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안한 마음과는 달리 시간은 꽤 평화롭게 흘러갔다.
그사이 나팔꽃은 쑥쑥 자라서 금세 에드윈은 물론 성인의 키를 넘어섰다.
온실의 문을 예쁘게 감고 올라간 데는 체이스의, 아니 에드윈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한몫 단단히 했다.
나팔꽃이 커 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던 에드윈은 마침내 꽃망울을 터트리자 박수를 칠 정도로 매우 기뻐했다.
“르네가 그린 그림과 똑같이 생겼어!”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에드윈의 목소리에 나 역시 피어난 꽃처럼 활짝 웃었다.
하지만 에드윈의 들뜬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팔처럼 소리가 나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걸까. 꽃을 조심스럽게 꺾은 에드윈은 입에 갖다 댔다.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힘껏 숨을 불어 넣었지만 나오는 건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르네…… 소리가 안 나. 내가 못 하는 걸까?”
실망이 가득한 에드윈의 말에 나 역시 그가 그랬듯 온 힘을 다해 나팔꽃에 숨을 불어 넣었다.
하지만 나라고 특별히 나을 것이 있을까.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을 지켜보던 에드윈은 끝내 상심한 듯 어깨를 떨궜다.
“생긴 게 나팔처럼 생겨서 나팔꽃이었나 봐요.”
에드윈의 곁에 쪼그려 앉아 조용히 말하자 그는 나를 잠시 빤히 바라봤다.
“실망했어?”
“아니요. 에드윈 님이 실망하신 것 같아 조금 슬프긴 하지만요.”
“아니야? 나 실망 안 했어. 그러니까 르네도 기운 내.”
조금 전까지 축 처져 있었으면서도 나를 위로하려는 에드윈은 꽤 필사적이었다. 내 손등을 토닥토닥하는 작은 손은 너무도 따뜻했다.
에드윈의 사랑스러운 마음에 문득 벅차오른 나는 견디지 못하고…….
“르네?”
“에드윈 님, 부디 이대로 커 주세요.”
그를 꼭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에드윈은 잔뜩 굳어 버렸다.
누군가와의 살가운 접촉이 익숙하지 않은 탓인 듯했다.
어쩌면 굉장히 무엄한 행동일지 몰랐으나 그를 이렇게 안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온기를 품고도 잔뜩 긴장한 에드윈이 안타까워서. 그런데도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지닌 그가 기특해서.
에드윈은 천천히 몸에 힘을 풀었다. 곧 내 등에 작은 손이 닿았다.
차마 나를 모두 안을 수 없는 작은 팔이었지만 단단히 붙든 힘은 그의 마음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나 역시 조금 더 힘주어 에드윈을 끌어안았다.
“르네?”
“네?”
“나…… 숨 막혀.”
“어머!”
한동안 얌전히 안겨 있던 에드윈이 꼼지락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놀라 품에서 그를 꺼내 얼굴을 살피니 다행히 그렇게 힘든 낯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품에서 벗어난 후에 조금씩 에드윈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많이 힘드셨어요?”
뒤늦게 숨이 차오른 건가 싶어 놀라 묻자 에드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신 잠시 망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 좋아서.”
“네?”
“르네가 이렇게 안아 주니까 좋아서…….”
에드윈은 부끄러운 듯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와중에도 기분을 숨길 수 없었는지 그의 입꼬리는 잔뜩 위로 솟은 상태였다.
말을 하는 와중에 얼굴은 더욱더 빨갛게 달아올라 금방에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얼굴이 에드윈의 주황색 머리칼과 너무 잘 어울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르네?”
“무례하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언제든 안아 드릴 수 있어요.”
“르네는 무례하지 않아.”
무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까. 나는 작게 웃으며 그를 다시 한번 품에 안았다.
이번에는 에드윈도 전보다 자연스럽게 나를 마주 안았다.
등을 토닥토닥하자 에드윈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몸을 타고 울리는 경쾌한 웃음은 주변을 밝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나 솔직한 에드윈의 웃음은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조금씩 마음이 벅차올랐다.
에드윈은 하루하루 변하고 있었다. 눈치를 보는 일도 전보다 훨씬 줄었고, 무엇보다 아주 많이 밝아졌다.
덕분에 조마조마한 와중에도 내일이 기대되고는 했다.
혹시나 조금 전처럼 에드윈이 숨이 막힐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힘을 주지 않으려 하다 보니 조금씩 손이 떨려 왔다.
“나팔꽃은 보셨는데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응? 뭘?”
“이제 안 오셔도 될 것 같은데, 에드윈 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음…….”
내 질문에 에드윈은 품에서 빠져나와 고민에 빠졌다.
에드윈의 고민이 끝날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양손으로 볼을 감싼 채 진지하게 고민에 잠긴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제법 잘 흘러갔으니까.
시시각각 변하는 에드윈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순간에 진지해지는 것을 보니 이제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다른 꽃도 함께 돌봐 줄 수 있을까?”
“에드윈 님께서요?”
“응.”
매번 뭔가를 하기 전에 그래도 되냐고 묻는 건 습관일까. 하고 싶다고 하면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요. 지금처럼 에드윈 님의 수업을 모두 끝내고 나서라면 얼마든지요.”
“정말?”
“네. 체이스도 좋아하겠어요. 에드윈 님이 오시면 기뻐하던데요.”
“체이스가?”
내 말에 에드윈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티가 잘 나지 않아서 그렇지 체이스는 분명 그랬다.
에드윈이 매일 정원을 찾아 나팔꽃을 소중히 키워 내는 모습에 기뻐했다.
“그럼요. 체이스에게 이런저런 꽃과 나무에 대해 배울 좋은 기회이기도 하겠네요.”
“하긴, 체이스는 꽃과 나무라면 모르는 게 없으니까.”
