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자주라고요?”
얼떨떨한 내 물음에 로만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레이넌이 정원까지 찾아와 에드윈에 대한 이야기를 재촉하지 않았던가.
한낮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쥐어짰던 아찔한 기억에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매우 자주 레이넌을 찾아가고 있다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로만에게 대놓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나는 그저 눈으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물론 그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바로 시선을 피했지만.
문득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만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로만 님?”
“웬만해서는 남의 일에 참견 안 하는 게 이롭다는 주의로 살아왔는데…….”
불길한 서론이었다. 뒤에 붙을 말이 좋을 리가 없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공작님 눈에 되도록 띄지 않는 게 네 신상에 좋지 않을까 싶어.”
“되도록이요?”
“네 존재를 공작님께서 아예 인식을 못 할 정도면 좋겠군.”
그 말은 곧 아예 그의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로만의 말에 내 눈앞이 어두워졌다.
“오늘 찾아뵙기로 했는데…….”
“그것참 안됐군.”
나를 애석해하는 듯했지만, 그의 말투와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우 무미건조하고도 성의 없는 그의 맞장구에 힘이 빠졌다.
이런 말을 들었는데 곧 레이넌을 찾아가야 한다니.
“왜 하필 오늘 이야기하신 걸까요?오늘…….”
한숨처럼 새어 나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로만은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알았으면 내일 이야기했을 텐데 그것도 안타깝게 됐네.”
역시나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아 얄미울 정도였다.
아니, 다들 왜 이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서늘하게 쏘아보면서 사람 조마조마하게 만들던 레이넌은 정작 괜찮다고 말하질 않나, 묘한 눈빛을 보내던 로만은 또 레이넌을 찾아가지 말라고 하질 않나…….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머리가 터지거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떠나고 싶었다, 정말로.
안정적이지 않은 게 내 목숨이 될 거라고는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로만 님.”
“응?”
“혹시 공작님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될까요?”
“흐음.”
로만은 쭈뼛거리며 던진 내 질문을 듣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어딘가 적당한 곳으로 옮겨지겠지.”
“적, 적당한 곳이요?”
“그래.”
적당한 곳이라니. 거기가 어딘데!
자세히 묻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확실히 하고 싶으면서도,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하고도 무서운 설명이 이어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제가 생각하는 적당한 것과 로만 님이 생각하시는 적당한 것의 차이가 클까요?”
로만은 내 질문에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지만 끝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들을 수 없었다.
괜히 찝찝한 기분만 커졌다. 한 번 더 대답을 재촉해 볼까 고민해 봤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만이 명확한 답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눈치를 보며 다른 질문을 건넸다.
“왜 이런 이야기를 저한테 해 주시는 거예요?”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가 제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을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레이넌의 눈 밖에 나더라도 그에겐 딱히 잃을 것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반대의 경우에 그가 얻을 것은 또 무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자 로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괜히 레이넌은 물론 로만에게까지 밉보이는 건가 싶어 움찔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에드윈 님이 생각보다 너를 많이 좋아해서 나도 안 하던 짓을 해 본 거지.”
이상하게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혼란에 휩싸인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만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창백하고 야윈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한층 더 어둡게 만들었다.
함정이다. 이건 분명히 함정이야.
알 수 없는 깊고도 음흉한 계략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이 오묘한 미소를 눈앞에 두니 소름이 돋아났다.
내 속을 읽었는지 그의 미소는 점점 더 커졌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 충고를 꼭 귀담아듣도록 해.”
로만은 마지막까지 협박, 아니 조언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 문을 닫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했던 나는 로만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믿어야 해, 말아야 해?”
사람의 마음을 읽는 기계가 있으면 전 재산을 털어서 사고 싶었다. 왜 이 세상에는 그런 기계나 혹은 마법 같은 것도 없는 건지.
어차피 빙의될 거라면 특별한 능력이라도 주던가.
세계관을 원망하다 보니 어느샌가 에드윈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한숨을 내쉬며 에드윈의 침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방 안에서는 누군가가 초조하게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마빈?”
내가 들어온 것도 몰랐던지 마빈은 내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르, 르네?”
“벌써 돌아왔어? 에드윈 님은 어디 계셔?”
분명 그와 함께 있어야 할 에드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 질문에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체이스가 모시겠다고 해서 먼저 왔어. 네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거든.”
정원에서 돌아오면 바로 씻어야 하니 그 준비를 하기 위함인 모양이었다.
“괜찮아?”
마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피며 물었다.
그 모습이 꼭 뭔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모습처럼 느껴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냐니?”
“아, 아니, 로만 님이 따로 부를 만한 일이 뭐가 있나 싶어서.”
“아, 그러게…….”
로만과의 대화가 떠오르자 한순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왜? 뭐라고 하셨길래?”
“로만 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왜 그런 말을 하셨을까?”
“으, 응?”
내용 없이 던져진 질문에 마빈은 당황했다. 딱히 답을 얻고자 한 건 아니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내가 불쌍해 보였던지 마빈은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로만 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건 공작님 정도가 아닐까.”
“……그렇겠지.”
“그보다 로만 님이 뭐라고 하셨길래 이렇게 기운이 없어?”
