. 조금 찝찝함은 남았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 등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레이넌의 손이었으니까.

정원에 도착해서도 레이넌은 여전히 나를 밀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등에 손을 올렸을 뿐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그의 손은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살포시 놓은 손은 어떤 속도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뛰듯이 걸어도 보고 방향도 이리저리 틀어 가면서 걸어 봤지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손에 결국 지친 건 나였다.

지쳤다고 해도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니라 걸음은 내내 뻣뻣했다. 그런 긴장감은 비단 레이넌의 손 때문만은 아니었다.

옆에서 집요하게 와 닿는 레이넌의 시선이 함께 느껴진 탓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건지 궁금했지만 묻고 싶지 않았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앞만 보며 에드윈이 어떤 꽃을 돌보게 됐는지 떠올리면서 그곳만을 향해 걸었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어색하게 움직이던 손과 발이 결국엔 꼬이고 말았다.

내 발에 내가 걸려 몸이 휘청할 때였다. 등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던 손이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와 내 허리를 감았다.

덕분에 금방 균형을 잡은 나는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넌은 오히려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공작님?”

“그래.”

놓아 달라는 의미로 그를 불렀지만 레이넌은 착실히 대답만 할 뿐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이러다 그의, 혹은 내 심장이 뛰는 것까지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절로 숨이 멈췄다.

레이넌의 보랏빛 눈에 내 얼굴이 가득 찬 걸 보는 건 꽤 묘한 기분이었다.

내 눈에도 그가 이렇게 가득 차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든 그때, 레이넌이 작게 웃었다.

그의 웃음이 얼굴에 닿자 참았던 내 숨도 터져 나왔다. 멈췄던 공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그와 나의 숨이 공기 중에 퍼져 뒤섞였다.

뭔가에 홀린 듯이 멍하니 레이넌을 바라보고 있자 그는 서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내 얼굴에 닿으려고 할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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