“네.”
체이스는 에드윈에게 좋은 스승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이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잘했고, 무엇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얼마나 강조했던가.
물론 에드윈이 내가 기억하던 것처럼 사람을 막 죽이고 다니는 잔인한 사람이 될 거란 생각은 않았다.
그래도 자연스럽게 익힐 좋은 기회를 굳이 막을 필요도 없었다.
“체이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무를 손질하던 체이스는 내 부름에 금세 다가왔다.
에드윈의 이야기를 들은 체이스는 예상했던 대로 꽤 기뻐했다.
에드윈이 돌보기 쉬운 꽃을 몇 가지 꼽으며 추천하자 에드윈도 신이 나서 둘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체이스는 그중 몇 가지를 골라 설명을 해 주었고 에드윈은 그가 말한 대로 물을 주고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뒤에서 흐뭇한 얼굴로 에드윈을 바라보다가 그를 도와줄까 싶어 다가서려고 할 때 체이스를 내 앞을 막았다.
“요즘 에드윈 님에 대한 소문이 도는 거 알고 있어?”
“소문? 그거 말하는 거야? 공작님이 에드윈 님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에드윈을 돌보게 된 후부터 다른 시녀들을 만날 일이 없기는 했지만 소문이야 뻔했다.
이미 예전부터 쉬쉬하며 돌아다니던 소문을 왜 갑자기 이야기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체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니라…….”
말을 하려다가 그는 답답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아니라니?”
체이스는 꽤 답답한 듯한 얼굴을 했지만 그보다 더 답답한 건 나였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자꾸.
“에드윈 님이 요즘 후계자 수업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아.”
“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여 되묻자 체이스는 놀라며 내 입을 막았다.
“에드윈 님 듣는다.”
알았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천천히 손을 입에서 뗐다.
“입에 흙 들어갔어.”
내 불평에 체이스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그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보다 그게 무슨 말이야? 후계자 수업이라니?”
“이제까지 에드윈 님은 아무것도 안 했잖아. 모시는 사람은 있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흐렸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나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지, 다들. 레이넌의 무관심을 핑계로.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체이스의 시선은 잠시 에드윈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저런 수업을 들으니 그런 소문이 나는 거지.”
“아니, 근데 후계자 수업을 받는 게 왜?”
“너는 어떻게 나보다 소문에 더 어두워?”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자 체이스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시녀들 사이에 섞여 지냈을 때도 나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도 에린이 말해 주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소문이 많았으니까.
추가 수당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게 잘못인가. 그렇게 일하다 보니 소문 같은 건 신경 쓸 정신도 없고, 체력도 안 됐다.
“원래 그래. 그래서 뭔데?”
“중요한 건 공작님이랑 에드윈 님의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다는 소문도 함께 돈다는 거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레이넌과 사이가 멀어졌는데 에드윈이 어떻게 후계자 수업을 받을 수 있을까.
얼핏 들어도 모순되는 두가지 소문이 돌아다닌다는 말이었다.
황당한 눈으로 체이스를 바라보자 내 생각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상하지? 누군가가 말하길 에드윈 님과 대화를 나누던 로만 님의 얼굴이 험악했다던가……. 그게 또 그렇게 퍼져 나간 모양이야.”
“아니, 그건 또 무슨 어이없는 말이야.”
로만은 원래 표정이 냉소적인 편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음험한 의도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가 에드윈을 대하는 태도는 한결같이 정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만 나름의 애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표정 하나로 그런 소문이 퍼지다니.
“아무튼 그러다 보니까 결론이 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이상한 쪽이라니?”
“에드윈 님의 출생에 대해서 이런저런 추측이 나오기 시작한 거지.”
체이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와서는 소리를 잔뜩 죽여 속삭였다.
“‘실은 에드윈 님이 공작님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든지.”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잠시 숨을 멈췄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정답이라는 걸 알기에 놀란 내 반응을 체이스는 달리 해석한 듯했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체이스는 따로 할 말이 있었던 듯 답답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공작저를 떠돌아다니는 소문을 알지 못해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샌 모양이었다.
“너와 관련된 소문도 돌고 있다는 건…… 당연히 모르겠지?”
당연히 몰랐다. 예상치 못한 체이스의 말에 나는 인상을 썼다.
“네 말대로 나는 너보다 소문에 어두우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 봐.”
“르네, 로만 님이 찾으셔.”
체이스가 입을 열려고 할 때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잠깐이면 모두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민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불청객인 마빈은 나를 재촉했다.
“당장 오래. 에드윈 님은 내가 모시고 갈 테니 얼른 가 봐.”
“체이스, 나중에 하나도 빼먹지 말고 알려 줘야 해.”
로만에게 밉보이는 것은 공작저에서는 매우 무시무시한 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궁금증은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나에 관한 소문은 또 뭘까. 그 이야기부터 들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그 덕분에 로만의 집무실로 향하는 내 걸음은 거침없었다.
집무실을 앞에 두고서야 누구를 만나러 온 건지 실감이 나면서 덜컥 겁이 밀려들었다.
아니, 갑자기 왜? 나를?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애매한 그의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문을 열면 혀를 차며 내 미래에 드리운 어둠을 조롱할 것만 같았달까.
그리고 그런 예감은 언제나 그렇듯 적중했다. 슬프게도.
“왔군. 앉아.”
로만은 나를 보더니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했다. 쭈뼛대며 자리에 앉았지만 그 자세가 꽤 엉성했던 모양이었다.
“편하게 앉아.”
“네.”
몸을 조금 더 뒤로 기대니 로만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도무지 이야기를 시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시선을 견디다 못한 내가 결국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요즘 공작님을 자주 찾아뵙는다지?”
“자주는 아니고, 이삼일에 한 번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매우 자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