은근하게 물어 오는 그의 목소리는 다른 때보다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예민해진 탓일까. 그래, 그럴 만했다. 로만과 독대하고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까.
잠시 나를 돌이켜 보는 동안 마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의미 없는 시선이었지만 어떻게 해석한 건지 마빈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내가?”
“도움?”
“그래. 뭐든 말해 봐.”
“뭐든?”
“그래. 뭐든 편하게.”
“그럼 말이야…….”
잠시 망설이던 내가 입을 열자 마빈의 얼굴에는 조금씩 미소가 떠올랐다.
“사는 건 원래 이렇게 피곤한 거야? 쉽게 쉽게 사는 방법은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빈을 덥석 붙들고 질문을 쏟아 냈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그래. 너도 알 리가 없지. 그걸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니.
아주 짧은 순간 타올랐던 기대는 그보다 짧게 식었다.
***
어느 순간부터 일이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마빈의 목숨은 벼랑 아래로 떨어질 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기가 조금 다를 뿐 결과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짐작할 수 없는 방향으로 자꾸 튀는 르네를 신경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차라리 르네를 신경 쓰는 게 낫지.
하루하루 마빈의 속을 타들어 가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에린이었다.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수록 에린의 히스테리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럴 때마다 에린은 불쑥 마빈을 찾아와 한참을 괴롭히고는 했다.
고작 제 분풀이를 위해 누군가의 눈에 띌지도 모르는 위험은 생각지도 않는 그녀의 이기심에 이제 질릴 대로 질렸다.
로만이 르네를 찾았으니 오늘 밤에 또다시 에린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도대체 로만이 왜 르네를 불렀는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런 와중에 그녀의 신경질을 떠올리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욕심만 많아서는.”
“마빈?”
에린을 욕하느라 바빴던 마빈은 르네가 침실로 들어서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르네의 부름에 마빈의 몸은 위로 튀었다. 그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으니까.
하여간 에린은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마빈은 속으로 다시 한번 에린을 욕하며 르네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 제 혼잣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조금 전 너무 놀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르네는 어떠한 의심도 없이 의아한 듯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에린이 잘한 일이 하나쯤은 있을지도 몰랐다.
르네는 꽤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물론 에린이 이런 부분까지 생각하고 르네를 골랐을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에린의 신경질이 늘어 갈수록 르네의 둔한 성격에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초조한 에린이 속이 훤히 보이는 말을 한다고 해도 르네는 알아채지 못할 테니까.
물론 르네의 그런 성격 때문에 마빈 역시 가끔은 긴장감을 놓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혼잣말을 흘리는 등 작은 실수를 하곤 했다.
어쩌면 이런 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르네에게 경계심을 가지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 르네가 에드윈의 보모가 되는 건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그녀가 레이넌의 눈에 띄는 건 아주 나중의 일이어야 했다.
다들 난감해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건 레이넌이 에드윈의 보모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에드윈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아주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늘 기죽어 있던 아이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넌은 자연스럽고 무심하게 에드윈에게 스승을 붙였다.
다른 때처럼 시큰둥한 태도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이미 에드윈이 여러 교육을 받은 후였다.
에드윈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마빈은 누구보다 먼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레이넌도, 에드윈도 전과는 조금 달라지긴 했는데.
에드윈에 대해 뒤늦게 소문이 생겨나며 르네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함께 오르내렸다.
여전히 헷갈리는 건 르네의 존재였다.
그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막강한 존재일까.
“나는 그럼 에드윈 님이 돌아오시면 바로 씻을 수 있게 준비할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뱉어 내던 르네는 곧 어깨를 늘어트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설마 르네에 대한 소문도 에린이 퍼트린 건 아니겠지?”
과한 생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에린이 대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마빈이 보기엔 레이넌은 르네를 딱히 특별하게 느끼지 않았다. 조금은 그녀에게 너그러운 면이 없진 않았으나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에린은 꾸준히 레이넌과 르네의 사이에 뭔가 특별한 감정이 생겨난 것 같다고 의심했다.
모두 다 저처럼 새까만 속을 가지고 사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또한 에린은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상한 재주까지 있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에린이 마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다.
“순진한 르네만 고달프게 됐구나. 하긴, 에린이 아니어도 어차피 쓰고 버릴 말이니 고달픈 건 매한가지인가.”
그래도 에린이 아니라면 조금은 더 편했을 수도 있었겠지.
“쉽게 사는 방법을 물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이 저택을 나가는 것만이 남은 그녀의 삶이 편해지는 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르네에게 굳이 일러 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일에 르네는 작은 비중이지만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었으니까.
아니, 이제 결코 작은 비중은 아니었다. 그녀가 공작저를 나가서는 안 됐다.
“아니, 그보다 로만 님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르네의 뜬금없는 신세 한탄에 정작 중요한 것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만은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시간을 낼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분명 레이넌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을 터였다.
레이넌과 관련해서 사소한 정보라도 모두 모으는 것이 마빈의 임무 중 하나였다.
누구보다 손쉽게 떠볼 수 있는 르네를 상대로 정작 묻는 걸 잊어버리다니.
마빈이 르네의 페이스에 말려 또다시 흐트러져 버린 제 긴장감을 탓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