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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1)화 (11/129)

레이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에드윈의 침실이었다.

마치 제 침실인 양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레이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 문은 냉정하게 닫혔다.

이대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을 뿐인데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곧장 문이 열렸다.

“뭐 하고 있지?”

레이넌과 시선이 마주치자 괜히 도망치다가 들킨 기분이 들어 눈을 슬쩍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는 문을 붙잡고 내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걸음을 옮겨 침실로 들어서자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인데 몸이 흠칫 튀어 오른 건 왜일까. 무엇보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어야 할 텐데.

몸을 천천히 돌리자 뜻밖에도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레이넌의 고개는 천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꼭 에드윈의 방을 눈에 담는 것처럼.

그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이런 분위기는 또 처음이었다.

무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은 진지함이 느껴졌다.

“차를 내올까요?”

이런 말조차 방해가 될까 조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

에드윈의 침실에서도 차를 준비할 수는 있었다. 웬만한 것은 다 갖춰져 있었으니.

하지만 나는 에드윈의 침실을 나와 내 방으로 향했다. 그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줘야만 할 것 같았다.

물론 레이넌과 함께 있으면 좀처럼 편할 수 없는 나를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그보다 언제 다시 들어가야 하지?”

뜨거운 물을 준비하고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얼마나 시간을 줘야 하지? 이렇게 버티면 에드윈이 돌아오고 독대의 시간은 사라지는 게 아닐까?

그것도 괜찮은데.

아주 짧은 순간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깊은 한숨과 함께 그 생각도 함께 뱉어 냈다. 그랬다가 더 오래 붙들려 있거나 더 살벌한 시선을 마주하게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어느덧 물이 적당히 식었다.

다시 물을 데워 시간을 조금 더 벌어 볼까, 아니 그에게 시간을 조금 더 줄까 고민했지만 결국은 에드윈의 침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레이넌은 에드윈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에드윈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손은 에드윈의 이불을 천천히 쓸고 있었다.

차를 내릴 준비를 모두 마치자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레이넌은 언제 그렇게 집중해서 침실을 둘러봤냐는 듯 평소처럼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앉지.”

“네.”

소파에 편하게 몸을 기대어 앉은 그와는 달리 나는 전혀 편하지 않았다. 겨우 엉덩이만 걸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상태에서 천천히 차를 따랐다.

또르르. 찻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정도로 고요한 방이라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차라리 물소리라도 들리는 편이 마음은 조금 편했다.

하지만 차를 따르고 나니 더는 나를 편하게 해 줄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레이넌은 어쩐 일인지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에드윈이 있을 때는 침실이 활기찼는데 레이넌이 앉아 있으니…….

춥고 무겁고 어두웠다. 분명 같은 장소인데 사람에 따라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새삼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시작하지.”

뜬금없이 시작하자는 말에 눈만 깜빡였다. 정말 분주히 머리를 움직인 덕에 그 말의 의미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그러나 문제는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에드윈 님이 책에서 나팔꽃에 대해 읽은 모양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하셔서…….”

일단 오늘 꽃을 심게 된 이유부터 시작했다. 말을 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레이넌은 딱히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맞나 보다.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는 꽤 편안한 얼굴로 에드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에드윈이 나팔꽃에서 나팔 소리가 나냐고 물었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는 피식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물론 그 모습을 바로 지켜본 나는 그대로 말도, 행동도 잠시 멈췄다.

“계속하지.”

레이넌이 재촉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을지 몰랐다.

언제나 서늘하게, 혹은 무섭게 웃던 그에게서 뜻밖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네가 나팔꽃을 그려서 보여 줬다고?”

“네.”

“버렸나?”

“아닐걸요, 에드윈 님 그림 사이에 있을 텐데…….”

에드윈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갑자기 주제가 왜 내가 그린 그림이 되는 거지.

당황한 마음에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자 그는 턱을 까딱였다.

“가져와 보지.”

레이넌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림을 사랑하는 남자인 모양이었다. 내 그림에까지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는데.

에드윈의 그림 상자에서 나팔꽃 그림을 찾아 레이넌에게 건네자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받아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몸이 움찔거린 것이 느껴졌다. 그 뒤에 파르르 떨리는 손은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지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레이넌의 굳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 그림을 에드윈이 칭찬했다고?”

“네. 매우 칭찬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이걸?”

좀처럼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레이넌을 보자 그림을 돌려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림을 가져가면 에드윈이 아쉬워할 텐데.

나는 레이넌을 재촉하는 대신 그의 앞에 그림 상자를 두었다. 그가 원하는 만큼 보고 편하게 반납하시라는 나의 배려가 퍽 감동적이었던 듯했다.

그림 상자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에드윈의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그 후로는 한동안 기계적으로 에드윈의 일상을 읊었다. 아주 사소하고 그래서 별것 아닌 일들이었다.

이런 걸 말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계속 그의 눈치를 보게 되었지만 레이넌은 꽤 진지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이게 단가?”

끊길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내 말이 끝나고서 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더…… 하란 말이겠지? 생각해 내. 귀여운 에드윈의 모습을 생각해 내야 해.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준비한 차는 바닥이 났고, 바깥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할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심지어 차는 말하느라 목이 탄 내가 전부 다 마셨다.

그렇게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머리에 떠오르는 게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기억에 있는 에드윈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다 한 것 같았다.

괴롭히는 걸까. 제때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지만 더 빨리 찾아갔다면 자주 온다고 혼나지 않았을까.

“에드윈 말고 너는…….”

한참 동안 생각을 하느라 말이 없던 나를 기다리던 레이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르네!”

활짝 열린 문을 붙들고 에드윈은 잠시 그대로 얼어 있었다. 에드윈의 뒤에 서 있던 로만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로만은 당황한, 혹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바빴다.

모두가 멈춰 있는 와중에 서서히 공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레이넌이 천천히 소파에 몸을 묻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편안한 자세를 한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져 갔다.

“예절 교육도 같이 받는 게 좋겠군.”

에드윈의 사교육이 또 하나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

레이넌은 한참을 신이 나서 이야기하던 르네를 떠올렸다. 볼수록 재미있는 여자였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마치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 것도 그렇고, 언제부터 봤다고 에드윈에 대한 애정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것도 그랬다.

이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데 어째서 그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부러 찾아오기 쉽게끔 말도 미리 꺼냈는데.

정작 그녀가 귀찮았을 때는 수시로 불쑥불쑥 나타나더니.

그런데도 화가 나지 않았던 건 말간 그녀의 얼굴을 보면 어쩐지 부정적인 기분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에드윈도 저렇게나 금방 마음을 열고 르네를 따르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제법 위험한 여자일지도.

무엇보다 르네를 바라볼수록 자꾸 알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특히나 푸른빛의 눈동자가 저를 올려다볼 때면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이상한 감각이 마음 어딘가에서 움찔거렸다.

뭔가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말하고 싶기도 한 것 같은데. 도대체 그게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저렇게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면 누군들 쉽게 거절을 할까. 하지만 좀처럼 제 입으로 말은 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에드윈 님이 이제라도 이런저런 교육을 받는 건 좋지만…….”

에드윈의 침실을 나서고 내내 뭔가가 신경 쓰이는 듯한 얼굴을 하던 로만이 결국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의 걱정이 그리 과한 것은 아니었다. 이 또한 르네 때문에 일어난 충동의 결과 중 하나였으니.

어쨌건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로만도, 레이넌도 오래도록 이야기해 오지 않았던가.

“생각보다 이르긴 하지만 어쨌든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네. 하지만 이미 이상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차피 말은 이래저래 계속 돌고 있었지 않나.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이런 충동이 좋은지, 나쁜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래도록 계획해 온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지만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 건 또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일까.

오래 공들인 일이 이렇게 무너지진 않을 거란 자신감이 남아 있어서일까.

“그보다 정체를 도통 알 수 없는 그 낙서는 뭡니까?”

로만은 내내 신경 쓰였던 레이넌의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비밀 암호입니까?”

“나팔꽃이라던데.”

레이넌의 시큰둥한 대답에 로만의 입이 떡 벌어졌다. 허리를 숙여 그림을 조금 더 관찰한 로만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에드윈 님의 그림 실력이 줄었군요.”

굳이 그의 착각을 정정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레이넌은 대답 대신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르네에 대한 뒷조사는 어떻게 됐지?”

“기본적으로 딱히 문제가 될 만한 건 없어 보입니다. 다만…….”

“다만?”

“걸리는 게 있어서 조금 더 조사해 보고 있습니다.”

“걸리는 게 있다니?”

“뭔가 일부러 덮어 둔 것처럼 확인이 안 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일부러 덮어 둔 것처럼?”

“네. 일단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확실히 해 봐야죠.”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지만 그도, 레이넌도 그 말은 믿지 않았다. 음흉한 구석에 있어서만큼은 로만의 예감은 아주 많이 특출났으니까.

“역시나 꽤 귀찮은 여자군.”

레이넌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귀찮지만 한편으로 재미있는 그녀의 방문이 기대되었던 탓이었다.

이런 레이넌의 마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로만은 속으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만의 앞에서 직접 말을 꺼낼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간 레이넌의 태도는 로만도 헷갈리게 할 정도로 모호했다. 분명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르네를 받아 주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나. 레이넌이 누군가를 받아 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평소 냉정하게 사람들을 대하던 레이넌을 떠올리면 르네가 지금껏 버틴 게 용할 지경이었다.

로만의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에드윈이 저렇게나 좋아하는 르네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그가 상실감을 느끼고 슬퍼하는 일은 최대한 막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는 레이넌에게서 르네에 관한 어떠한 지시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당분간만이라도 르네가 그의 눈앞에 띄지 않는다면 에드윈이 슬퍼할 만한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르네에게 조언을 건네는 편이 좋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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